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양양군 서면 황이리에 위치해 있으며,

설악산국립공원 남쪽 미천골에 자리한 신라시대의 절터인 "선림원지(禪林院址)"를 찾았습니다.

 

선림원지(禪林院址)는 강원도 기념물 제5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보물 제444호 선림원지삼층석탑(禪林院址三層石塔)과 보물 제445호인 선림원지석등(禪林院址石燈) 외,

보물 제447호로 지정된 선림원지승탑(禪林院址僧塔)과 보물 제446호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 까지 4기의 보물을 폐사지에서 만날수 있으며,

사람들의 발길이 많이 닿지 않아 원시의 자연이 아주 잘 보존된 "미천골 자연휴양림" 안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선림원지(禪林院址)로 들어 오려면 미천골 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안내를 받으시면 되고,

주차장이 별도도 마련되어 있지 않아 자연휴양림 입구에서 차량을 세워두고 천천이 15분정도 걸어 들어와도 됩니다.

 

 

 

 

선림원(禪林院)은 804년경 신라 법흥왕때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順應法師) 등이 창건 하였으며,

그 후 홍각선사(弘覺禪師)가 선림원에 살았던 때 또는 그가 열반한 직후에 대대적인 중창불사가 이루어졌던 것으로 추정되며,

10세기를 전후한 시기에 대홍수로 인한 산사태로 말미암아 폐사된 것으로 보이며,

1948년 10월에 정원(貞元) 20년(804) 명(銘)이 있는 신라 범종이 출토된 바 있어 유명한 곳으로,

1985년에 동국대박물관에서 발굴조사를 실시하여 건물지를 확인하고 각종 유물이 출토되어,

현재 절터에는 정면 3칸 측면 4칸의 금당지와 조사당지의 주초석이 보존되어 있으며,

장대한 석축 위에 있는 약3,000평의 절터에 4점의 보물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폐사지로 들어서면 가장 먼저 만나게되는보물 제444호 "선림원지삼층석탑(禪林院址三層石塔)"으로,

높이 4.1m로 이 석탑은 사리장치를 훔쳐가려고 무너뜨린 다음에 그대로 방치되어 있었은데,

그 후 한 승려가 옮겨 세우기 위해서 해체하던 중에 받침돌 밑에서 납석제(蠟石製) 소탑(小塔)과 동탁(銅鐸) 등이 출토되었다고 전하며,

탑신부(塔身部) 1층 몸돌 윗면에는 사리공(舍利孔)이 있지만 많은 소탑을 봉안할 만한 공간은 아니므로,

소탑은 처음부터 받침 부분이나 그 밑에 넣어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되며,

현재 석탑은 법당터에서 남쪽으로 6.5m 쯤 떨어진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워 복원되어 있는데,

2층 받침돌 위에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올린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으로,

 

 

 

조각 자체는 진전사지 3층석탑 기단부의 조각보다 저부조이지만,

존상들의 자세와 지물, 표현방식 등은 매우 유사하며,

이외에도 보원사지 5층석탑 기단부의 팔부중상에서 거의 동일한 조각수법을 볼 수 있어,

이 석탑은 각 부분의 조각이나 결구 수법으로 보아 9세기 경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선림원지 삼층석탑(禪林院址三層石塔)의 바닥은 여러 장의 크고 긴 돌을 결구(結構)하여 만들었고,

그 위에는 여러 장의 널돌로 짜여진 1단의 높은 굄대가 놓였고 다시 그 위에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面石)을 두었으며,

아래층 받침돌의 면석은 여러 장의 크고 긴 돌로 이루어졌는데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이 가지런하게 새겨져 있고,

아래층 받침돌의 덮개돌 역시 여러 장의 널돌로 결구하여 올렸는데 윗면에는 둥글고 네모진 2단의 굄을 새겨 윗층 받침돌의 면석을 받치고 있으며,

 

 

 

윗층 받침돌의 면석은 각 면마다 2장의 널돌로 조립하여 모두 8장으로 구성 하였고,

각 면에는 모서리 기둥과 가운데 기둥을 본떠 새긴 뒤 기둥과 기둥 사이의 면마다 팔부중상(八部衆像)을 돋을 새김한 양각으로 했는데,

 

조각솜씨는 뛰어나지만 마멸로 인하여 세부를 알아보기 어려우며,

 

윗층 받침돌의 덮개돌은 4장의 널돌로 덮었는데 아랫면에는 쇠시리인 부연(副椽)이 마련되어 있고,

 

윗면 가운데 부분에는 네모난 2단의 굄을 두어 몸돌을 받고 있습니다.

