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안동시 정상동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 문화재인 "귀래정(歸來亭)"을 찾았습니다.

 

안동 귀래정(歸來亭)은 경상북도의 문화재자료 제17호로 지정 되었으며,

 

 

 

귀래정(歸來亭)은 흙돌담으로 둘러싸여 있는데,

정자 뒤쪽과 왼편 담에는 사주문(四柱門)을 내었고,

같은 이름의 귀래정(歸來亭) 정자는 경북 영천과 경주에 있고 전북 순창 에서도 찾을수 있습니다.

 

 

 

귀래정(歸來亭) 앞에는 비각(碑閣)이 있어,

 

 

 

낙포(洛蒲) 이굉 신도비(李汯 神道碑)로,

비석(碑石)은 고인의 사적(事蹟)을 칭송하고 이를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문장을 새겨 넣은 돌을 말하며,

비석의 종류에는 신도비(神道碑)가 포함되는데,

조선시대에는 종2품 이상의 벼슬을 지낸 사람만 세울 수 있게 제도화 하였다고 하며,

조선 전기에 세웠으며 참판 황효헌이 갈문(碣文)을 지었다고 합니다.

 

 

이곳 귀래정(歸來亭)은 상시 개방을 하는곳인지 알수 없으나,

마침 정자 앞에서 후손을 만날수 있어 관람을 혼쾌히 허락해 주셨으며

사주문(四柱門)을 통하여 귀래정(歸來亭)으로 들어가 봅니다.

 

 

 

귀래정(歸來亭)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낙포(洛蒲) 이굉(李浤,1440~1516)이,

조선 중종 8년(1513) 벼슬에서 물러나 안동으로 온 후 지은 정자로,

1513년(중종 8) 벼슬에서 물러난 이굉은 경상북도 안동으로 낙향하여 부성(府城) 건너편 낙동강이 합수되는 경승지에 지은 정자로,

 

 

 

정자는 정면 2칸 측면 2칸의 "丁"자형 건물로 팔작지붕집이며,

4칸통 대청과 온돌방 3칸, 마루 1칸으로 구성되어 있어,

창호에는 창틀 가운데 세운 작은 기둥인 가운데설주가 남아 있는데,

이런 창호 형식은 18세기 이후에는 거의 나타나지 않는 고식(古式)으로 귀래정의 연륜을 찾을수 있으며, 

건물의 구조 양식은 막돌 쌓기를 한 기단 위에 방형(方形)의 초석을 놓았습니다.

 

 

 

정자의 담장 밖에는 은행 나무가 서있어,

1513년(중종 8) 귀래정을 지을 때 낙포(洛蒲) 이굉(李浤)이 심은 은행나무로,

수령 500년으로 안동시 보호수로 지정 되었다고 하며,

정자의 앞쪽의 도로 확장으로 인해 원래 위치에서 뒤쪽으로 50m 가량 물러앉게 되었고,

그로인해 다소 옛 풍치를 잃었다고 후손이 설명해 줍니다.

 

 

 

귀래정(歸來亭)은 대청 주위에만 원기둥을 사용하고 나머지에는 모두 네모기둥을 세웠고,

대청 상부에는 큰 대들보와 작은 종보를 이중으로 걸치고 종보 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판재 대공을 세워 맨 위의 종도리를 받게 하였으며,

마루 주위를 제외한 다른 곳의 기둥은 각이 있고 창문에 쐐기 기둥이 남아 있는 것이 특징이며,

 

 

 

강을 바라보는 쪽 벽면의 창은,

여닫이를 옆으로 뉘여놓아 들창으로 해둔 모습이 들어오고,

 

 

 

후손의 친절한 안내로 안으로 들어오니,

 

 

 

4칸통 대청마루는 판벽과 문으로 막아 두었고,

 

 

 

온돌방쪽의 문은 넌출문인 3짝의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필요시에는 4칸의 마루와 함께 크게 통할수 있도록,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만든 큰 문인 분합문(分閤門)을 둔듯 하고,

 

 

 

정자의 마루에는 많은 현액시(懸額詩)와 기문(記文) 편액들이 있어,

 

 

 

귀래정(歸來亭) 현판으로,

조선 중기의 명필로 초서의 대가인 고산(孤山) 황기로(黃耆老)의 글씨이며,

도연명(陶淵明)의 "귀거래사(歸去來辭)"의 뜻을 취해 당호를 귀래정(歸來亭)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귀래정(歸來亭)의 마루에는 정자를 세운 이굉(李浤)을 비롯하여,

농암(聾巖) 이현보(李賢輔), 송재(松齋) 이우(李堣), 택당(澤堂) 이식(李植), 백사(白沙) 윤훤(尹暄) 등 30여 명의 시판(詩板)이 걸려 있으며,

 

 

 

후손의 안내로 안쪽에 있는 방으로 들어가니,

 

 

 

고성이씨(固城李氏)의 안동 입향조인 참판공파(參判公派) 집안의 편지와 부채가 보관되어 있고,

 

 

 

안동팔경의 제2경인 "귀래조운(歸來朝雲)"을 알수있는 사진으로,

낙동강변에 자리하고 있는 귀래정(歸來亭)의 이건 하기 이전의 옛모습을 사진을 볼수있어,

귀래조운(歸來朝雲)은 "귀래정의 아침 구름"이란 의미 입니다.

