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장성군 삼계면에 있는,

조선중기의 정자 "관수정(觀水亭)"을 찾았습니다.

 

장성 관수정(觀水亭)은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100호로 지정 되었으며,

 

 

 

정자 앞에는 담장의 한쪽을 할애하여 세운지 오래지 않아보이는 "신평 송씨신평 세장비(新平 宋氏 細長比)"와,

"지지당 송흠 신도비명(知止堂宋欽神道碑銘)"이 있어,

신도비는 임금이나 종이품 이상 벼슬한 사람의 무덤 남동쪽의 큰길가에 세운 묘소 안내 석비(石碑)로 거기에는 행적 등이 적혀 있으며,

신도비의 비문은 조선 후기의 학자로 소론의 영수로 활동했던 윤증(尹拯,1629-1711)이 쓰고,

시장(諡狀: 시호를 내려주라고 청하는 글)은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대제학 박태상(朴泰尙,1636-1696)이 지었습니다.

 

 

 

관수정(觀水亭)으로 들어가는 사주문으로,

담장이 토담이나 토석담이 아닌 적벽돌의 담장으로 둘러 두었고,

 

 

 

사주문에는 "관수정(觀水亭)"의 작은 편액이 있으며,

 

 

 

사주문을 들어서면 제법 너른 마당을 두고 "관수정(觀水亭)'이 모습을 드러 냅니다.

 

 

 

관수정(觀水亭)은 조선 중종 34년인 1539년에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1459∼1547)이 지은 정자로,

송흠은 효성이 지극하여 101세의 장수를 누린 노모를 봉양하기 위해 지방에서 외직을 맡아 효행으로 상을 받고,

중종 33년(1538)에는 청백한 관리로 뽑히기도 했으며,

 

 

 

마당 한쪽에는 송흠(宋欽)이 87세 때 지은 "지지당(知止堂) 가훈"과,

청백리 인지지당 송흠의 이야기를 담은 "이도(吏道)의 등불" 등의 비석이 있습니다.

 

 

 

정자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전퇴인 골기와의 팔작지붕 건물로 겹처마를 돌렸으며,

오른쪽 2칸은 마루를 깔고 왼쪽 1칸은 방을 두었는데 방의 3면은 들어 올릴 수 있는 열개문인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개방적인 면이 보이고,

좌우 옆면에는 낮은 평난간을 돌리고 뒷면은 벽으로 처리 하였습니다.

 

 

 

정자의 전면에 걸려있는 "관수정(觀水亭)"의 현판으로,

"관수(觀水)"라 함은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 이며,

 

 

 

정자는 낮은 기단위에 잘 다듬은 초석을 두었고,

디딤돌은 자연석을 골라 둔듯 한데 난간이 없는 마루 앞에 쇠로 장식을 해두어 눈에 들어오며,

 

 

 

작지만 온돌방에 불을 넣는 아궁이도 들여다 봅니다.

 

 

 

관수정(觀水亭)을 세운 송흠(宋欽,1459∼1547)의 본관은 신평(新平) 자는 흠지(欽之)이며 호는 지지당(知止堂)으로 본관은 신평(新平)이며,

전남 영광(靈光)에서 태어 났으며 1480년(성종 11)에 사마시를 거쳐,

1492년 식년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에 있다가 연산군 때에는 은퇴하여 후진 양성에 전념 하였고,

1516년(중종 11) 홍문관 정자(正字)에 복직하여 박사(博士)· 지평(持平) 등의 관직을 두루 지냈으며,

1528년에 담양부사가 되었고 1531년에 장흥부사를 거쳐 노모 봉양을 위해 전주부윤으로 옮겼고,

1534년 전라도 관찰사가 되었으나 98세 고령이신 어머니를 봉양하기 위하여 왕의 특허로 집으로 돌아갔습니다.

어머니가 101세의 나이로 돌아가시자 송흠(宋欽)은 80세의 노령임에도 불구하고 3년간 시묘살이를 하였고,

101세를 산 어머니에 대한 효성으로 7차례나 상을 받기도 하였는데,

지극한 효행이 널리 알려져 많은 사람들의 추앙을 받게 되었으며 90세란 장수를 누리고 죽었고 시호는 효헌공(孝憲公) 입니다.

 

 

 

온돌방의 전면과 마루로 통하는 문은 넘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방에서도 문을 들어 올려두면 바깥의 풍경이 방 안까지 들어 오도록 해 두었는데,

 

 

 

사분합문(四分閤門) 가운데 두짝의 문에는 문양을 넣어 두었는데,

주짝의 문양이 같지않고 다르게 해두어 들여다 보게 되며,

 

 

 

정자의 마루에는 현액시(懸額詩)를 비롯한 많은 편액(扁額)들을 볼수 있어,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의 당시 친한 친구들 엿던 홍언필·전안국·성세창·신광헌·김인후·임억령 등의 시가 많이 있습니다.