 

 

 

 

 

탑신부는 몸돌과 지붕돌이 각각 하나의 돌로 조성 되었고,

각 층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모서리 기둥이 새겨져 있어 1층 몸돌의 윗면에는 2단의 사리공(舍利孔)이 있는데,

윗단의 네모난 사리공은 한 변의 길이가 19㎝이고 깊이가 10㎝이며 아랫단의 사리공은 깊이가 5㎝ 정도이며,

 

 

 

지붕돌 아랫면은 받침이 5단이고 추녀 밑은 대체로 수평인데 네 모서리의 전각(轉角)에는 풍경을 달았던 작은 구멍이 남아 있고,

지붕돌 윗면의 낙수면은 평박(平薄)하며 처마와 처마가 맞닿은 넓직한 전각에는 반전(反轉)이 있어 경쾌한 인상을 주며,

지붕돌 윗면에는 네모난 2단의 굄이 있어서 윗층의 몸돌을 받치고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양식으로,

3층 지붕돌 윗면에는 지름 10.5㎝의 둥근 찰주공(擦柱孔)이 있고,

그 위에 복발·앙화 등의 머리장식을 받치는 노반(露盤) 1석과 함께 보륜(寶輪)·보주(寶珠)를 하나의 돌에 조성한 원뿔 모양의 돌이 놓여 있습니다.

 

 

 

 

석탑 앞에는 길고 네모난 모양의 배례석(拜禮石)이 하나 놓여 있는데,

윗면에는 아무런 조각이 없지만 옆면에는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습니다.

 

 

 

3층 석탑의 뒤편에는 금당지가 있어,

1탑 1금당의 가람구조는 백제시대 사찰에서 많이 보았던 가람 배치의 대표적인 양식으로 알려져 있으며,

 

 

 

 

법당지에는 방형의 주춧돌(폭60cm)이 3~4m간격으로 여러 개 묻혀 있어,

정면 3칸 측면 4칸 규모의 큰법당인 금당이 있었던 자리로 여겨지며,

 

 

 

선림원지(禪林院址) 안쪽의 산 아래에는 보물 제447호 선"림원지부도(禪林院址浮屠)"가 자리해 있어,

선림원지 승탑(禪林院址僧塔)으로도 불리는 부도는 높이 1.2m로 선림원터의 가장 북쪽에 자리하고 있으며,

일제강점기에 완전히 파괴되었던 것을 각 부재를 수습하여 1965년 11월에 현재의 위치에 복원하 였는데,

원래의 자리는 선림원터에서 뒤쪽 산기슭으로 약 50m 정도 올라간 곳이라고 전하며,

승탑은 바닥돌 위에 아래받침돌, 가운데받침돌, 윗받침돌을 두고, 그 위에 몸돌과 지붕돌, 상륜부 등을 차례로 올려 놓았던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은 바닥돌과 받침돌만 남아 있어 받침돌의 모습으로 보아 신라 승탑의 전형적인 양식인 8각원당형(圓堂形)을 따른 것으로 추정되며,

 

 

 

 

네모난 바닥돌은 8각의 아래받침돌 아랫단과 같은 돌로 이루어졌고 그 위에 올린 아래받침돌의 윗단은 다른 돌로 만들었고,

가운데받침돌과 윗받침돌 역시 하나의 돌로 조성 되었고 평평하게 잘 다듬은 바닥돌의 윗면에는 단면 8각의 아래받침돌 아랫단이 자리하고 있는데,

아랫단의 옆면에는 각 면마다 각각 1구의 안상(眼象)이 장식되었는데 아랫단의 높이가 낮아서 길고 가늘게 보이며,

안상 안에는 1면 걸러서 1면씩 모두 4면에 한 쌍의 사자가 돋을새김되어 있고 사자상의 모습은 모두 달라서,

래받침돌의 장식으로는 가장 변화된 모습을 보이며 아래받침돌의 윗단은 단면이 둥근데 모든 면에 연꽃 무늬가 돋을 새김되어 있어,

연꽃 무늬는 2장의 꽃잎[複葉]이 아래로 향해 있는 복련(覆蓮)으로 반전(反轉)한 연꽃의 꽃잎 끝부분을,

래받침돌 아랫단의 8각 모서리에 맞추어 배치하고서 돋을새김하였는데 연꽃잎의 크기는 넓은 편이며 연꽃 무늬 위에는 8각의 굄대를 두었는데,

고 각진굄과 높고 둥근 굄 위로 반전과 덮개돌 모양으로 이루어진 높직한 또 하나의 굄을 새겨,

마치 또 다른 굄돌을 만들어 끼운 듯한 느낌을 주고 있습니다.

