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북 경주에서의 문화재 탐방에서,

원원사지경주에서 울산으로 나가는 교통로인 외동읍 모화리 봉서산 동쪽 기슭에 있는,

통일신라의 사찰터인 "원원사지(遠願寺址)"를 찾았습니다.

 

사적 제46호인 원원사지(遠願寺址)를 찾으면,

옛 절터위에 다시지은 작은 규모의 사찰인 원원사(遠願寺)가 지리하고 있어,

폐사지를 찾는 느낌은 덜어 주기도 하며,

 

 

 

 

경주와 울산의 경계 부근인 봉서산(鳳棲山) 기슭에 있는 원원사는,

신라 신인종(神印宗)의 개조(開祖)인 명랑(明郎)이 세운 사천왕사(四天王寺)·금광사(金光寺)와 함께,

명랑(明朗)의 후계자인 안혜(安惠), 낭융(朗融) 등과 김유신(金庾信), 김의원(金義元), 김술종(金述宗) 등,

당시 주요한 인물들이 힘을 모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세운 호국사찰로,

통일신라시대에 있어서 문두루비법(文豆婁祕法 : 神印宗)의 중심 도량(道場)이었던 유서깊은 사찰 였으며,

 

 

 

우리나라에서 보기힘든 밀교의 종파인 신인종(神印宗)의 사찰로,

신라의 궁성이 있던 서라벌의 남단에 있어,

남쪽으로부터 신라로 진입해오는 적군들을 지키는 방위 역할을 했던,

호국사찰의 기능을 담당했던 것으로 추정 하고 있습니다.

 

 

 

 

경내로 들어서면 사천왕문 대신하여,

석조 사천왕상(四天王像)의 조각이 자리하고 있어,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비파(琵琶)를 들고 동쪽에 있고,

보검(寶劒)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남쪽을 수호 하고 있으며,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은 용과 여의주(如意珠), 또는 견색(絹索; 새끼줄)으로,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을 하고 있어,

불법을 수호하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들은 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재래의 신(神)인데,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서 사방을 지키게 된 것으로 일정한 모습이 처음부터 규정된 것이 아니어서,

인도에서는 귀족의 모습으로 표현되었고,

중앙 아시아나 중국, 우리 나라로 전파되는 동안 무인상(無人像)으로 변형 되었다고 합니다.

 

 

 

 

계단을 오르면 이곳의 금당으로 보이는 천불보전이 있어,

정면 다섯칸의 큰규모의 천불보전은 한글로 현판이 올라 있고,

 

 

 

 

천불보전의 내부에는 삼존불을 모시고,

많은 부처님을 함께 모시어 천불보전이라 한듯한데,

일반적으로 금당의 삼존불은 중앙의 석가모니 부처님은 크게하고,

양옆의 협시불은 조금 작게 조성하는것이 일반적인데 이곳의 삼존불은 크기가 동일해서 특이합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의 기록에 의하면 원원사(遠願寺)는 인조 8년(1630)에 중수 되었고,

효종 7년(1656)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다고 하며,

또한 18세기 후반 불국사 중창에 원원사 스님이 참여한 기록이 있어 1700년대까지는 법등이 이어졌다고 합니다.

 

 

 

 

원원사옆에는 원원사지(遠願寺址)로 향하는 길이 나 있어,

 

 

 

 

짧은 오르막을 따라다 보면 낮은 계단이 있어 오르면,

 

 

 

 

보물 제1429호로 지정된 원원사지 동,서 삼층석탑(遠願寺址 東西 三層石塔)을 만날수 있어,

 

 

 

 

각각 700cm의 높이로 1933년에 복원한 것으로,

동서로 삼층석탑이 있고 탑 가운데 화사석이 결실된 석등이 남아 있는데,

삼층석탑은 동서탑 모두가 이중기단에 삼층의 탑신을 가진 전형적인 신라 석탑 양식이며,

크기나 표면의 부조수법이 거의 동일하여 함께 건립된 것으로 보입니다.