 

 

 

관수정(觀水亭) 원운(原韻)의 시문(詩文)이 있고,

 

 

 

석천(石川) 임억령(林億齡,1496-1568)의  차운시(次韻詩)로 경차(敬次) 이수(二首) 중 일수(一首)만을 가져오면,

百年荒僻野亭寒 (백년황벽야정한)   백년간 두메의 정자는 시원한데

春水如今上石欄 (춘수여금상석란)   봄물은 여전히 돌 난간에 흐르도다

朝作名臣居相府 (조작명신거상부)   조정에는 명신으로 의정부에서 일하였고

暮爲漁父釣沙灘 (모위어부조사탄)   늘그막에는 어부로 여울에서 낚시했네

平生食檗眞堪法 (평생식벽진감법)   평생을 깨끗이 하여 법도를 지키었고

餘事能詩亦可觀 (여사능기역가관)   여가에 시 읊은 일 역시 볼만하였네

我本年來慵病甚 (아본년래용병심)   나 또한 근래에 게으름이 심하오매

欲䏂夫子滌塵肝 (욕수부자척진간)   송흠 선생을 좇아서 티끌 마음 씻어내리

 

 

 

담양부사를 역임하였고 우의정에 오른 오겸(吳謙,1496-1582) 차운시(次韻詩)로,

亭臨幽磵水光寒 (정임유간수광한)    시냇가 정자에 물빛이 차갑고

爲愛淸澄獨倚欄 (위애청징독의란)    맑은 물 좋아서 홀로 난간에 기대었네

尙有憂邦文正志 (상유우방문정지)    지금껏 나라를 걱정한 문정공(文正公)의 지기(志氣)라오

初非忘世子陵灘 (초비망세자릉탄)    애초에 세상을 등진 자릉의 개울 아니었네

期耄壽自閑中得 (기모수자한둥득)    백세까지 장수하는 것은 한가한 가운데서 얻어지고

知足心從靜裏觀 (지족심종정리관)    만족한 줄 아는 마음 고요히 뚫어보네

千載聞風猶激懦 (천재문풍유격나)    천년 만에 들은 이야기는 나약함을 분발하게 하였고

餘波分與洗塵肝 (여파분여세진간)    물결을 나누면서 폐와 간을 씻는다오

 

 

 

시강원 보덕(侍講院輔德) 송재(松齋) 나세찬(羅世纘)의 차운시(次韻詩) 시문(詩文)으로,

參差綠影鏡奩寒 (삼차록영경렴한)   길고 짧고 들쑥날쑥한 푸른 그림자 거울처럼 차가운데

百面東坡上小欄 (백면동파상소란)   백면의 동파(중국 송나라의 문인 소동파)가 작은 난간 위에 올랐네

某壑幾思童子水 (모학기사동자수)   골짜기 물을 보며 몇 번이나 놀던 어린 시절 생각하였

此亭今作老臣灘 (차정금작노신탄)   이제는 이 정자가 이 늙은이의 여울이 되었구나

天扶德業能神退 (천부덕업능신퇴)   하늘이 덕업을 안고 몸은 은퇴를 하고

地秘淸區盡異觀 (지비청구진이관)   땅이 감춘 청정한 곳에서 진기한 풍경이 벌어지네

江海元無廊廟隔 (강해원무랑묘격)   강해 江海(강과 바다)와 낭묘 廊廟(조정을 말함)는 원래 간격이 없으니

晴波朗月照忠肝 (청파랑월조충간)   맑은 파도, 밝은 해가 내 마음을 비추네

 

 

 

관수정(觀水亭)의 마루 위에는,

하서(河西) 김인후(金麟厚)를 비롯한 당시 명망 있는 많은 문인들의 시(詩)가 편액(扁額)되어 있고,

 

 

 

관수정기(觀水亭記)의 기문(記文) 편액(扁額)을 볼수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보이는 전경으로,

관수정(觀水亭)의 옛 모습은 천방사와 용암천을 낀 아름다운 경치를 볼 수 있었다고 하는데,

세월의 흐름으로 용암천과 정자 사이에는 도로을 내어주고 멀어져 있어 옛 정취가 반감된듯 하며,

 

 

 

정자는 두벌대의 돌 기단 위에 복발형(覆鉢形)의 주춧돌을 놓고 원형기둥을 세웠고,

기둥 머리에는 경사지게 깍은 보아지를 끼워놓고 주두를 놓은 다음 퇴량을 걸쳐 얹었으며 퇴보 위에는 장혀받침 굴도리를 놓아 서까래를 받쳤고,

가구 구조는 1고주 5량가로 양쪽에는 낮은 평주를 세우고 내진의 고주 끝과 대들보 위에 놓은 동자주 위에 종량을 두어,

원형판대공으로 종도리를 지붕을 지지하도록 하였으며 충량과 선자서까래, 기둥 사이의 소로 받침 등에서 가구미가 돋보이는 건축물 입니다.

 

 

 

조선조의 청백리로 이름났던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은,

전라도 관찰사, 병조판서 등의 높은 벼슬을 하면서도 재물을 탐내지 않고 모든 일을 공평하게 처리함으로써,

청백한 관리로 이름을 떨쳐 청백리 포상을 다섯 번이나 받았다고 하며,

그가 고을에 부임할 때 본인이 타는 말과 어머니와 부인이 타고 가는 말 세 마리로 간소하게 행차했기 때문에,

백성들은 송흠(宋欽)을 "삼마태수(三馬太守)" 라고 부르며 칭송을 아끼지 않았다고 합니다.

 

 

 

관수정(觀水亭) 안쪽에는 재사(齋舍) 또는 관리사로 보이는 낙산재(樂山齋)가 있어,

낙산재를 돌아 보고 관수정(觀水亭)에서 나옵니다.

 

 

 

"맑은 물을 보고 나쁜 마음을 씻는다"는 의미의 "관수정(觀水亭)"은 우리나라 여러곳에서 찾을수 있는데,

지지당(知止堂) 송흠(宋欽)의 효심을 살펴볼수 있고 청백리로 명성을 떨치어,

당대의 명망있는 문인과 선비들의 흔적을 볼수있는곳으로,

전남 장성의 정자 문화재인 관수정(觀水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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