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사은리에 있는,

조선시대 건축물로 노수신(盧守愼) 적소(謫所)인 수월정(水月亭)을 찾았습니다.

 

수월정(水月亭)은 충북 괴산의 명소인 산막이 옛길 안쪽의 마을에 위치하고 있어,

 

 

 

산막이 옛길의 종점부인 마을로 들어서면,

안내문에 노수신(盧守愼) 적소(謫所)라는 표지가 있으나,

산막이 마을의 한쪽에 자리잡고 있어 마을에서 길을 물어서 들어가야 하는곳으로,

 

 

 

산막이 마을로 오는길은 산막이 옛길을 걸어서 올수도 있고,

차량으로 들어 올수도 있지만 그리 좋지 않은 산길을 5km 남짓 들어와야 하며,

산막이 마을에 들어서면 재치있는 유혹(?)의 식당 안내문도 볼수있어,

 

 

 

먼길을 왔으니 주전자와 양은 그릇을 내세워,

막걸리라도 한잔 하면서 쉬어 가라는 식당의 안내문이 재치가 있습니다.

 

 

 

노수신(盧守愼) 적소(謫所)인 "수월정(水月亭)"은,

산막이 마을 안쪽에 괴산호변을 따라 이어져 있는 길을 따르면 만날수 있으나,

산막이 옛길을 찾는 이들은 대부분 마을에서 배를 타거나 되돌아 갈뿐 마을안쪽에 있는 이곳은 찾지않아 조용한 편이며,

 

 

 

수월정(水月亭으로 오르는 계단에서는 돌과 시멘트로 만들어 세운 특이한 조형물을 볼수있고,

 

 

 

정자 앞에는 비석이 한기 서있어,

1994년에 세운 "문간공 소재 노선생 유적비(文簡公 蘇齋 盧先生 遺蹟碑)"로,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곳은 연하구곡(煙霞九曲)으로 알려진 경치 좋은 곳이다.

강의 한 가운데 섬이 있고, 그곳에 초옥(草屋)이 하나 있었다.

초옥의 이름은 수월정(水月亭)이며, 괴산댐 건설로 수몰되어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노수신 선생의 애환이 깃든 이 수월정은 후손들이 어렵게 보존하였다.

다행히 1987년 충북 기념물 제74호가 되어 문화재로 보호받고 있다."

 

 

 

괴산 수월정(槐山 水月亭)은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74호로 지정 되었으며,

"노수신(盧守愼) 적소(謫所)"로도 불리는데 적소란 귀양지를 의미하는 말이며,

건물 정면에는 맞배지붕을 올린 1칸짜리 대문이 있고 대문을 기점으로 건물을 따라 기와를 올린 나지막한 돌담이 둘러져 있어,

 

 

 

수월정(水月亭)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노수신(盧守愼,1515∼1590)이 유배생활을 하던 곳으로,

노수신(盧守愼) 적소(謫所)는 노수신이 1565년부터 1567년 유배 생활을 마칠 때까지 거처한 곳으로,

수월정(水月亭)이라는 이름으로 보존해 본래의 적소는 그가 이름지은 연하동(煙霞洞)에 있었으나,

1957년 괴산 수력발전소의 건설로 인해 수몰위기에 처하게 되자 1957년 후손들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습니다.

 

 

 

수월정(水月亭)은 돌과 흙을 섞어 쌓은 기단(基壇) 위에,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에 홑처마 팔작지붕을 올린 물림집으로,

대청 1칸을 가운데 두고 좌우에 띠살문이 달린 1칸짜리 방이 있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으로 툇간에는 툇마루를 둔 간소한 형태이며,

 

 

 

수월정(水月亭) 앞에는,

세운지 오래되어 보이는 비석이 한기 서있어,

문간공(文簡公)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의 유허를 알려주는 표지석으로 여겨지며,

 

 

 

노수신(盧守愼)은 1545년(인종 1) 사간원정언이 되어 이기(李芑)를 파면 시켰는데,

명종이 즉위하자 윤원형(尹元衡)과 이기의 옥사인 을사사화(乙巳士禍)가 일어나 그들에게 파면 당하고,

이듬해인 1546년에 순천에 유배 되었다가 이 해에 벽서(壁書)의 변이 일어나자 죄가 더해져서 진도(珍島)에 옮겨져 19년 동안 귀양을 살다가,

1565년(명종 20)에 괴산의 이곳으로 다시 옮겨져 1567년(선조 1)까지 2년 동안 유배 생활을 하였던 곳으로,

 

