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함양군 수동면 우명리 263에 위치하고 있는,

함양 승안사지(昇安寺址)를 찾았습니다.

 

승안사지(昇安寺址)는 함양읍에서 안의로가는 3번 국도 주변의,

새암산과 승안산 사이의 골짜기에 자리해 있어.

승안사(昇安寺)에 관한 사항은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과,

1799년(정조 23)에 간행된 "범우고(梵宇攷)"를 통해서 살필 수 있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찰이 존재하는 것으로 나와 있고 범우고에는 사찰이 이미 없어졌다고 기록하고 있어,

승안사는 적어도 16세기까지는 존재하다가 18세기 말 이전에 폐사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승안사지(昇安寺址)에는 묘를 수호하는 재실을 볼수 있는데,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성리학자인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 1450∼ 1504)의 묘역이 있는곳으로,

정여창은 문묘에 종사된 해동 18현 중의 한 사람이기도 합니다.

 

 

 

 

재실앞에는 1칸 규모의 자그마한 비각처럼 보이는 건물이 있어,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33호로 지정된 "승안사지석조여래좌상 (昇安寺址 石造如來坐像)"이 있습니다.

 

 

 

 

불상의 크기는 2.8m이며,

하반신이 땅에 묻힌 채 오른쪽 팔과 머리가 떨어져 있던 것을 수습해,

머리를 목 위에 얹어 놓았고 보호각을 설치 하였는데 하체 부분은 파손되어 있으며,

오른팔 등에 파손이 있고, 하체가 묻혀 있으나 상체의 상태는 비교적 좋은 편이고,

 

 

 

 

머리 부분은 신체와 비례가 맞지 않아 매우 어색한 느낌을 주는데,

선각에 가까운 띠주름식의 옷주름은 형식화 되었고,

좁은 어깨와 평판적이고 직선적인 신체의 윤곽선 등은 생동감이 없는 편으로,

당대 거구(巨軀) 불상에 나타난 조형성을 잘 보여주고 있는 고려시대의 석불좌상 입니다.

 

 

 

 

석조여래좌상의 안쪽에는,

보물 제294호로 지정된 승안사지 삼층석탑(昇安寺址 三層石塔)이 자리하고 있어,

 

 

 

 

높이 420cm의 규모로,

고려시대 석탑에서 볼수있는 다양한 양식 중,

신라의 조각양식을 충실히 계승하면서 부분적인 면에서 고려화가 뚜렷한 작품으로,

 

 

 

 

탑의 기반부는 이중으로 되어 있고,

하층기단은 지대석과 중석, 갑석을 한 돌에 새겨 모두 네 개의 돌로 구성 되었는데,

기단의 각 면에는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을 새겨 두었고,

위층 기단에는 부처, 보살, 비천(飛天) 등의 모습을 새겨 두었으며,

위층 기단의 맨 윗돌에는 연꽃조각을 새겨 둘러 놓았는데 이러한 장식은 보기 드문 모습 이기도 합니다.

 

 

 

 

탑신은 각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각각 하나의 돌로 이루고 있으며,

2층부터는 몸돌의 크기가 눈에 띄게 줄어들고 있는데,

1층의 몸돌에는 각 면마다 사천왕상(四天王像)을 조각하여 놓았는데,

 

 

 

 

지붕돌은 몸돌에 비해 넓고 밑면에 4단의 받침을 두었으며,

지붕의 경사는 급하고 처마는 수평을 이루며 네 귀퉁이가 거의 들려있지 않아,

조금 둔중해 보이기도 합니다.

 

 

 

 

이 석탑은 주변에 재실을 건립하면서 원래의 위치에서 두 번에 걸쳐 이동되었는데,

1962년 옮겨 세울 때 초층 옥신 윗면의 원형사리공에서,

원통형 사리함, 녹유사리병, 비단조각과 주머니, 유리구슬 등이 발견 되었고,

원통형 사리함 밑에 놓였던 주머니 안에서,

홍치(弘治) 7년(조선 성종 25년:1494년) 중수에 관한 내용을 적은 한지묵서중수기(韓紙墨書重修記)가 발견되어,

이 장신구는 이 때에 장치된 것으로 사료되며,

장엄구는 1494년(성종 25)에 석탑을 옮겨 세웠을 때 안치하였던 것으로 짐작하고 있습니다.

 

 

 

 

탑의 꼭대기에는 노반(露盤:머리장식받침) 위에 복발(覆鉢:엎어놓은 그릇모양의 장식)과,

앙화(仰花:솟은 연꽃모양의 장식)가 남아있어,

 

 

 

 

대체로 통일신라 석탑의 기본을 잘 따르고 있으며,

기단과 탑신의 비례가 균형을 잃어 잘 다듬은 작품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곳곳에 나타나는 특수한 양식이나 장식에 많은 힘을 기울인 흔적 등 고려 전기의 특색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 승안사지(昇安寺址)에는,

정여창(鄭汝昌, 1450~1504)과 관련된 이야기가 전하는데,

그가 모친상을 당해 승안사 경내에 묘를 쓰려고 하자 승려들이 반대 했었고,

운구 중에 홍수가 나서 오도 가도 못하게 되었는데,

정여창이 상여를 붙잡고 통곡하니 강물이 갈라지고 길이 생겼다고 하며,

이에 승려들도 하늘이 낸 효자라고 하여 묘 쓰는 것을 반대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후 정여창이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부관참시 당하면서 이 절도 함께 쇠락 했다고 전합니다.

 

 

 

 

보물급의 삼층석탑(三層石塔)과,

경상남도 유형문화재인 석조여래좌상(石造如來坐像)이 남아있는 폐사지이며,

인근에는 일두(一蠹) 정여창(鄭汝昌)의 묘역이 있어 함께 찾아볼만한 곳으로,

함양의 폐사지인 승안사지(昇安寺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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