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용암동 대머리공원에 있는,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정자인 무농정(務農亭)을 찾았습니다.

 

무농정지(務農亭址)라도 알려진 무농정(務農亭)은,

"대머리 공원" 이라는 특이한 이름의 소공원에서 만날수 있으며,

 

 

 

공원 입구에는 "무농정(務農亭)"이 있슴을 알리는 표지가있고,

대머리 공원은 공원 임에도 불구하고 별도의 주차장이 없어 주차는 불편한 편이며,

 

 

 

대머리 공원에는 철쭉이 모양을 이루며 피어나게 관리하고 있어,

 

 

 

철쭉은 진달래목 진달래과 진달래속의 낙엽관목으로,

우리나라 전역의 산야에 무리 지어 자라고 있는데 관상용으로 많이 심기도하여 4월중순부터 5월에 볼수있는 꽃이기도 합니다.

 

 

 

무농정(務農亭)의 표지에서 계단을따라 조금 오르면,

계단 끝에는 토석담장을 두른 사주문이 보이고,

 

 

 

청주 무농정(淸州 務農亭)은 충청북도 지방기념물 제85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사주문을 들어서면 무농정(務農亭)이 자리하고 있어,

최초의 무농정은 고려의 개국공신이며 청주를 본관으로 하는 가장 대표적인 씨족으로,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인 한란(韓蘭)이  출세하기 전에 산림에 은거하면서 농사에 대한 교육과 농사일을 독려하기 위해,

속칭 "큰대머리" 마을 언덕 위에 들을 향하여 정자를 건립 하였는데,

그후 폐허가 되자 1688년(숙종 14) 후손 한익저(韓益著)가 그 터 옆에 유허비를 세웠고,

1949년 후손들이 정자가 있던 옛터에 시멘트로 중건 하였다가 한국 전쟁 때 불탔으며,

1988년 목조와가로 재건축한 것이 현재의 무농정(務農亭)으로 남아 있어,

 

 

 

1988년 목조로 개건한 무농정(務農亭)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목조기와 건물로 내부는 방을 들이지 않은 누각형의 정자로 우물마루에 난간을 돌렸습니다.

 

 

 

정자앞 한쪽에는 "무농정유허비(務農亭遺墟碑)"가 있어,

1688년(숙종 14) 한익저(韓益著)가 비문을 기록 하였으며 무농정(務農亭)의 유래를 기록하고 있으며,

 

 

 


무농정(務農亭)은 청주 남쪽의 넓은 들판을 한눈에 내려다 볼수 있는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낮은 구릉 위에 정자를 짓고 농사에 힘쓰도록 권장 하였던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정자의 남쪽 정면의 처마 아래에는 "무농정(務農亭)"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무농정(務農亭)은 방은 들이지 않고 6칸 모두 우물마루만 두어 더욱 너르게 보이며,

 

 

 

무농정(務農亭)이 기리는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인 한란(韓蘭)은 고려건국의 공신으로,

본관은 청주(淸州)이며 충청북도 영동군 황간면 난곡리에서 한지원의 셋째 아들로 태어나,

일찍이 그곳에서 향학(鄕學)을 일으켰다고 하며 그가 교육을 실시했다고 하는 강당터가 전해오고 있으며,

40세 무렵에 상당구 방서동(方西洞)으로 이거하여 주거지로 삼으면서부터 그의 후손들을 청주한씨로 부르게 되었다고 하며,

이곳에서 한란이 정방형의 우물을 파서 식수와 용수로 사용했던 우물을 방정(方井)이라 하는데,

이 우물은 방정리(方井里)·방서동(方西洞) 지명의 유래가 되었고,

한란(韓蘭)은 마을 언덕에 무농정(務農亭)을 짓고 인근의 넓은 농토를 개척하여 부호(富豪)가 되었다고 전하며,

 

 

 

서기 928년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이 후백제의 견훤(甄萱)을 정벌하기 위하여 청주를 지날 때,

한란은 왕건을 군례(軍禮)로 맞이하고 창고의 곡식을 풀어 하루 동안 왕건의 10만 군대를 배불리 먹였으며,

왕건과 함께 종군(從軍)하며 장검을 들고 함께 출정하여 삼한 통합에 공을세워 개국벽상공신(開國壁上功臣)이 되어,

벼슬은 삼중대광 태위(三重大匡 太尉)에 올랐으며,

청주 방정리에 세거 하였으므로 후손들은 청주를 본관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 왔습니다.

시호는 위양(威襄)이며 한란(韓蘭)의 묘소 아래에 있는 세일제(歲一齋)에서 매년 10월 1일에 제향 한다고 합니다.

 

 

 

정자의 안쪽에도 또하나의 무농정(務農亭) 현판을 볼수있고,

 

 

 

務農亭)의 마루에는 명단이 쓰여진 여러개의 긴 편액들이 있어,

무농정(務農亭) 중건때 도움을 준 관련자의 명단과 청주한씨(淸州韓氏)와 관련한 기록으로 보이는 편액들이며,

 

 

 

서울대학교 교수이며 문학박사(文學博士) 후손(後孫) 상갑(相甲)의 현액시(懸額詩)로 보이는 편액이 있고,

 

 

 

32세손 후손(後孫)의 시문(詩文) 편액이 있으며,

 

 

 

기문(記文)으로 보이는 편액도 올려져 있어,

목조로 중건(重建)한지 오래지 않아서 인지 시문(詩文)의 편액을 많지 않습니다.

 

 

 

무농정(務農亭)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봅니다.

 

 

 

고려의 개국공신으로 청주한씨의 시조인 한란(韓蘭)이,

농사를 권장하기 위해 세웠을 당시에는 남쪽의 너른들이 한눈에 들어왔다고 하는데,

이제는 나무에 둘러싸여 있고 현대화의 영향으로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 옛 정취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시조는 한란(韓蘭)으로,

기자(箕子)의 후예로 상당(上黨) 한씨(韓氏)를 습성(襲姓) 하였다는 우량(友諒)의 32세손으로 전하며,

청주한씨는 특히 고려와 조선 전반기에 크게 세력을 떨쳤으며 왕실을 배경으로 한 권력의 중심에서,

크고 작은 정치적 사건에 한씨의 입김이 닿지 않는 예가 드물 정도 였다도 하며,

이러한 가문을 더욱 빛나게 한 대표적인 인물을 살펴보면,

난(蘭)의 7세손 강(康)이 고려 고종때 감찰어사를 시작으로 벼슬길에 올라 여러 관직을 역임했고,

충렬왕때 성절사로 원나라에 다녀와 "고금록(古今錄)"을 저술했으며 첨의중찬으로 치사(致仕) 하였으며,

조선조에 와서도 13세(世) 양절공 한확(襄節公 韓確,1400 ~1456 ), 14세(世) 충성공 한명회(忠成公 韓明澮,1415~1487)와,

16세(世) 장성공 한효원(章成公 韓效元,1468)~1534)을 비롯한 많은 인물들이 배출되었다고 합니다.

 

 

 

청주한씨(淸州韓氏)의 세거지로 그들의 시조인 한란(韓蘭)을 기리는 정자이며,

농사일을 독려하기 위해 지었으며 농토를 개척하여 부호(富豪)가 된후,

고려 태조(太祖) 왕건(王建)을 도와 개국공신에 오르게 되었던 청주한씨(淸州韓氏)으 유래를 살펴볼수 있는곳으로,

충청북도 청주의 정자 문화재인 "무농정(務農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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