 

 

중앙의 처마 아래에는 수월정(水月亭)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가운데 마루를 두고 양쪽에 방을 들인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의 오른쪽에 있는 방으로,

 

 

 

대청 마루에서 방으로 들아가는 문은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만든 큰 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필요시 방과 마루를 하나의 공간으로 쓸수있도록 해 두었고,

 

 

 

1칸반 정도 크기의 온돌방은 안쪽인 서편에 벽장을 두었고,

 

 

 

적소(謫所)의 동쪽에 있는 왼쪽의 방도 크기와 벽장을 둔 구조는 같으며,

 

 

 

동편의 온돌방에는 벽에 사진이 걸려있어,

 

 

 

노수신(盧守愼)의 영정으로 보이는 사진으로,

노수신(盧守愼,1515∼1590)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를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 또는 이재(伊齋) 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이라 했으며 본관은 광주(光州)이며,

1531년(중종 26)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여 그의 문인이 되었고,

27세 때인 1541년(중종 36)에 당대 명유(名儒)였던 이언적(李彦迪)에게 배우고 학문적 영향을 받았으며,

1543년(중종 38)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 휴가를 얻어 독서에 전념)하며 이황과 같이 학문을 연구하다가 정권다툼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 때 관직에서 물러나,

명종 2년에 진도 귀양 19년 살다가 51살에 처가 가까운 이곳 산막이 마을로 옮긴 지 2년 만인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선조 6) 우의정, 1578년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는 영의정에 이르렀습니다.

1588년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 해 10월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다는 이유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 되었습니다.

 

 

 

온돌방의 벽장이 열려있어 들여다 보니,

 

 

 

제례때 사용하는것으로 보이는 촛대와 주전자 그리고 돗자리 등을 보관하고 있으며,

 

 

 

중앙에 있는 대청의 뒷면은 나무로 되어 있는 판문을 두었고,

 

 

 

수월정(水月亭)에는 별다른 편액은 보이지 않고,

1987년(단기 4320)에 쓴 수월정중건기(水月亭重建記)의 기문(記文) 편액만 올려져 있으며,

 

 

 

천정의 보에는 상량(上樑)의 글씨는 제대로 보이지 않고 실만 묶여져 남아 있습니다.

 

 

 

수월정(水月亭)의 마루에서 내려다 보이는 풍광으로,

괴산호의 멋진 전망이 한눈에 들어오는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연하구곡의 하나인 병풍바위가 잘 보이는곳에 자리하고 있어,

 

 

 

괴산댐 건설로 수몰되어 이곳으로 이건 하게되어,

연하구곡(煙霞九曲)의 경치 좋은 곳에 강의 한 가운데 섬이 있고 그곳에 초옥(草屋)으로 있었던 옛 수월정(水月亭)의 정취는 알수 없으나,

괴산호를 바라보는 곳에 자리하게 되어 그나마 다행으로 여겨 집니다.

 

 

 

노수신(盧守愼)의 소재집(穌齋集)에 있는 영매(詠梅:매화를 읊다)의 시(詩)를 가져와 봅니다.

坐上春風面粹然 栗溫佳氣出藍田  모임자리엔 봄바람 불고 모습은 순수하네 / 단단하고 온화한 좋은 기운 남전에서 나왔지
詩人相愛多相褻 不作姸妃卽瘦仙  시인들이 서로 사랑하여 서로 친압하길 많이 했으니 / 고운 기녀로 보질 않으면 야윈 신선으로 본다네.
色精內白有悲歌 認取江南樹獨嘉  꽃빛 아리땁고 속은 희다는 슬픈 노래 있었고 / 강남의 나무 홀로 아름다운 줄 알겠노라
自是偏從忠愛發 箇中遺了一團和  이로부터 두루 충성과 사랑으로 피어나니 / 가운데 한 덩이의 온화한 것만을 빼놓았네

侵凌霜露看黃英 殘後交承便到兄  서리와 이슬이 닥쳐 능멸하나 누런 꽃을 보니 / 국화가 진후 교차하듯 이어져 곧 매화가 피네
歲暮黃昏能幾度 只拚三逕了淵明  연말의 황혼 몇 번이나 지냈는가 / 다만 세 오솔길 쓴 이는 도연명이네.
淸香瘦影本來奇 天遣精神在此時  맑은 향기, 야윈 그림자는 본래 기이하니 / 하늘이 정신으로 하여금 이때에 있게 했구나
得雪有詩增勝槪 覺將期待着人爲  눈 속의 매화시는 명승지를 더하여주니 /  장차 사람들이 보게 하려 했다는 것을 깨달았네

