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속초시 노학동에 있는,

속초시립박물관 옆에 있는 "발해역사관"을 찾았습니다.

 

발해역사관은 우리나라에서 유일하게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던 "발해"를 재조명하는 곳으로,

2009년에 연면적 720 m2의 2층 규모로 개관 하였으며,

 

 

 

발해 역사관은 통합 발권으로,

발해역사관과 더불어 "속초 시립박물관"과 "실향민 문화촌"을 모두 관람할수 있으며,

주차장도 한꺼번에 해결할수 있습니다.

 

 

 

매표소에서 발권을 하고 안으로 들어서면 갈림길이 나와,

왼쪽의 길을 잡으면 발해역사관으로 이르게 되며,

 

 

 

갈림길에는 성황당(城隍堂)으로도 불리는 "서낭당"을 표현해 두었는데, 

원추형으로 쌓아 놓은 돌무더기와 신목(神木)으로 신성시되는 나무 또는 장승이 세워져 있어,

옛날 이곳을 지날 때는 그 위에 돌 세개를 얹고 세번 절을 한 다음 침을 세 번 뱉으면 재수가 좋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갈림길에서 얕은 오르막을 오르면 갈림길이 다시 나오고,

이정표가 발해역사관의 위치를 알려 줍니다.

 

 

 

길을 따르면 가까운곳에 발해역사관의 건물이 들어오고,

 

 

 

박물관 앞에는 작은 연못의 화단과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육각정자가 있으며,

 

 

 

발해역사관은 지하 1층과 지상 1층의 2층 규모로 전시실과 야외 조경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발해 문화를 진흥하고 발해의 역사를 통해 민족의 자긍심과 자존심을 드높이기 위해 마련 되었다고 하며,

 

 

 

1층의 전시실은 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실로 되어 있어,

 

 

 

발해의 "용머리 돌"이 전시되어 있어, 

용머리 장식은 건물의 기단부를 이루는 석축 사이에 끼워 석축을 튼튼하게 하기 위해 돌로 제작 하였는데,

벽면에 튼튼하게 끼워질 수 있도록 뒷부분은 쐐기모양으로 길게 깎아내고 고정하는 홈을 만들었던 것으로 추정하며,

용의 커다란 눈은 반구형으로 튀어나와 있고 코는 하늘을 향해 들려 콧구멍이 정면을 향하게 조각 하였고,

입은 귀밑까지 크게 표현하였으며 날카로운 이빨은 꾹 다물고 있으며,

정수리의 양 옆으로 작은 귀를 조각하고 귀와 눈 주변으로 갈퀴를 섬세하게 표현 하였습니다.

 

 

 

발해의 주요 도시였던 5경 중 하나인 "상경 용천부(上京龍泉府)"의 모습을 재현해 두어,

상경 용천부는 상경성(上京城) 또는 홀한성(忽汗城) 이라고도 했으며 문왕이 756년 중경에서 상경으로 천도하여 수도로 삼은 곳으로,

785년에서 794년 동안 동경 용원부로 잠시 수도가 옮겨졌다가 성왕이 다시 이 곳으로 수도를 옮겼으며,

상경 용천부에 대한 위치는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현재 중화인민공화국 헤이룽장 성 닝안 시 보하이진에 있는 유적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발해의 수도였던 상경성(上京城)의 유적들을 분포도와 함께 사진으로 볼수 있으며,

 

 

 

중국 길림성지역인 "팔련성"과 "서고성"에서 출토된,

글씨가 있는 발해의 "문자 와편"이 진열되어 있고,

 

 

 

발해 불상의 전형을 이루는 상경성 출토의 "전불좌상"으로,

크기가 10cm 내외로 아주 작은 것으로서 틀빼기를 해 구워 만들었으며,

형식면에서는 관음보살입상(觀音菩薩立像), 선정인여래좌상(禪定印如來坐像), 미타정인여래좌상(彌陀定印如來坐像), 2불병좌상(二佛竝坐像),

3존불(三尊佛), 5존불(五尊佛) 등이 있는데,

이들은 크게 두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 특색을 보이고 있어,

상경성(上京城) 지역에는 관음상(觀音像)이 동경 지역에서는 2불병좌상이 주류를 이룬다고 합니다.

