광주광역시 광산구에 있는 조선시대 정자 문화재인,

광주 풍영정(風詠亭)을 찾았습니다.

 

풍영정(風詠亭)은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4호로 지정 되었으며,

광주광역시 광산구 신창동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의 대지 위에 있어,

영산강 팔경(八景)의 7경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광주와 광산 일대에 있는 100여 개의 정각 중 대표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풍영정(風詠亭)은 1560년(명종 15) 승문원(承文院) 판교를 끝으로 벼슬을 물러난 뒤,

고향으로 돌아온 김언거(金彦据,1503∼1584)가 지은 정자로 1948년에 후손들이 지붕을 수리 하였다고 하며, 

여기서 그는 72세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10여년 동안을 김인후(金麟厚), 이황(李滉), 기대승(奇大升) 등 이름난 문인들과 교우하며 지냈다고 합니다.

 

 

 

정자 뒤에는 관리사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반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구조이며,

 

 

 

정자는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로 겹처마의 팔작지붕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어느정도 다듬은 화강암 기단위에 주초는 덤벙주초에 기둥은 배흘림 원주기둥을 세웠습니다.

 

 

 

풍영정(風詠亭)을 세운 김언거(金彦据,1503∼1584)의 본관은 광산 자는 계진(季珍) 호는 칠계(漆溪)이며,

1525년(중종 20)에 사마시(司馬試)를 거쳐 1531년 문과에 급제한 뒤,

옥당(玉堂)에 뽑혀 교리(校理), 응교(應校), 봉사시정(奉史侍正) 등의 내직(內職)을 거쳐 상주(尙州)·연안(延安) 등의 군수를 지냈으며,

승문원 판교를 끝으로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와 생을 마쳤으며,

저서로는 죽와휘어(竹窩暉語), 송사절요(宋史節要), 역대명신간소초(歷代名臣諫蔬抄), 가례초(家禮抄) 등이 있습니다.

 

 

 

풍영정(風詠亭)는 방을 들이지 않고 마루만 둔 낙형의 정자로,

마루는 우물마루이며 전후의 마루로 오르는 입구를 제하고 난간을 둘렀으며,

단청은 하였으나 화려하지 않게 문양이 없는 몆가지의 단색으로만 입혀두어 깔끔한 느낌이 더하며,

 

 


 

풍영정(風詠亭)의 현판은 마루 안쪽에 걸려있어,

정자의 이름인 "풍영(風詠)"은 "논어"에서 가져 왔는데 공자가 제자들에게 소원을 묻자 증점(曾點)이 대답하기를,

"기수(沂水)에서 목욕을 하고 무우(舞雩)에서 바람을 쐬고 노래를 부르며 돌아오고 싶습니다"라고 대답한 것으로,

풍우영귀(風雩詠歸)로 자연을 즐기며 시가를 읊조린다는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지었다고 하며,

 

풍영정(風詠亭)의 현판의 "풍(風)"자와 "영정(詠亭)"자의 배열이 약간 다른 것에 대해서 풍영정에 얽힌 전설이 있어, 

김언거는 덕망이 높아 낙향을 하자 그를 아끼던 사람들이 12채나 되는 정각을 지었다고 하며,

하지만 풍영정 이외의 11채의 정각들은 임진왜란 때 소실 되었는데 풍영정만 소실을 면한 데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있어,

다른 정자들이 다 타버리고 풍영정이 불길에 휩싸이자 현판 글자 가운데 앞의 "풍(風)"자가 오리로 변하여 극락강 위로 날아 올랐고,

이를 기이하게 느낀 왜장이 즉시 불을 끄도록 하자 극락강의 오리가 현판에 날아들어 다시 글씨가 또렷이 되살아났다고 하며,

이로 인해 풍(風)자와 영정(詠亭)의 글씨체가 다른 것임을 알 수 있어 이로인한 전설이 생겨난 까닭이 아닌가 여겨 집니다.

 

 

 

정자의 마루 위에는 제일호산(第一湖山)의 커다란 현판이 있어,

명필 한석봉(韓石奉)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풍영정(風詠亭)의 마루위에는 수많은 명사들이 다녀간 흔적으로,

많은 제영현판(題詠懸板)이 걸려 있어,

 

 

 

정자의 주인(主人) 김언거(金彦琚)의 칠언 율시인 "풍영정 원운(風詠亭 原韻)"으로,

㬱緩年來未得休(체완연래미득휴)   벼슬길에 있으면서 전혀 쉬지를 못했는데

暫登高閣一刪愁(잠등고각일산수)   잠시 높은 각에 오르니 모든 근심이 줄어드네.

