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주로의 여행에서,

낮의 풍경보다 야경이 아름다운 "월정교지(月精橋地)"를 찾았습니다.


사적 제457호로 지정된 월정교는,

현재 국립경주박물관의 서편과 교촌 한옥마을 남편의 강바닥에 그 터가 남아 있으며,

기록에 의하면 『삼국사기』경덕왕 19년(760)조에,

"궁의 남쪽 문천(蚊川)에 '월정과 춘양'이라는 두 다리를 놓았다." 라고 전하며,

월정교는 남·북편의 교대와 4개소의 주형 교각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월정교의 길이는 약 60.57m로 추정되며,

교각 사이에서 불에 탄 목재편과 기와편이 수습된 것으로 보아,

교각 상면에 누각(樓閣) 건물 형태로 된 누교(樓橋)였을 것이라 추측하고 있어,

월정교지는 발굴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다리 모습과 구조에 대한 고증연구를 거쳐,

2008년부터 2018년 까지 교각 및 누교와 다리 양쪽에 문루(門樓)를 갖춘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 되었습니다.

 

월정교는 우리나라의 고대 교량의 축조방법과 토목기술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신라왕경 서쪽 지역의 주된 교통로로 사용되었을 것으로 보여,

신라왕경의 규모와 성격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는곳으로,

 

신라의 "원효대사는 월정교를 건너 요석궁에 들어갔다"고 전하는 월정교(月精橋)는

이때에 원효대사는 "누가 자루 빠진 도끼를 주리요?

내가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만들겠노라(誰許沒柯斧 我斫支天柱)"고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고 하는데,

태종무열왕은 그 노래의 의미를 파악하고는 요석공주에게 원효대사를 보내도록 합니다.


원효대사가 경주 남산으로부터 내려와 월정교(혹은 문천교蚊川橋)를 지나다가,

자신을 찾고 있는 신하를 보고는 다리에서 떨어져 옷을 입은 채로 물에 빠지니,

신하는 월정교 바로 옆의 요석궁으로 원효대사를 인도하여 옷을 말리게 하였으므로 자연스럽게 머물게 되었고,

이때 얻은 아들이 바로 설총(薛聰)이고, 이후 원효대사는 스스로를 소성거사(小性居士)라 하였습니다.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이야기가 전하는 곳이며,

신라의 왕경부로 들어가는 주요하고 화려한 다리로,

고증을거쳐 복원된 곳으로,

낮 뿐만 아니라 야경또한 아름다운 신라시대의 다리인 "월정교(月精橋)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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