 

 

 

중국 길림성의 파련성 출토의 발해의 수막새는 고구려의 연화무늬 수막새와 관련이 깊다고 하며,

 

 

 

연꽃무늬 수막새 꽃잎의 수는 4개에서 7개 까지인데 6개인 것이 가장 많이 출토 되었으며,

꽃잎은 하트모양의 외곽선 안에 2개의 꽃잎(複瓣)을 도드라지게 표현 하였고,

꽃잎과 꽃잎 사이에는 일자모양의 작은 돋을 선을 배치 하였는데,

이러한 꽃잎의 모양과 배치는 고구려 연화무늬 수막새에서 많이 보이고 있으며, 

가운데 씨방(子房)의 연꽃밥(蓮子)은 원 안에 배치하거나 그 바깥에 배치 하였는데,

발해에서는 막새에 푸른색의 녹유(綠釉)를 칠하여 화려함을 더 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출토된 발해의 허리띠 장식으로,

허리띠 장식은 발해의 금속 공예품 가운데 가장 특징적인 것으로,

발해인들의 옷은 포(袍)라고도 불리는 단령(團領)을 입었는데 깃을 둥글게 만든 원피스 형태를 한 것이었다고 하며,

여기에 착용한 허리띠 대부분은 가죽제였으나 붙여지는 허리띠 꾸미개의 가운데에는 많은 구멍이 뚫려져 있다는 점이 발해 허리띠의 특색이며,

이 구멍들은 여러 가지 물건을 매다는 데 이용 되었습니다.

 

 

 

러시아 연해주에서 출토된 발해의 항아리로 러시아 극립극동대학교 박물관 소장품(복제)이며,

2007년 러시아 서아무르 지역 트로이츠코예 고분군에서 발해의 토기 100여 점이 출토되어,

발해인들이 러시아 아무르 강(헤이룽 강)까지 개척한 사실을 보여 주고 있어,

발해의 최대 영토 확장기인 선왕(재위 818∼830년) 때 헤이룽 강 북부까지 진출했다는 일부 학계의 추정과 부합하고 있는 토기이며,

 

 

 

역시 러시아 연해주에서 출토된 "시루"의 모습으로,

러시아 극립극동대학교 박물관의 소장품으로 복제품 입니다.

 

 

 

드라마 "대조영"을 소개하는 공간도 마련되어 있어,

드라마 대조영(大祚榮)은 KBS가 2006년 9월 16일부터 2007년 12월 23일까지 방영 하였던, 

고구려와 발해사의 일부를 담은 대하드라마이며 134부작으로 방영 되었는데,

높은 시청률과 함께 대한민국의 소중한 역사의 한 부분인 발해의 건국을 알수있게 해주었습니다.

 

 

 

한쪽에는 발해 체험실의 공간도 별도로 있어서,

 

 

 

발해 체험실에서는 발해인의 의복을 입어보고 포토존과 함께 추억의 사진도 찍어볼 수도 있으며,

각종 발해문양을 스탬프로 찍어 볼수있게 해 두었습니다.

 

 

 

1층의 전시실을 나오면,

지하층에 발해 고분 전시실이 있슴을 알려주는 내관 복장의 안내문이 특이하며,

 

 

 

계단을 통하여 발해 고분 전시실로 내려 갑니다.