 

 

 

한때 세간을 떠들썩 하게했던 원이 엄마의 친필 편지인 "사부곡(思夫曲)"도 걸려 있어,

1998년 경북 안동시 정상동 택지지구 개발과정에서 410년 만에 세상에 나온 이야기로,

31세의 젊은 나이에 세상과 그리고 사랑하는 아내 그리고 어린 아들과 배속의 아이와도 생이별을 하였던,

안동지방의 양반이었던 이응태(李應台,1556~1586)의 무덤에서 발견된 "원이 엄마"의 애절한 편지로,

조선 중기 젊은 부부의 애절한 사랑으로 화제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원이 아버지에게 - 병술 유월 초하룻날 집에서

자네 늘 나에게 이르기를 둘이 머리 세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하여 나를 두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나하고 자식하고 누굴 의지하며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자네 먼저 가시는고

 

자네 날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며 나는 자네 향해 마음을 어찌 가지던고

늘 자네더러 내 이르길 한테 누워서 이보소 남도 우리같이 서로 어여삐 여겨 사랑하리

남도 우리 같은가 하고 자네더러 일렀는데 어찌 그런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는고


자네 여의고 아무래도 내 살 힘없으니 쉬 자네한테 가고자 하니 날 데려가소

자네 향한 마음을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으니 아무래도 서러운 뜻이 끝이 없으니

이 내 속은 어디다가 두고 자식 데리고 자네를 그리워하여 살까 하노이다.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찬찬히 와 이르소 내 꿈에서 편지 보시고 한 말 세세히  듣고자 하여 이리 써 넣네

찬찬히 보시고 날더러 이르소 자네 내 밴 자식 나거든 보고 할 말 이르고 그리 가시면 밴 자식 태어나면 누구를 아비하라 하시느고


아무리 한들 내 속 같을까 이런 천지 아득한 일이 하늘아래 또 있을까

자네는 한갓 그리 가 계실 뿐이거니와 아무리 한들 내 속 같이 서러울까

그지그지 끝이 없어 다 못 써 대강만 적네 이 편지 세세히 보시고 내 꿈에 세세히 와 보고 세세히 이르소


나는 꿈에 자네 보리라 믿고 있노이다 몰래 와서 보여 주소

하! 그지그지 없이 이만 적노이다.

 

 

 

미투리는 한지에 싸여 남편이 젊은 나이(31세)에 병석에 눕자 아내(원이엄마)는 남편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엮어 정성껏 미투리를 삼은 것으로,

남편은 이 신을 신어 보지도 못한 체 끝내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습니다.

고성 이씨 이응태(李應台,1556~1586)의 무덤에서 발견된 애절한 편지글과 부인의 머리카락을 잘라서 짠 미투리(신발)로,

1586년 6월1일 서른한 살의 나이로 죽은 남편 이응태를 그리워하며 쓴 원이 엄마의 글은,

"조선판 사랑과 영혼" 이라 불 릴 만큼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게 하였는데,

원이 엄마의 남편 이응태(李應台, 1556~1586) 역시 고성이씨(固城李氏) 참판공파(參判公派)로 귀래정(歸來亭)을 세운 이굉(李浤)의 고손자 였습니다.

 

 

 

귀래정(歸來亭)에서 보이는 전경으로, 

낙동강 곁에 있있던 정자는 도로가 가로질러 멀어져 있습니다.

 

 

 

귀래정(歸來亭)을 세운 이굉(李浤,1440~1516)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고성(固城) 자는 심원(深源) 호는 낙포(洛浦) 귀래정(歸來亭)이며 고성이씨(固城李氏) 안동 입향조 이증(李增)의 둘째 아들로,

1464년(세조 10) 진사시에 합격하고 1480년(성종 11)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典籍)이 되었고,

그뒤 군위현감·세자시강원문학·사간원헌납·사헌부지평·공조정랑·청도군수·사재감첨정·봉상시부정 등을 지냈으며,

1500년(연산군 6)에는 사헌부집의를 거쳐 예빈시정·승문원판교·상주목사를 역임한 뒤,

1504년 갑자사화에 김굉필(金宏弼) 일당으로 몰려 관직이 삭탈되고 영해로 유배 되었는데,

갑자사화로 형 이평(李泙)은 부관참시(剖棺斬屍)를 조카 이주(李冑)는 장사(杖死)를 당하는 등 혹독한 화를 입었고,

1506년 중종반정 뒤 다시 기용되어 충청도병마절도사·경상좌도수군절도사·개성부유수 등을 지냈고,

1513년(중종 8)에 나이가 많아 사직한 뒤 고향인 안동에 내려와 귀래정(歸來亭)을 짓고 풍류생활을 하였으며 시문에 능 하였습니다.

 

 

 

조선전기의 문신인 송재(松齋) 이우(李堣,1469~1517)의 시(詩)를 가져와 봅니다.

解綬歸來早 亭開兩水分   일찍 벼슬 버리고 돌아와 / 두 강 나누어지는 곳에 정자 세웠다네

溪山知有主 鷗鷺得爲群   시내와 산은 주인 있음을 알았으니 / 갈매기와 해오라기가 무리를 지었네

熟先充釀   心閒欲和雲    차조가 익으면 먼저 술 빚고 / 마음 한가하면 구름과 어울리고 싶네

終老地     非是作徵君    노나라 은공처럼 은거하여 늙음을 마칠 이 땅 / 임금의 부름을 기다리는 것은 아니네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반영된 인문 지리지인 택리지(擇里志)에서도,

하회의 옥연정과 임청각의 군자정과 더불어 안동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자라고 기록하고 있으며,

정자를 세운 낙포(洛蒲) 이굉(李浤)의 유허를 찾을수 있고,

"조선판 사랑과 영혼원"이라고 불리는 "원이 엄마"의 사부곡(思夫曲)을 되돌아 볼수 있는곳으로,

경북 안동의 낙동강변의 정자인 "귀래정(歸來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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