 

 

 

가운데받침돌은 간주(竿柱) 모양으로 이루어진 높직한 둥근 기둥인데 겉면에는 구름 속을 날고 있는 용이 웅건(雄健)하게 장식 되었는데,

둥근 용의 머리는 거의 튀어나올 정도로 깊이 돋을새김되었고,

리부리한 눈, 큼직한 입과 코, 미끈하면서 아름다운 가는 머리카락, 윗입술에 붙어 위로 길게 올려 내민 혓바닥 등은,

치 용이 살아 움직이는 듯이 표현 되었고 몸통 전체를 싸고 있는 비늘도 사실적으로 묘사 되었고,

의 주변에 굵게 조각한 권운(卷雲) 무늬도 빈틈없이 장식되어 있어 승천하는 용의 장엄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며,

구름 속을 나는 용의 모습은 모두 3군데에 자리하고 있는데,

 쌍은 구름을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있는 모습이고 뒤쪽에 있는 용은 앞쪽의 용을 따라서 방향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며,

 

 

 

 

윗받침돌은 가운데받침돌 윗부분에 붙여서 조성하였는데 아래받침돌의 윗단처럼 단면은 둥글며,

 옆면은 2장의 꽃잎이 위로 솟아 있는 앙련(仰蓮)의 연꽃 무늬로 장식되었는데 그 모습은 아래받침돌 윗단의 연꽃 무늬와 비슷하지만,

 

꽃잎 끝부분의 반전이 각 모서리 사이에 맞추어져 다소 다르며 윗면에는 몸돌을 받치는 낮고 높직한 굄이 마련되어 있어,

 

 

 

 

 

 

윗면의 가장자리를 따라 둥글게 새긴 낮고 각진 2단의 굄이 있고,

운데부분에는 8각의 낮은 굄 위에 반전된 덮개돌 모양의 높직한 8각의 굄이 있으며,

다시 그 위에는 또 다른 낮고 각진 1단의 굄을 새겨 놓았습니다.

 

 

 

선림원지 승탑(禪林院址僧塔)은,

운데받침돌에 구름 사이에서 역동적으로 움직이고 있는 용을 처음으로 조각하여 화사한 장식 의장(意匠)으로 삼았는데,

선림원지(禪林院址)에 자리하고 있는 보물 제446호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과의 관계로 보아,

건립 시기는 886년(정강왕 1)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선림원지(禪林院址) 서편 윗쪽에는 축대가 있어,

 

 

 

축대 위에는 건물터와 선림원지석등(禪林院址石燈),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가 자리해 있어,

 

 

 

보물 제445호 선림원지석등(禪林院址石燈)이며,

통일 신라 시대의 석등으로 신라 시대의 전형적인 팔각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불을 켜는 화사석을 중심으로 받침돌과 지붕돌이 온전하게 남아 있고,

받침돌의 구성이 독특하며, 전체적인 장식이 화려하고 조각 수법이 우수하며,

 

 

 

 

선림원지석등(禪林院址石燈) 안쪽에는 건물터가 있어,

불교 종파의 조사(祖師) 또는 사찰의 창건주(創建主) 등을 기리기 위하여 건립한 사찰 당우의 하나인 조사당(祖師堂)이 있던 자리로 여겨지며,

 

 

 

선림원지석등(禪林院址石燈)은 선림원지의 서북쪽에 있으며,

1965년 이전에는 붕괴되어 사방에 흩어져 있었던 것을 그 해 11월 수습복원하여 석등의 모습을 되 찾았으며,

높이 2.92m의 이 석등은 선림원지(禪林院址)에 있는 3층 석탑 및 부도와,

1948년 10월에 발견된 "정원(貞元) 20년의 명(銘)으로 신라 애장왕 5년(804)에 만들어진 동종과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하며,

 

 

 

1948년 10월에 정원(貞元) 20년(서기804) 명(銘)이 있는 신라 범종이 출토된 바 있어,

 신라범종의 범종명문(梵鐘銘文)에 의하면, 해인사를 창건한 순응법사 등이 참여하고 있어서,

이 사찰이 종이 만들어진 804년(애장왕 5)경에 해인사 등 화엄종 계통에서 조성하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으며,

발굴시 출토된 초창기 때의 기와로 보아 적어도 9세기 초에 창건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석등은 네모난 지대석 위에 상, 중, 하 대를 모두 갖추어 만든 8각의 신라시대 기본형 석등으로,

8각의 하대옆면에는 각각 안상이 음각되고, 그 위 복련에는 귀꽃치장이 뚜렷이 새겨졌으며,

복련 윗면에 구름무늬와 1단의 높은 괴임을 새겨 내었으며,

 

 

 

 

 

