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영양군 석보면 주남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인 "남악정(南岳亭)"을 찾았습니다.

 

영양 남악정(南岳亭)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8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남악정(南岳亭)으로 들어가는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으로,

중앙 대문간을 중심으로 좌우에 고방이 있으며,

대문채는 홑처마의 맞배지붕이며 지붕 끝은 와구토로 마감 했습니다.

 

 

 

대문채의 사주문에는 홍도문(弘道門)의 현판이 있어,

숙종임금의 어필이라 하며,

 

 

 

대문을 들어서면 남악정(南岳亭)이 자리해있어,

조선 숙종 때 성리학자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이 학문에 전념하기 위해 지은 건물로,

창건 당시에는 초당(草堂) 이었던 것을 여러 차례 중수를 거치면서 후손들에 의해 기와집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남악정(南岳亭)은 정면 3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의 오량의 홑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으로, 

 "一"자형 누정 건축물로 높이 1미터 가량 돌을 쌓아 기단을 다지고 그 위에 시멘트로 마감 하였으며,

건물의 정 중앙에 계단을 설치하였고 그 계단 위에 섬돌을 놓았으며 자연석 주초를 놓고 사각형의 기둥을 세웠고,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놓고 방 측면에 구들을 깔아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이며,

전면에는 반 칸 규모의 퇴칸을 두었고 퇴칸의 주위에는 정 중앙의 반 칸 규모만 남기고 평난간을 세운 헌함을 설치 하였습니다.

 

 

 

정자의 전면에는 "남악초당(南嶽草堂)'의 현판이 있어,

남악정(南岳亭)의 초창기에는 초가였기 때문에 초당(草堂)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 하며,

 

 

 

정자의 마루 위에는 단 하나의 편액을 볼수 있어,

 

 

 

"남악정중수기(南嶽亭重修記)"로,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10대손인 간송(澗松) 이장호(李長浩, 1905~1981)가 쓴 중수기문이며,

현재 주남에 있는 건물은 일제 강점기와 한국전쟁을 거쳐 퇴락한 건물을 문중과 유림이 힘을 합해 1980년에 중수했다는 내용 등을 담고 있습니다.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평면구조인 남악정(南岳亭)의 오른쪽의 방을 들여다 보면,

 

 

 

온돌방은 오랫동안 관리를 하지 않았는지,

외관에 비해 퇴락된 모습을 볼수있어 아쉬움이 남습니다.

 

 

 

이현일(李玄逸)의 연보를 통해서 이현일은 1673년에 석보면 남악실에 작은 집을 지어 이듬해 이거하였고,

1685년에 2칸의 초당을 완성하여 "남악초당(南嶽草堂)"이라는 편액과,

영양 수비(首比)에서 지낼 당시에 지은 "갈암기(葛庵記)"를 걸어두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이현일의 6대손인 수졸재(守拙齋) 이상채(李相采, 1787~1854)가 지은 남악정중수전말기(南嶽亭重修顚末記)와,

이숭일의 7대손인 좌해(左海) 이수영(李秀榮, 1809~1892)의 남악정기(南嶽亭記)에는,

1761년에 건물이 없어진 남악초당 터에 5세손인 인재(仁齋) 이광주(李光澍)가 족제인 이광실(李光實)등과 합의하여 중건을 했었는데,

건물이 퇴락하자 1821년(순조21)에 다시 주손인 이수억과 이수악(李壽岳) 등이 중심이 되어 중수를 한 전말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왼쪽의 온돌방 역시 퇴락되어 보수가 필요한 모습을 보이고,

 

 

 

남악정(南岳亭)을 세운 이현일(李玄逸, 1627~1704)의 자는 익승(翼昇)이고 호는 갈암(葛庵)이며 본관은 재령(載寧)으로,

1646년(인조23)과 1648년(인조26)에 초시에 모두 합격했지만 벼슬에 뜻이 없어서 복시를 단념 하였으며,

26세인 1652년에는 중형 이휘일(李徽逸)과 함께 "홍범연의(洪範衍義)"를 편찬 하였고,

40세인 1666년에는 송시열(宋時烈)의 기년설(朞年說)을 비판한 영남 유생들의 연명 상소에 참여 하였으며,

48세인 1674년에 당시 남인들이 정권을 잡자 허목(許穆) 등의 추천으로 누차 관직에 임명되었으나 부친상 등을 이유로 나아가지 않았고,

52세(1678년) 공조 정랑, 사헌부 지평 등에 임명되어 비로소 출사 하였으나 54세(1680년) 모친의 장례를 치르기 위해 향리에서 3년 상을 지냈으며,