月邊孤影人移棹(월변고영인이도)   노를 젓는 사공의 외로운 얼굴, 달빛에 비추이고

風外寒聲鴈下洲(풍외한성안하주)   물을 찾는 기러기 떼 소리, 바람에 차갑구나

爲是名區開壯麗(위시명구개장려)   이름 있는 이 지역이 한 없이 화려하니

仍敎行客故淹留(잉교행객고엄류)   지나가는 길손들이 찾아와서 머무르네

憑看諸老詩篇在(빙간제노시편재)   난간에 기대 앉아 여러 노선비들의 시편을 바라보니

漆水羅山護萬秋(칠수나산호만추)   칠수나산이 만추를 감싸네

 

 

 

조선중기의 문신으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의 아들인,

고용후(高用厚,1577~?)의 차운시(次韻詩)의 편액(扁額)이 있고,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차운시(次韻詩)가 있으며,

 

 

 

신재(愼齋) 주세붕(周世鵬)과 퇴계(退溪) 이황(李滉) 선생의 현액시(懸額詩)가 올려져 있고,

 

 

 

풍영정(風詠亭)의 현액시(懸額詩) 편액(扁額)들은 많고 많아서 일일이 열거할수 없을 정도로 많이 있서,

수많은 시인묵객들이 찾아 다녀갔음을 전하는듯 하며,

 

 

 

오른쪽의 현액시(懸額詩)는 1737년 조선 후기의 문신인 경시관 이유신(李裕身)의 시문(詩文)이며,

 

 

 

오른쪽의 편액으로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관직 생활을 하면서 공정하게 일을 처리해 많은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해봉(海峯) 홍명원(洪命元,1573~1623) 차운시의 시문(詩文) 편액이 있고,

 

 

 

왼쪽은 반계수록의 저자로 널리 알려진 반계(磻溪) 류형원(柳馨遠)의 시문(詩文)으로,

謹次(근차)   삼가 원운을 따라 지음

鞍馬勞勞不暫休(안마노노불잠휴)    말에 안장 지우고 몹시 애써 잠시도 쉬지 못하다가

名亭一上豁羈愁(명정일상활기수)    명정(名亭)에 한번 오르니 객수(客愁)가 환히 트인다

崗巒拱揖圍平野(강만공읍위평야)    산들은 읍을 치듯 평야를 에워싸고

鶴鶯翔回下遠洲(학앵상회하원주)    두르미 해오라기 빙빙 돌아 먼 물가에 내리네

殊絶風煙都領畧(수절풍연도령략)    유달리 뛰어난 풍경을 모두 다 똑똑히 알고

團欒觴詠故淹留(단란상영고엄유)    단란하게 상영(觴詠)하면서 짐짓 오래 머무노라

未必舞雩能勝此(미필무우능승차)    반드시 무(舞雩)가 아니라도 이보다 나을 수 없는데

佳辰又況屬淸秋(가진우황속청추)    이 좋은 때가 또 더욱이 청추(淸秋)에 속함에야

 

 

 

왼쪽의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장군의 시문(詩文)으로,

시운을 따라 지은 "次風詠亭韻(차풍영정운)"이 현액(懸額)되어 있고,

 

 

 

조선 중기의 문인 석주(石洲) 권필(權鞸,1569~1612) 과 동악(東岳) 이안눌(李安訥,1571~1637) 현액시(懸額詩)가 있으며,

 

 

 

"풍영정수리후추모서실(風詠亭修理後追慕敍實)"의 기문(記文)이 있고,

 

 

 

퇴계(退溪) 이 황(李滉,1501~1570)의 풍영정십영(風詠亭十詠)으로,

그중 "선창범주(仙滄泛舟)"를 가져와 봅니다.