 

 

 

해동성국(海東盛國)으로 불렸던 "발해"는 "진국(振國)"으로도 불렸으며,

668년 고구려 멸망 후 698년 고구려의 유민인 대조영(大祚榮, ?~719)이 고구려 유민과 말갈족을 규합하여 동만주지역인 동모산에 나라를 세웠는데,

당은 705년에 발해를 인정했고 713년에는 공식적인 외교관계를 맺었으며,

발해가 영토확장사업을 벌이자 신라는 721년 강릉 이북에 장성을 쌓아 대비 하기도 하였으며, 

서기 732년에서 733년에는 발해와 당·신라의 긴장관계가 계속 되었으나 문황의 평화외교로 해소 되었고,

문황은 대내적으로는 체제정비에 힘쓰고 대외적으로는 평화적 교역의 증대에 관심을 기울여 사회적·문화적 발전을 도모 하였고,

818년 선왕은 말갈세력, 흑수말갈에 대한 통제력도 장악 했으며 소고구려를 영역에 포함 시키면서 대국으로 성장했으나,

선왕 이후 점차 쇠퇴를 보이다가 9세기 후반부터 성장한 거란은 925년 발해를 공격해 발해를 멸망 시켰습니다.

 

 

 

고분 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상경성 출토의 "주춧돌 장식(柱礎裝飾)"으로,

높이 12.0cm, 일본동경대 소장품이며 발해에서 독특하게 발견되는 것으로 표면에 녹색 유약을 발랐는데,

나무기둥과 주축돌이 만나는 부분에 씌워 기둥을 장식하는 한편 기둥 밑이 썩는것을 방지하였던 기둥장식(柱座)으로,

발해인들은 성을 쌓고 그 안팎에 집을 짓고 살았는데 발해의 번성했던 수도인 상경성은 당나라 장안성을 본떠서 만들었다고 하며,

건물들은 모두 기와지붕이며 지붕에는 유약을 발라 화려하게 만든 기와를 사용 하였으며,.

이 중 외성은 전체 둘레가 약 17km에 해당하여 서울 도성과 맞먹는 규모이며 당시에는 당나라 장안성 다음으로 큰 제 2의 도시 였습니다.

 

 

 

발해의 "짐승얼굴기와(怪獸面瓦)"은 상경성 출토의 8~9세기경의 유물로  일본동경대 소장품이며,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 부리부리한 눈, 크게 벌린 입에 날카롭게 튀어나온 송곳니와 길게 내민 혀,

벌름거리는 코 등 사납고 험상궂은 짐승 얼굴을 형상화 하였는데,

여기에 짙푸른 녹색 유약까지 입혀져 더욱 기괴한 인상을 주고 있습니다.

 

 

 

발해 제3대 문왕 대흠무(大欽茂)의 넷째딸 정효공주의 고분을 모형으로 전시해 두어,

발해무덤의 묘상건축을 살펴 볼수 있는데,

애처로운 딸을 앞서 보낸 아버지 문왕이 가련한 딸을 기리기 위해 세운 탑으로 알려져 있으며,

 

 

 

정효공주(貞孝公主)는 제3대 문왕(文王)의 넷째 딸로서,

757년에 태어나 792년 6월에 36세를 일기로 사망 하였으며,

이 무덤은 1980년과 1981년 두 차례 발굴 되었는데,

무덤 방향은 남북향이고, 남북 길이 약 15m, 동서 너비 약 7m이며,

벽돌과 판석으로 쌓았으며, 묘도(墓道)·묘문(墓門)·널길〔羨道〕·널방〔墓室〕·탑〔塔〕의 다섯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석가와 다보 두 여래상이 나란히 앉은 모습을 표현한 "이불병좌상(二佛竝坐像)"으로,

광배에는 연꽃을 통하여 다시 태어나는 동자상(童子像) 5구를 돋을새김 하였는데,

연화화생상(蓮花化生像)은 이 세상에서 좋은 일을 하면 극락간다는 아미타신앙이 반영된 것이며, 

중국 지린성 혼춘시의 팔련성(八連城) 제2사지에서 출토 되었습니다.

