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북도 정읍시 칠보면 무성리 성황산 중턱에 자리한,

조선중기의 정자 "송정(松亭)"을 찾았습니다.

 

송정(松亭)을 찾아 무성리 원촌마을의 성황산 아래에 이르니,

향토문화사료관과 신체를 단련할 수 있도록 체육 시설을 갖추어 놓은 소규모 공원으로 체련 공원(體鍊公園)이 있고,

소공원에는 조선 전기의 문인이자 학자인 정극인(丁克仁)의 동상이 자리하고 있어,

 

 

 

정극인(丁克仁,1401∼1481) 본관은 영광(靈光) 자는 가택(可宅) 호는 불우헌(不憂軒)·다각(茶角)·다헌(茶軒)이며,

1429년(세종 11) 생원이 되어 태학(太學)에 나갔고 1437년(세종 세종 19)세종이 흥천사(興天寺)를 중건하기 위하여 토목공사를 일으키자,

태학생(太學生)을 이끌고 부당함을 항소하다가 왕의 진노를 사 북도(北道)로 귀양을 갔으며,

1451년(문종 1) 일민천거(逸民薦擧)로 종사랑(從仕郞)이 되었으며 여러관직을 거쳐 1469년(예종 1) 사간원정언이 되었으나 연로하여,

1470년(성종 1) 사임하고 태인으로 귀향 하였고 1472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특지가 내리자,

은총에 감격하여 "불우헌가"와 "불우헌곡"을 지었으며 병이 들어 1481년(성종 12) 81세로 졸 하였습니다. 

사후 무성서원에 배향되고 1696년(숙종 22)에는 사액치제(賜額致祭) 되었으며 후학을 키우는 일에 앞장섰고,

문학에 뛰어난 재능을 보여 국문학사상 최초의 가사인 상춘곡(賞春曲)을 지었으며 저서로 “불우헌집” 등이 있습니다.

 

 

 

동상 옆에는 비석 2기가 있어,

정극인(丁克仁) 또는 무성서원(武城書院)과 관련한 비석으로 여겨지며,

 

 

 

소공원 뒤편의 성황산으로 오르는 계단이 있어 오르다 보면,

 

 

 

"시산사삼오비"의 비석이 서있고 갈림길이 나와,

오던길로 바로 오르면 "시산사"의 이정표가 있어 시산사로 방향을 잡아 올라 봅니다.

 

 

 

사당인 시산사(詩山祠)롤 들어가는 솟을삼문이며,

 

 

 

삼문으로 들어서니 문을 닫아두는 빗장을 거북이 모양으로 해두어 눈길이 가고,

 

 

 

시사당앞 마당 한쪽에는 "시산사묘정실록비문"이 있고,

 

 

 

시산사(詩山祠)는 1906년(光武 10年) 무성서원에서 의병을 일으킨 맹주(盟主)인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충의정신을 기려,

1907년 태산사(台山祠)로 세웠으나 일제강점기에 왜정(倭政)의 탄압으로 헐리우고,

1975년 다시 시산사(詩山祠)로 이름을 바꾸어 세우고,

최익현(崔益鉉)과 국헌(菊軒) 김기술(金箕述), 화개헌(和介軒) 김직술(金直述)을 추배(追配) 하였습니다.

 

 

 

시산사(詩山祠)에 배향하고 있는 최익현(崔益鉉,1832∼1906)은,

본관은 경주(慶州) 자 찬겸(讚謙) 호 면암(勉庵)으로,

이항노(李恒老)의 문인으로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르고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항소하다가 제주도로 귀양 가기도 했으며,

을사조약 후 무성서원(武城書院)에서 창의하여 일제에 항거해 활약 하다가 순창에서 체포되어 대마도로 잡혀가 단식한 끝에 순절 하였습니다.

 

 

 

시산사(詩山祠)에서 추배(追配) 하고있는 김기술(金箕述,1849∼1929)은,

본관 도강(道康) 자는 정범(正範) 호는 국헌(菊軒)으로 고현내에서 출생하여 최면암의 문인으로 무성 창의에 참가했던 인물이며,

김직술(金直述)의 본관은 도강(道康) 호는 화개헌(和介軒)으로 최익현의 창의에 적극 참여하여 재정을 담당하여,

정읍, 순창, 임실 등지로 다니면서 모금(募金)을 하여 뒷받침을 다했고 그 뒤에 연화동(蓮花洞) 제각(齊閣)에서 후배 양성에 온 힘을 다 했습니다.