간석은 중간부분에 타원형 꽃잎이 8곳에 배치된 고복형으로서 그 윗부분에는 대칭적인 연화판을 새겼고,

간석 상,하단에는 권운문이 있으며 상대석에는 겹잎 앙련이 있으며,

화사석에는 4개의 장방형 화창이 있는 외에 각면 아래쪽에 횡으로 장방형의 액을 마련했고 액안에 각각 1구씩의 안상을 새겨 넣었으며,

 

 

 

 

선림원지석등(禪林院址石燈)은 다른 고복형 부도와 비교하여 눈여겨 볼 부분은 연꽃을 조각한 하대석 윗부분에 돌출시켜 마련한 굄대이며,

이 굄대에는 팔각의 면마다 뭉실한 구름이 가득하여 마치 별도의 간주석 받침과 같은 느낌이 드는데,

화사석 굄대 역시 개선사지 석등에 별도로 마련된 화사석 받침돌 같은 모양이지만,

별개의 석재는 아니고 상대석 위에 돌출시켜 표현해 낸 것이며,

 

 

 

 

옥개석은 전각에 귀꽃이 있고 낙수면은 물매가 급하지 않으며,

8각의 합각은 사선이 뚜렷하고 그 정상부에 복련이 새겨져 있어,

상륜부에는 작은 원형의 연화대석이 있을 뿐 입니다.

 

 

 

 

지붕돌 추녀에는 아래받침돌과 동일한 귀꽃 조각이 장식되어 있슴을 볼수 있으며,

 

 

 

선림원지석등(禪林院址石燈)은 신라시대의 전형적인 8각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지붕돌 추녀에는 아래받침돌과 동일한 귀꽃 조각이 장식되어 있고,

고복형 석등치고는 높이도 2.92m로 좀 작은 편인 데다 전체적으로 홀쭉해 보이는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석등 안쪽에는 보물 제446호인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가 자리해 있어,

귀부(龜趺) 높이 73㎝, 이수 높이 53.5㎝로 비신은 전하지 않으며,

비신조각(높이 53m) 일부 1개가 경복궁 근정전 회랑에 보관되어 있으며,
이수의 장식적인 운룡문이나 용두화한 귀두 및 비좌의 안상 등이 통일신라 말기 석비 양식의 특색을 나타내고 있고,

비문은 행서체로 승 운철이 왕희지의 글씨를 집자한 것이라 하며,

비신조각(높이 53m)판독가능한 글씨는 150자 정도이며 비문 판독결과 건립연대는 정강왕 1년(886)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비편에는 "홍각선사비명 병서(弘覺禪師碑銘 幷書)"라는 제목에서 시작해 1∼15행까지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는 홍각선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한 탑비로,

통일신라 정강왕 원년(886)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탑비는 일반적으로 비받침인 거북머리의 귀부와 비몸, 비머리돌로 구성되는데 이 비는 비받침 위에 바로 비머리가 올려져 있고,

귀부(龜趺)부와 이수만 남아 있던 것을 2008년에 비신을 새로 복원하여 현재의 모습을 되찾게 되었습니다.

 

 

 

귀부의 머리는 직립한 일반형이고 귀갑문은 6각이며,

비좌에는 아래에 구름무늬가 둘러있으며 정면 중앙에 "홍각선사비명"이라는 전액을 양각 하였고,

 

 

 

 

구름무늬 위에 복련이 있고 옆면에 1구씩과 전후면에 3구씩의 안상이 음각되어 있어,

비좌 위에 올려 놓은 이수에는 앙련이 있고 전체를 운룡문으로 장식 하였습니다.

 

 

 

홍각선사(弘覺禪師)에 대하여는 잘 알려진 바가 없으나,

경사와 불경에 밝아 문도가 많았다고만 전해질 뿐이며,

홍각선사는 경주 사람으로 17세에 출가한 후 불가에 모범이 되는 높은 선사로 명망이 높았으며,

법랍 50세로 880년에 입적했는데 헌강왕이 애도하고 많은 백성이 슬퍼 하였다고 하며,

홍각선사탑비(弘覺禪師塔碑)는 886년에 왕실이 후원해 세워 졌슴을 알수 있고,

홍각선사는 도의선사와 염거화상을 이어 설악산 일대의 선종의 맥을 이은 고승이며 선림원을 대대적으로 중수하였던 승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인적이 드믄 설악산 남쪽의 미천골에 자리한 신라시대의 절터로,

순응법사(順應法師) 등이 창건 하였고 홍각선사(弘覺禪師)에 의해 중창을 이루었으나,

10세기경 산사태로 말미암아 폐사가 되어버린 비운의 사찰인 선림원(禪林院)이 있던곳으로,

4점이 보물이 남아 옛 선림원(禪林院)의 역사를 전하는 곳으로,

강원도 양양의 유적지인 "선림원지(禪林院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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