 

 

 

834년에 조성된 글씨가 있는 불비상으로,

아미타불을 중심으로 양옆에 승상僧像 1구씩이 있으며,

다시 그 옆에 관음과 대세지보살이 새겨져 있고,

위에는 용으로 보이는 동물 2마리가 아래에는 글씨와 인왕상이 각각 새겨져 있으며,

글씨는 함화 4년(咸和四年,834) 발해 허왕부의 관리였던 조문휴의 어머니가 모든 불제자들을 위해 만들었다는 내용으로,

이를 통해 발해에서 "함화(咸和)"라는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허왕이 관할하던 관청이 있었고,

허왕 위에 제후국을 거느린 발해의 황제가 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발해 제3대 문왕대흠무(大欽茂)의 넷째 딸 정효공주(757∼792)의 묘비로,

중국 길림성(吉林省) 연변(延邊) 조선족자치주(朝鮮族自治州) 화룡현(和龍縣) 용수공사(龍水公社) 용해대대(龍海大隊) 용두산에 있는,

정효공주의 무덤에서 출토 되었으며,

묘비는 화강암으로 된 규형(圭形)으로, 높이 105㎝, 너비 58㎝, 두께 26㎝ 정도이며,

제(題)·서(序)·명(銘)으로 구성된 18행 728자가 기록되어 있고 글자는 해서(楷書) 정자로 음각되어 있어,

비문의 내용을 정리하면 "정효공주는 대흥보력효감성법대왕(大興寶曆孝感聖法大王)의 제4녀이다.

출가한 뒤 남편이 죽고, 수절하던 정효공주도 대흥 56년(792) 6월 19일 임진에 죽었다. 이 때 나이 36세로 슬하에는 딸을 하나 두었다.

시호를 정효공주라고 하였다. 그 해 11월 28일 기묘에 염곡(染谷)의 서원(西原)에 배장(陪葬)하였다."로 요약 됩니다.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무덤은 벽돌돌방무덤으로 벽돌을 쌓은 당나라 양식과 돌로 공간을 줄여나가면서 천장을 쌓는 고구려 양식이 결합되어 있으며,

모실의 실제크기는 3.1m, 너비 2.1m, 높이 1.9m 이고 묘지문을 통하여 유교 경전등 중국의 문학 작품들이 인용된 점으로 보아,

문왕시대에 유학의 수준이 높았음도 엿볼수 있습니다.

 

 

 

길림성(吉林省) 연변(延邊)에 있는 정효공주(貞孝公主)의 묘실의 모습을 사진으로 볼수 있으며,

 

 

 

정효공주 무덤의 벽화를 재현해 두어,

발해 제3대 문왕대흠무(大欽茂)의 넷째 딸 정효공주 무덤의 벽화는 묘실의 동,서,북 세벽과 연도 안에 모두 12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으며,

무덤의 벽화는 벽돌위에 회칠을 하고 그렸다는 점은 중국 당나라 고분벽화의 영향을 받았으며 벽화를 통해 발해인의 외모와 생활상을 엿볼수 있고,

 

 

 

정효공주 묘실의 시위도에 나온 인물을 밀랍인형으로도 재현 해두어,

문지기, 역사, 시녀, 종, 군사, 악사 등을 통해서 무덤의 주인을 지키고 호위하며 시중하는 인물을 묘사한 그림를 "시위도"라고 합니다.

 

 

 

발해 고분 전시실의 한쪽에는,

정효공주의 무덤과 관련한 자료들을 사진과 설명문, 영상을 통해서 자세히 알수 있도록 해 두었습니다.

 

 

 

발해는 건국 초기에는 고구려의 문화를 이어받았고 당나라의 문화를 적극적으로 수용 하였으며,

또한 발해의  영토 일부에서 오랫동안 거주해왔던 말갈인의 문화와 신라나 일본과의 문화적 교류관계를 유지하였는데,

발해인은 각국의 다양한 문화를 적절히 융합시켜 발해 고유의 문화를 탄생 시킨 우리의 고대국가 이지만, 

발해(698~926)의 건국 세력을 중국과 러시아는 말갈계 국가로, 남·북한과 일본은 고구려계 국가로 보고 있는 현실에서,

먼곳에 있는 발해에 대해서 좀더 가까이 알수있고,

자료와 설명을 통하여 발해를 이해 하는데 도움을 주고 있는곳으로,

강원도 속초로의 여행에서 찾은 "발해 역사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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