 

 

 

시산사에서 동쪽으로 나있는 길을 따르면 "송정(松亭)"에 이르게 되어,

정읍 송정(松亭)은 전라북도 문화재자료 제13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성황산 동쪽 중턱에 자리잡고 있는 송정(松亭)은 7광, 10현들이 모여 자연을 벗삼아 시를 지어 읊으며 즐기던 곳으로,

 

 

 

처음 지어진 지는 400여년이 되는 정자인 "송정(松亭)"은,

조선조 광해군의 폭정을 바로잡으려다 뜻을 이루지 못한 선비들이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정자를 짓고 시를 읇으며 세월을 보내던 곳으로,

어지러운 세상을 등지고 이곳에 모여 유유자적하던 이들 선비를 가리켜 사람들은 7광(狂)·10현(賢)이라 일컬었는데,

7광(七狂)이라 함은 월봉(月峰) 김대립(金大立), 오무재(悟無齋) 김응빈(金應賓), 부휴제(浮休齊) 김 감(金 堪), 호암(壺巖) 송치중(宋致中),

난곡(蘭谷) 송민고(宋民古), 천묵(天默) 이상형(李尙馨), 관산(觀山) 이탁(李倬)을 칭하며,

10현(賢)이라 함은 칠광 가운데 김응빈(金應賓), 김 감(金 堪), 송치중(宋致中), 송민고(宋民古),이탁(李倬) 외에,

명천(鳴川) 김관(金灌),췌세(贅世) 김정(金?),만오재(晩悟齋)김급(金汲), 월오(月悟) 김우직(金友直), 월담(月潭) 양몽우(梁夢禹)를 이릅니다.

 

 

 

정자의 이름을 송정(松亭)이라 함은,

정자 주변에 노송이 많아 송정이라 했다고도 하고  소나무의 절개를 비유함 이라고도 하며,

 

 

 

송정은 정면 3칸과 측면 3칸의 아담한 정자로,

사방에 마루를 놓고 그 중앙에 작은 방을 하나 두어 비바람을 피하게 하였는데 이것을 환도실이라고도 부르며,

장대석의 기단을 쌓고 그 위에 부정형의 주초를 놓았으며 마루는 난간도 없이 그저 평마루이며,

가운데 들인 방은 4면에 모두 문을 내었고 마루 한편에는 환도실에 불을 때는 아궁이가 있어,

여기에 불을 때서 겨울에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도록 해 두었습니다.

 

 

 

정자 전면의 마루 아래에 불을 넣는 아궁이가 있어,

일반적으로 아궁이의 위치는 옆면이나 뒤편에 있는게 보통인데 앞 부분에 자리하고 있어 특이하며,

 

 

 

송정(松亭)은 사방에 마루를 놓고 중앙에 방을 두고 있어,

호남지역의 전형적인 정자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정자는 나즈막한 기단위에 자연석 초석을 두고 원주를 올렸고,

우물마루도 비교적 낮게 해두어 난간을 두지 않은듯 하며,

난간이 없다보니 사방에 디딤돌을 두어 어느쪽 에서든 마루로 오를수 있고,

 

 

 

방의 전면에 있는 문위에는 "영모당(永慕堂)"의 현판이 걸려 있고,

 

 

 

송정(松亭)의 1칸 방은 사방에 문을 내어두어 밝은편이며,

 

 

 

정자에는 여러 시문(詩文)과 기문(記文)의 편액들이 있어,

 

 

 

현액시(懸額詩)들과 함께 중수기(重修記)도 여러 편액(扁額)을 볼수있어,

송정중수기(松亭重修記)에 의하면,

“정자 이름을 송정이라 함은 솔의 절개를 비유함이다.<중략>

후세에 중문과 축대, 정문길, 담장, 집처마를 고치고 주위에 화초 나무를 심고 돌을 쌓고 흙을 돋았다.<중략>”

이러한 내용으로 보아 지금의 건물은 후손들이 중건하여 건립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보면,

세월이 흘렀지만 아직도 소나무가 많이 남아 있고,

 

 

 

송정(松亭) 아래로는 동진강이 흐르고 있고,

강 건너에는 칠보면 소재지와 독계봉과 촛대봉 주변의 모습이 희미하게 들어 옵니다.

