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광역시 중구 북성동에 위치한 "월미 한국전통정원"을 찾았습니다

월미공원 내에 5만㎡의 부지에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정원들을 축소해서 재현해 놓은 월미전통정원으로,

 

월미 전통정원은 초행길여서 월미공원으로 들어가지 않고 지나치는 바람에,

전통정원 동문앞에도 주차공간이 있어 동문을 통해서 들어가게 됩니다.

 

 

 

월미공원은 50여년간 군부대 주둔으로 시민의 출입이 제한 되었으나,

2001년 10월 13일에 국방부로부터 관리권 인수를 받아 월미산과 함께 개방하였으며,

월미산의 입구에 위치하여 쉼터로써 이용하기 시작 하였고,

근자에 궁궐정원의 부용지와 애련지, 아미산 굴뚝 및 화계를 만들었으며,

별서정원의 국담원과 소쇄원, 서석지 그리고 민가정원과 양진당, 초가 등을 재현해둔 곳으로,

 

 

 

안내문의 그림을 통하여 월미 전통정원의 배치를 미리 살펴봅니다.

 

 

 

월미 전통정원의 동문으로 들어가면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곳은 "양진당"으로,

정식 명칭은 "안동 하회 양진당(安東河回養眞堂)"으로 보물 30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행랑채를 통하여 양진당(養眞堂)이 있는 사랑채 부터 들어가 봅니다.

 

 

 

양진당(養眞堂)은 입암고택(立巖古宅)으로 불리는 고택의 사랑채로,

1600년대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고택이며,

입암고택(立巖古宅)은 임진왜란으로 왼쪽의 안채는 소실되었고 사랑채인 양진당(養眞堂)은 보존이 되어,

보물 문화재로 남게 되었습니다.

 

 

 

입암고택(立巖古宅)은 조선중기의 명재상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1539∼1601)의 집으로 풍산류씨 겸암파의 대종택이며,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생가인 충효당(忠孝堂)과 더불어 안동 하회마을에서 가장 두드러진 건축물로 꼽히는 곳이기도 합니다.

 

 

 

안동 하회마을에 있는 양진당(養眞堂)은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서,

양진당을 찾아도 안채와 사랑채의 내부는 거의 볼수가 없고 사랑채의 외부만 보고 나와야 하는데,

월미 전통정원 에서는 거의 유사하게 재현해 두어 눈여겨 보게 되는데,

 

 

 

양진당 마루에서 보이는 "양진당(養眞堂)"의 현판은,

우리에게 한석봉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시대의 명필 석봉(石峯) 한호(韓濩)의 글씨인데 원래의 편액과 거의 같아 보이며,

양진당의 마루는 아주 너른편인데 풍천 류씨의 대종가로 집안의 대소사를 관장하는 회의 등으로 너른 대청을 가지게 되었다고 합니다.

 

 

 

사랑채인 양진당(養眞堂) 뒤편에는 사당이 있어,

안동 하회마을의 양진당에는 크고 작은 2동의 사당건물이 나란이 서있는데 이곳은 하나의 사당만을 재현해 두었는데,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으로 하회의 큰 사당만 재현해 두어,

 

 

 

풍산류씨 겸암파의 불천위(不遷位)인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1542~1607)과 그의 형인 겸암(謙菴) 류운룡(柳雲龍,1539∼1601)과,

아버지인 입암(立巖) 류중영(柳仲郢, 1515년 ~ 1573년)을 모신 사당으로 재현해 둔것이니 위패는 없고 상만 간소하게 차려져 있습니다.

 

 

 

사랑채의 뒤에서 안채의 뒤편을 들여다 보면 종가의 느낌을 살리려는듯 수많은 장독들을 놓아 두었고,

 

 

 

사당에서 들어왔던 행랑채 쪽으로 나와,

 

 

 

행랑채의 왼쪽에 있는 낮은문을 통해 안채로 들어가 봅니다.

 

 

 

입암고택(立巖古宅)의 안채는 후손이 거주하고 있어,

하회마을에서도 문은 닫아 두고 일반인은 출입이 허락되지 않은 곳여서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곳에서 재현된 모습이라도 볼수 있어서 그나마 위안이 됩니다.