 

 

 

 

탑은 금당지 앞에 동서로 나란히 서 있는데,

파손 복원에 따른 외형적 차이가 존재할 뿐 쌍탑은 같은 형식으로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기단은 이중기단으로 지대석의 외곽은 장대석을 돌려 탑구(塔區)처럼 구획 지었으나,

일제강점기에 복원하면서 설치되었을 가능성이 높은데,

상층기단면석은 ‘ㄱ’자형 귀틀석을 네 모서리에 두고 ‘ㅡ’자형을 4면에 끼워 넣어 총 8매의 석재로 결구하고 있고,

각 면 중앙에 끼워 넣은 면석은 쌍탑 모두 좌우측에 탱주가 새겨져 통일성을 보이는데,

 

 

 

 

상층기단 면석에는 각 면에 3구씩 평복을 입고 손을 다소곳한 자세로 모은 십이지상을 새겼으며,

십이지상의 구성은 북면 중앙에 쥐상(子像)을 시작으로 시계방향으로 새겼고,

모두 향좌측을 바라보고 있으나 소상(丑像)만 반대방향인 향우측을 보고 있으며,

이 가운데 동탑의 동면 향좌측상 1구, 서탑 남면의 향좌우측상 각 2구가 결실 되었고,

상층기단 갑석은 크기가 비슷한 4매로 구성되었으며,

갑석하단에는 1단의 부연이, 상단에는 2단의 각형 탑신받침이 있습니다.

 

 

 

 

탑신은 3층으로 각 층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로, 총 6매로 구성되어 있고,

탑신석 중 초층탑신은 4면에 사천왕을 새겼으며,

2층과 3층은 우주 옆으로 별도의 벽선을 그어 겹우주가 표현 되었고,

사천왕상은 거의 반부조에 가까운 고부조로 각 면 모두 마멸과 훼손이 심한데,

동탑은 남방천왕이 일부 하체만 남아 있고 서탑의 남방천왕은 완전히 멸실 되었습니다.

옥개석은 양탑 모두 훼손상태가 심각한데 모두 5단의 옥개받침과 상단에는 2단의 각형 탑신받침이 있으며,

옥개석 처마 아래로는 물끊기 홈은 마련되지 않았으며 각 모서리마다 좌우로 1개씩의 풍경공이 있습니다.

 

 

 

 

초층탑신은 4면에 새겨진 사천왕상이 생동감있고 정교하며,

 

 

 

 

상륜부는 양탑 모두 노반과 앙화가 남아 있는데,

앙화의 중앙에는 원통형의 찰주공이 남아 있습니다.

 

 

 

 

탑의 상층기단과 초층탑신에 새겨진 십이지상과 사천왕상의 조합은,

현재까지 확인되는 유일의 석탑 이라는데 원원사지 삼층석탑의 부조상은,

신라 전형양식 석탑 가운데 가장 이른 시기의 부조상일 뿐만 아니라 조각수법도 뛰어나며,

상하층기단 네 모서리에 "ㄱ"자형 귀틀석을 두고 각면 1매씩의 부재를 끼워 넣는 정형화된 구조방식과,

탑신부의 돌다듬기 수법 등은 8세기 신라 석조미술의 정수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7세기 인도에서 성립된 밀교는,

우리나라에서는 일본과 달리 밀교가 활발하게 전래되지는 않았는데,

밀교는 부처의 깨우친 진리를 직설적으로 은밀하게 표출시킨 대승불교의 한 교파이며,

당시의 인도불교는 부파불교시대(소승불교시대)로서 실천보다는 전문적 이론과 승려중심의 경향이 매우 짙었다고 하며,

 

 

 

 

이러한 불교계의 흐름은 교학(敎學)의 찬란한 발전을 가져오는 장점도 있었지만,

많은 신도를 잃게 되고 교단의 위축을 스스로 가져오는 단점도 있었는데,

이러한 단점을 극복하고 실천을 위주로 한 대중불교운동이 밀교로 발전된 것으로,

밀교의 수행자는 누구나 입으로 진언(眞言)을 염송하고,

마음으로 대일여래를 생각하는 현생에서 성불하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어,

밀교에서는 독특한 방법과 순서에 따라 행법을 실시하고,

이를 통해 갖가지 세속적인 소망들을 이루어낼 수 있다고 합니다.

 

 

 

 

밀교의 종파인 신인종(神印宗)의 사찰로,

호국사찰 였으며 우리나라의 밀교를 알수있는 곳이며,

탑신에서 십이지상과 사천왕상의 조합을 볼수있는 석탑이 있는,

경주의 유적지인 "원원사지(遠願寺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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