苦節寒心是自家 天機動處有英華  고달픈 절개 서늘한 마음이 곧 매화 자체니 / 천기가 움직이는 곳에 화려한 꽃 있지
莫嫌籬外紛紛過 未必看花便識花  울타리 밖의 바쁘디 바쁜 나그네들을 의심치 마라 / 반드시 매화를 본다고해서 꽃을 아는 건 아니니
深衣整肅欲無言 玉色平和稍可親  유학자의 의복을 입고 정자세로 정숙하게 말이 없고자 하네 / 옥빛 평화로우니 점점 친해질 만해
階下雪中終日立 里閭爭指喪魂人  계단 아래 눈 속에 종일토록 서서 있으니 / 마을사람들 다투어 넋 나간 존재라 지적하네

尊前高詠發天眞 方與梅花一樣春  술잔 앞에서 높이 읊으며 천진난만함을 발하니 / 곧 매화와 함께 한 모양의 봄이로세
更好醉中看不細 風飄一點轉愁人  다시 취중에 보는 기쁨이 작지 않아 좋지만 / 바람 한 점에 바뀌어 사람을 근심하게 한다네.
花正開時春正宜 千紅萬紫摠低眉  꽃이 바로 핀 때는 봄이 바로 마땅한 때라 / 모두 붉고 모두 빨간 꽃들이 모두 고개를 숙이네
懸知他日繁華地 故遣嬌鸎詆玉姿  아마도 다른 날 꽃들이 활짝 폈을 때 / 짐짓 교태로운 앵무새로 하여금 시든 매화의 자태 모욕주게 하겠지

雪膚何所着纖埃 便近衙蜂不拒來  눈 같은 살결 어디에 작은 티끌 붙었나 / 곧 관아의 벌집이 가까우니 벌이 오는 걸 막질 못하네
莫把素心傾底蘊 恐因漏洩蝶聞猜  본래의 마음을 잡고 내막을 한쪽으로 기울이진 마라 / 새어나가 나비가 향내 맡고 시기할까 두렵네
知心只許竹和松 吐露何嫌雪月中  마음을 아는 건 단지 대나무와 소나무만 허여하니 / 꽃피우는 것을 눈에 비치는 달 속에 무엇을 꺼리랴
還有苦吟多病客 一生懷抱偶然同  도리어 괴롭게 읊조리는 많은 병든 나그네 있으니 / 일생의 회포 우연히 같구나
 
耿耿巡簷對舊知 百年開破我心期  근심스러워 처마를 돌다 옛 지인 대하여 / 100년 동안의 내 마음이 기대 열어 다하였지
本來不擬花能答 不語花前更語誰  본래 매화가 대답하리라 의심조차 안 했으니 / 꽃 앞에서 말하지 않고 다시 누구와 말하랴
疎影橫斜水淸淺 暗香浮動月黃昏  성긴 그림자 얕은 맑은 물에 비끼어 / 은은한 향기가 황혼 달빛에 움직이지 않네
邇來詩思人間盡 空向西湖怨少恩  근래의 인간세상의 시인의 생각이 다하여 / 부질없이 서호를 향해 은혜의 적음을 원망하네

 

 

 

노수신(盧守愼)은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으로 인해 사림의 중망을 받았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고 하며,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하여 왕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는데,

양명학(陽明學)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자들의 공격을 받기도 하였던 인물로,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으며,

저서로는 주자의 인심도심설에 이설을 제기한 "인심도심변(人心道心辨)"과 "시강록(侍講錄)", "소재문집(蘇齋文集)" 13권 등이 있고,

그 외에 많은 저서가 있었으나 대부분 전란으로 소실 되었다고 하며,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과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 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고,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치게 되었습니다.

 

 

 

노수신(盧守愼) 적소(謫所)인 수월정(水月亭)의 뒤편을 살펴 보는것으로,

수월정(水月亭)의 답사를 마무리 합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인 노수신(盧守愼)의 유배지로,

괴산의 명소인 산막이 옛길의 마을 안쪽에 자리하여,

이건을 하여 옛 정취는 찾을수 없으나 괴산호와 연하구곡(煙霞九曲)의 하나인 병풍바위가 보이는곳에 자리하여,

노수신(盧守愼)의 유허를 살펴볼수 있는곳으로,

충북 괴산의 노수신(盧守愼)의 적소(謫所)인 "수월정(水月亭)" 입니다.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