 

 

 

입암고택(立巖古宅)은 원래는 99칸 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53칸이 남아 있다고 하며,

살림집이라 할 수 있는 안채는 영남 북부지역 고택에서 볼수있는 전형적인 "ㅁ"자형의 폐쇠적인 주택 구조를 하고 있으며,

 

 

 

하회마을의 입암고택(立巖古宅)은 낙동강변 저지대에 위치하고 있어,

홍수에 대비하여 대체를 축대를 높이 쌓고 그 위에 건물을 올려놓고 있는데,

이곳에서도 어느정도 고식을 따른듯 하며,

 

 

 

정면 행랑채만 중문 포함 8칸에 이르는 대저택으로,

중문 왼쪽으로 2개의 방과 대청마루를 두고 작은 사랑채로 사용했던 것으로 보이며,

안채와 사랑채는 담장으로 공간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어 조선시대의 엄격했던 사대부의 생활을 볼수 있습니다.

 

 

 

재현해둔 안채의 대청마루를 들여다 보고,

 

 

 

안채의 안방을 들여다 보니,

엣 가구들과 소품들로 안방을 꾸며두어 밋밋해 질수 있는 고택의 방문에 볼거리를 제공하는 베려가 있습니다.

 

 

 

안동 하회마을의 양진당(養眞堂)을 기대감으로 찾으면,

모두 막아두어 사랑채의 외부만 슬쩍 보구서 나와야 하는데 재현해둔 입암고택(立巖古宅)으로 나마 위안이 됩니다.

 

 

 

양진당(養眞堂)을 나오는곳도 안채의 대문을 통하여 나올수 있어,

안동에서 느낄수 없었던 또다른 경험이며 한복을 입어보는 체험도 하고 있다고 하니,

재현해둔 고택이긴 하지만 한복을 입고 추억의 사진을 남기는 것도 좋은 경험으로 남을듯 합니다.

 

 

 

양진당 뒤편으로 나오니,

소을 이용해 밭을 갈고 있는 농부의 모습을 재현해 두었고,

옆에는 원두막을 두어 시골 농촌의 전원적인 풍광을 즐기는 쉼터로 조성해 두었으며,

 

 

 

조금 더가니 4칸의 아담한 초가집으로 민가정원을 조성해 두어,

전통농가 앞에 채마밭과 농업체험장을 만들어서 체험을 할 수 있으며,

 

 

 

한칸의 마루에는 멧돌과 다듬이돌을 두어 엣 생활을 체험해 볼수 있게 해두었고,

 

 

 

마루 안쪽에는 실을 구하는 물레가 있고 벽에는 옛 생활도구들을 걸어두었습니다.

 

 

 

온돌방을 들여다 보니 간소한 생활도구만 두었고,

 

 

 

한칸은 부엌으로 되어 있어,

부엌의 생활도구들과 지게를 져볼수 있는 체험용 지게의 모습을 볼수 있습니다.

 

 

 

민가정원을 지나면 "습지원"에 이르게되어,

다양한 습지 식물과 어류들을 관찰할수 있는곳으로,

갈대와 코스모스가 하늘거리는 가을이면 더욱 좋을듯한 곳이며,

 

 

 

습지원은 지나면 소쇄원을 재현해 두었는데,

소쇄원(瀟灑園)은 조선 중종 때의 학자인 양산보(梁山甫,1503~1557)가,

기묘사화로 스승인 조광조(趙光祖)가 화를 입자 시골로 은거하러 내려가 지은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1520년~1557년에 전남 담양군 지곡리에 깨끗하고 시원하다는 의미를 담아 조성한 곳으로,

자연과 인공을 조화시킨 조선 중기 정원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우리나라 3대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꼽히는 곳으로,

계곡이 아닌 평지에 조성해 두었는데 시원한 물소리는 찾을수 없는 곳으로 재현해 두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또하나의 별서 정원으로 "국담원"을 재현해 두어,

국담원은 우리에게 생소할수 있으나 함안의 "무기연당(舞沂蓮塘)"으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경상남도 함안군 칠원읍 무기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연당으로,

1728년(영조 4)이인좌(李麟佐)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함안일대에서 의병을 모집하여 공을 세운 의병장 주재성(周宰成)을 기리기 위하여,

관군들은 돌아가는 길에 그의 덕을 칭송하여 마을 입구에 "창의사적비(倡義事蹟碑)"를 세우고,

서당 앞 넓은 마당에 국담(菊潭)이라는 연못을 만들었는데,

월미전통정원에서는 국담, 하환정, 중도를 재현해 두었는데 역시 실제의 무기연당 만큼 아늑한 멋은 떨어 집니다.