이후 59세(1685년)에 남악초당(南嶽草堂)을 완성하여 그곳에서 지내자 사람들이 남악선생(南嶽先生)’이라고 불렀고,

63세인 1689년 기사환국으로 다시 남인이 득세하여 성균관사업, 사헌부장령, 공조참의에 제수 되었는데,

이때 인현왕후 폐비의 부당함을 논하고 사직서를 올렸으나 윤허되지 않았고,

성균관좨주를 거쳐 대사헌에 올라 인현왕후의 보호를 위한 상소를 올렸으나 용납되지 않자 낙향 하였다가,

64세인 1690년 이조참판, 세자시강원찬선, 대사헌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습니다.

66세인 1692년에 다시 대사헌, 병조참판, 우참찬, 이조판서 등에 임명 되었고,

68세때인 1694년 갑술환국이 일어나자 조사기(趙嗣基)를 구원하려다가 서인들의 탄핵을 받아 함경도 홍원과 종성으로 귀양을 갔으며,

3년 뒤인 71세인 1697년에 전라도 광양으로 귀양지를 옮겼으며 74세가 되는 1700년에 풀려나기까지 7년에 걸친 유배 생활을 해야 했습니다.

유배 생활이 풀린 뒤 이현일은 안동 금소(琴韶)에 정착하여 제자를 양성하며 학문에 열정을 다 하였고,

1704년 78세을 일기로 세상을 떠났으며 사후 영해의 인산서원(仁山書院)에 제향 되었고 시호는 문경(文敬)입니다.

 

 

 

정자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보면,

 

 

 

인지천으로 향하여 가는 개천이 정자 앞으로 흐르고 주남리의 작은 마을이 들어오는 산촌의 전형적이 모습으로,

남악정(南岳亭)은 풍류를 위한 정자라기 보다 자기수양과 후학들을 위한 곳이었슴을 알수 있습니다.

 

 

 

영해와 석보의 사이에 위치한 남악초당(南嶽草堂)은 당시 새로운 학문의 장이 되어 학자들의 방문이 이어져 남악골의 위상도 더욱 높아 졌다고 하는데,

이현일(李玄逸)이 남악초당에 머문 기간은 그리 길지 않아,

47세에 처음 남악골에 집을 지어 살다가 바로 부친상을 당해 안동에서 시묘살이를 하였고 이어 모친상도 당하자 계속해서 여묘살이를 해야만 했고,

장례가 끝난 뒤에 59세에 남악골로 돌아와 남악초당이라는 이름을 걸고 학문을 연마한지 5년 째에 이현일은 사업(司業)에 임명 되었는데,

사업이란 재야에 있으면서 학덕과 인품으로 이름난 산림(山林) 에게만 제수되는 자리로,

이현일(李玄逸)이 깊은 골짜기에서 자신을 숨기며 살려고 했지만 그의 학덕과 인품은 이미 조정에 까지 울려 퍼진 것이라 할수 있습니다.

 

 

 

근대에 와서 중수를 하면서 온돌방에 불을 넣은 아궁의의 모습도 변한듯 하고,

시멘트로 마감을 해두어 300년이 넘는 역사가 있는 정자의 변천을 보는듯 합니다.

 

 

 

경상북도 영양 에서의 문화재 탐방에서 찾은 곳으로,

조선 숙종 때의 문신인 갈암(葛庵) 이현일(李玄逸)의 생을 돌아볼수 있고,

검소함을 숭상하는 군자의 기상을 갖고 있었던 초당(草堂) 였지만,

선조를 기억하고 추모하는 후손들의 정성으로 초당에서 위풍이 있는 모습으로 변모한 곳으로,

경북 영양의 정자 문화재인 "남악정(南岳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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