 

 

 

정자 뒤편에는 사당인 "영모당(永慕堂)"이 있어,

 

 

 

영모당(永慕堂)은 일명 송정영당(松亭影堂)이라고도 하며,

칠광도(七狂圖)와 십현도(十賢圖)를 봉안하고 있는 사당으로,

1617년(광해군 9)에 인목대비(仁穆大妃) 유폐사건에 항의, 상소하였다가 뜻을 이루지 못한 우국지사들이 이 곳에 은거하였는데,

이들을 칠광십현(七狂十賢)이라 하며,

1899년 후손들이 그 유지에 영당을 세워 칠광도와 십현도를 봉안하고 춘추로 향사 하였습니다.

 

 

 

영모당(永慕堂)의 내부에는 칠광(七狂)을 알리는 명단의 편액이 있어,

김대립(金大立) (1550~1609)자 신부(信夫) 호 월봉(月峰)  도강인

김응빈(金應贇)(1553~1632) 자: 언겸(彦兼) 호:오무재(悟無齋) 도강인

이   탁(李   倬) (1581~ ? ) 호:관산(觀山) 字:孟晉 전주인

이상형(李尙馨) (1585~1645) 자 덕선(德先). 호 천묵재(天默齋). 시호 충경(忠景).

김   감(金   堪) (1590~1662) 자:계임(季任) 호:부휴재(浮休齊) 안동인

송치중(宋致中) (1591∼1643). 자: 정오(正吾)  호:壺巖  여산(礪山)인

송민고(宋民古) (1592년∼1664)  字:순지(順之), 호:난곡(蘭谷) 여산인, 문인화가로 작품수점이 현존합니다.

 

 

 

송정(松亭) 10현(十賢)의 편액도 함께 걸려 있는데,

10현에 7광의 5분이 해당되어 7광(狂)·10현(賢)은 17분이 아니라 모두하면 12분에 해당하며 송정십현(松亭十賢)으로는,

김응빈(金應贇)(1553~1632) 자: 언겸(彦兼) 호:오무재(悟無齋) 도강인

김   관(金   灌) (1575~1635년) 자:옥이(沃而) 호: 명천(鳴川) 도강인

이   탁(李   倬) (1581~ ? ) 호:관산(觀山) 字:孟晉 전주인

김   정(金   鼎) (1587 ~1636)  자 : 汝深  호:췌세(贅世) 도강인

양몽우(梁夢禹) (1589 ~1635) 字:夏卿 호:월담(月潭) 제주인  1609년 생원급제

김   감(金   堪) (1590~1662) 자:계임(季任) 호:부휴재(浮休齊) 안동인

송치중(宋致中) (1591∼1643). 자: 정오(正吾)  호:壺巖  여산(礪山)인

김   급(金   汲) (1591~1643)  字:尙吉  호: 만오재(晩悟齋) 도강인

송민고(宋民古) (1592∼1664)  字:순지(順之), 호:난곡(蘭谷) 여산인, 문인화가

김우직(金友直) (1594~1659) 字:士益  호:월오(月悟) 도강인

 

 

 

영모당(永慕堂)에 있는 송정십현도(松亭十賢圖)와 칠광도(七狂圖)로,

조선 말기의 화가인 석지(石芝) 채용신(蔡龍臣,1848~1941)의 1910년의 그림입니다.

 

 

 

전라북도 정읍의 문화재 탐방에서 찾은곳으로,

정극인(丁克仁)을 만날수 있고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의 유허가 있으며, 

광해군때의 7광(狂)·10현(賢)의 은거지 였던 곳으로,

정읍 원촌마을에서 만난 정읍의 송정(松亭)과 영모당(永慕堂), 그리고 시산사(詩山祠)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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