 

 

 

국담원을 지나 거닐다 보면 토담으로 이루어진 긴 담장이 향토적인 느낌을 풍겨주고,

 

 

 

저 멀리에 들어오는 문이 있어 정문의 입구로 보여지며 아름답게 장식된 굴뚝들이 서 있어,

조선 태종이 경복궁 서쪽에 큰 연못을 파서 경회루를 세우고 파낸 흙으로 교태전(交泰殿)의 후원에 조성한 가산(假山)을 아미산(峨嵋山)이라고 하며,

아미산의 굴뚝은 왕비의 생활공간인 교태전 온돌방 밑을 통과하여 연기가 나가는 굴뚝으로,

6각형으로 된 굴뚝 벽에는 덩굴무늬, 학, 박쥐, 봉황, 소나무, 매화, 국화, 불로초, 바위, 새, 사슴 등의 무늬가 조화롭게 배치되어 있어,

굴뚝의 기능을 충실히 하면서도 각종 문양, 형태와 구성이 아름다워 궁궐 후원 장식 조형물로서 훌륭한 작품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돌아서 나오는 곳에는 부용지(芙蓉池)가 있어 서울 창덕궁 후원에 있는 연못으로,

조선 정조 원년(1777) 열무지를 부용지로 개칭했고 정조 16년(1792)에 택수재를 재건하여 부용정(芙蓉亭)이라 하였는데,

"부용(芙蓉)"은 연꽃을 의미 하는데 창덕궁 후원의 대표적인 방지(方池)로,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라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음양오행(陰陽五行)사상으로 장방형의 방지 속에 원형의 섬이 배치되어 있으며,

월미전통정원에서는 부용지, 중도, 부용정, 화계, 석물, 괴석 등을 재현 하고 있으며,

보물 제1763호인 부용정(芙蓉亭)은 풍류를 통해 수양을 하는 한국 정자건축의 대표적인 건물로,

수원 방화수류정(水原 訪花隨柳亭)과 함께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아름다운 정자 이기도 합니다.

 

 

 

서울 창덕궁 후원에 있는 애련지(愛蓮池)의 모습도 볼수 있어,

원래 애련지는 불로문(不老門)을 지나면 왼쪽에 자리하고 있는데 이곳은 애련지(愛蓮池)와 정자인 애련정(愛蓮亭)이 바로 보이게 해 두었고,

연꽃을 좋아했던 숙종 임금이 이 정자에 "애련(愛蓮)"이라는 이름을 붙여 연못은 애련지가 되었는데,

애련정(愛蓮亭)은 숙종 18년(1692)에 애련지의 물가에 지은 것으로 정면 1칸 측면 1칸의 이익공의 사모지붕 양식을 띠고 있습니다.

 

 

 

다음으로 찾은곳은 장방형의 메마른 연못만 있고 아무것도 없어 안내문을 보니 "서석지(瑞石池)"로 되어 있어,

서석지(瑞石池)는 담양의 소쇄원, 보길도의 부용원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3대 별서정원(別墅庭園)으로 꼽히는 곳이며,

석문(石門) 정영방(鄭榮邦)이 1613년(광해군 5년)에 축조한 연못과 정자로,

연못 안에는 60여개의 돌이 있는데 이를 서석(瑞石)이라고 부르며 물높이에 따라 돌의 드러남이 서석지의 묘미이며,

7월 중순경에 연못에 피어나는 연꽃꽈 가을의 은행나무가 아름다운 곳인데,

서재인 주일재(主一齋)와 정자인 경정(敬亭)은 보이지 않고 건물터만 하나 두었고,

연지는 자갈을 깔고 돌만 대충 가져다 놓은듯해서 소쇄원의 재현과 더불어 실망감이 다소 들게하는 서석지(瑞石池)의 모습 이기도 합니다.

 

 

 

월미 전통정원을 돌아보고 나오는 길에는,

매화가 이제 막 꽃망울을 터트리고 있어 봄의 문턱에 닿았슴을 알게 해주고,

전통정원에는 벚나무도 많이 보이고 있어 4월이면 주변 풍경과 어울러지는 벚꽃놀이의 장소로도 좋을듯 합니다.

 

 

 

월미 전통정원을 돌아보면서,

하회마을 에서는 개방하지 않아 쉽게 볼수 없었던 양진당(養眞堂)의 안채를 볼수있어 좋았고,

양진당 또한 원형에 가깝게 신경써서 조성해 두었는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3대 별서정원(別墅庭園)중 2곳을 재현해 두었으나,

이름만 소쇄원(瀟灑園)과 서석지(瑞石池) 이지 사실가 너무 멀게 재현해 두어 아쉬움이 남는것은 욕심 일련지 모르나,

조금만 더 신경써서 재현해 두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남았지만,

가족이나 아이들과의 나들이 또는 연인과의 산책에 좋을만한 곳으로,

인천의 가볼만한 곳인 "월미 전통정원"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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