一泓流閱幾千秋 今見驗人上釣舟   깊게 흐른 저 강물은 몇 천추(千秋)를 지났는고 / 아름다운 소인(騷人)들이 배를 타고 낚시하네

蕩漾只徙煙裏去 洄旋時向月中浮   탕양하는 그 모습이 연기처럼 흘러가니 / 희선하는 그 물결이 달가운데 떠있구다

筆床茶臼能言鴨 細雨斜風不舞鷗   필상다구(筆床茶臼) 선비집에 오리소리 들려오고 / 세우사풍(細雨斜風) 궂은 날에 갈매기때 고요하네

但識虛靈元有定 來妨吾道付滄洲   허령(虛靈)하는 이 마음이 원래부터 유정(有定)하니 / 우리 도를 다시 밝혀 창주(滄洲)에다 붙혔다네

 

 

 

하서 김인후(金麟厚)의 풍영정 열가지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詩) 풍영정십영(風詠亭十詠)로,

선창범주(仙滄泛舟) 선창에서 배를 띄움

현봉요월(懸峰邀月) 현봉의 달맞이

서석청운(瑞石晴雲) 서석의 개인 구름

금성제설(錦城霽雪) 금성의 개인 눈

월출묘애(月出杳靄) 월출산의 먼 노을

나산촌점(羅山村店) 나산의 마을 가게

양평다가(楊坪多稼) 양평의 많은 곡식

유시장림(柳市長林) 유시의 긴 숲

수교심춘(繡郊尋春) 수교에서 봄을 찾음

원탄조어(院灘釣魚) 원탄에서 고기 낚음

 

 

 

조선중기의 의병이자 문인으로  전북 남원 출신 양경우(梁慶遇 1568 선조 1∼?)와 조찬한(趙纘韓, 1572~1631) 등이,

1618년(광해군 10년) 풍영정 판상의 시에 차운하고 읊은 시문(詩文)으로,

次風詠亭板上韻

吾詩未就豈宜休 羸得淸區分外愁   시를 못 지었으나 어찌 그만두랴 / 맑은 곳에 시름만 넉넉히 얻었네

當日絃歌臥林壑 祗今鷗鷺管汀洲   당일에 현가하며 임학에 누웠는데 / 이젠 갈매기 백로와 물가 차지했네

危階近水梅全坼 古木交簷雪尙留   높은 계단 물 가까이 매화가 피고 / 처마의 고목엔 아직 잔설이 있네

多少壁間難和句 好隨江月照千秋   벽의 시구들은 창화하기 어려우니 / 강가의 달빛 따라 천년을 비추네

 

 

 

조선 후기 문신 겸 학자. 검상 · 대사헌 등을 거쳐 개성부유수가 되고 부제학에 이어 참판에 이르렀던,

나주출신 창계(滄溪) 임영(林泳 1649 ~ 1696)이 풍영정 곁에 서 있는 나무를 백옥수(白玉樹)라고 미화 차운하며 창계집 제2권의 시(詩),

風詠亭敬次竹陰先生韻

客行未可發  江雨復今夕    나그네 아직 길을 나서지 못함은 / 강 비가 오늘 저녁 다시 내림일세

名亭佳麗地  一醉如有約    이름난 정자 아름다운 풍광 속에 / 약속이나 한 듯 한번 취해 보노라

窓前白玉樹  樹老花寂歷    창 앞으로 백옥수가 서 있는데 / 나무는 늙고 꽃은 적막하여라

持杯向花言  與爾成主客    술잔 들고 꽃에게 말을 거노니 / 너와 함께 주인과 손님 되었구나

 

 

 

풍영정(風詠亭)의 현판과 관련한 또다른 이야기로,

김언거가 낙향하여 정자를 세우고 명종 임금께 아뢰니,

정각현판을 그 당시 기인(奇人)으로 소문이 자자한 무주에 기거하는 갈(葛)처사에게 가서 받으라고 하여 기쁜 마음으로 갈처사를 찾아 갔으나,

만나질 못하다가 열네 번째 방문하여 가까스로 만나게 되었다고 하며,

갈처사는 칡넝쿨로 붓을 만들어 글을 써주면서 가는 길에 절대 펴보지 말 것을 신신당부 했으나,

돌아오는 도중 그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그 종이를 펼치니 "풍(風)"자가 하늘로 날아가 버려,

이에 잔뜩 놀란 김언거는 황급히 갈처사를 찾아가 다시 써줄 것을 간청했으나 한사코 거절하다 마지못해

그의 제자인 황처사를 통해 다시 "풍(風)"자를 써주도록 하여 풍영정 편액을 걸 수 있었다고 합니다.

 

 

 

선창산(仙滄山)과 극락강(極樂江)이 마주치는 강변 위에 자리하여,

영산강 팔경(八景)에 포함될 정도의 빼어난 풍광을 자랑했던 곳으로,

세월의 흐름과 도시화로 옛날의 풍취는 많이 떨어지는 느낌 이지만,

수많은 명사들과 문인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던 칠계(漆溪) 김언거(金彦琚)의 정자로,

광주의 정자 문화재 풍영정(風詠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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