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 답사 1번지로의 여행에서 빠트리지 않고 다녀오는 코스로,

전라남도 강진군 도암면에 있는 조선후기 다산 정약용의 유배 관련 유적지인,

다산초당(茶山草堂)이 있습니다.

 

사적 제107호로 지정된 다산초당(茶山草堂)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유적(遺蹟)을 찾으려면,

다산 박물관이 있는 만덕리를 거쳐 오르는것보다,

백련사를 거쳐서 다산초당을 찾는편이 훨씬 편합니다.

 

 

 

 

백련사는 동백나무와 함께 전통차 문화로도 널리 알려졌는데,

백련사에서 다산초동으로 가는 사찰 뒤편에는 차밭이 조성되어 있어,

정약용도 이곳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초의선사"를 통해서 다도(茶道)를 배웠다고 알려져 있으며,

 

 

 

 

이 길은 200여 년 전에 열살 차이가 나는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과,

아암(兒菴) 혜장(惠藏,1772-1811)스님의 이야기가 있는길로,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이 강진으로 유배 온지 8년쯤 되었을 때,

백련사(白蓮寺)에 새 주지로 온 아암(兒菴) 혜장(惠藏)을 신분을 감추고 찾아가서 만났다고 하며,

처음 만난 혜장은 꾸밀 줄 모르고 진솔했지만 거칠었는데 다산은 그런 혜장이 무척 마음에 들어했고,

이 때부터 다산은 혜장과의 인연은 깊어졌고 유배의 시름에 겨울 때면 백련사에 와서 차를 나누게 되었는데,

두 사람은 의기투합해서 자주 만나 학문의 대화를 이어갔습니다.

 

 

 

 

다산은 이 숲길로 백련사를 오가며 혜장선사를 만났는데,

다산과 혜장은 유학과 불교를 논하고 차와 세상 얘기도 나눴으며,

대둔사(大芚寺) 출신의 학승(學僧) 혜장선사는 다산의 지적 갈증을 풀어주는 청량제 같은 존재 였기에,

다산은 언제라도 혜장이 찾아올 것에 대비해 문을 열어 두었다고 하며,

혜장은 비 내리는 깊은 밤에, 기약도 없이 다산을 찾아오곤 했다고 합니다.

 

 

 

 

산길을 따르다 보면 능선 근처에는,

2006년에 세운 "T"자형 누각이 있어,

 

 

 

 

"해월루(海月樓)"라 명명되어 있는 2층의 누마루로 올라서 보면,

 

 

 

 

옛날에는 제주도로 향하는 배가 출항 했다고 하는,

강진만이 한눈에 바라다 보입니다.

 

 

 

 

해월루에서 내려와 낮은 내리막길을 잡아 가다보면,

 

 

 

 

산 허리에 기대어 서 있는듯한 아담한 규모의 정자인 "천일각(天一閣)"이 자리하고 있어,

 

 

 

 

천일각(天一閣)이라는 이름은,

"하늘 끝 한 모퉁이"라는 뜻의 천애일각(天涯一閣)을 줄인 말이며,

 

 

 

 

이곳은 다산이 고향이 그리울때 심회를 달래던 장소로,

강진만을 내려다 보며 흑산도에 유배간 형 정약전(丁若銓,1758~1816)을 그리며 눈물 흘렸던 곳이라 합니다.

 

 

 

 

천일각 아랫쪽에는 "동암(東菴)"이 자리하고 있어,

 

 

 

 

동암임을 알려주는 "다산동암(茶山東菴)"의 현판이며,

 

 

 

 

마루위에는 "보정산방(寶丁山房)"의 현판도 볼수 있어,

현판의 글씨는 평소 다산을 존경했던 24세 연하인 추사 김정희(金正喜)가 다산을 위해 직접 쓴 글씨라고 합니다.

 

 

 

 

동암(東菴)은 일명 송풍암(松風庵)이라고도하는데,

이는 동암 근처에 소나무들이 무성하여 솔바람이 불어오는 암자라 하여 불리게 되었다고 하며,

다산은 이곳 동암에서 주로 생활 했다고하는데,

"목민심서"와 "흠흠신서"도 여기서 탄생 했으며 제자들을 양성한 곳이기도 하며,

 

 

 

 

동암(東菴)은 저술에 필요한 2천여권의 책을 갖추고 기거하며 손님을 맞았던 장소 였습니다.

 

 

 

 

동암 아래에는 다산초당이 자리하고 있어,

옆 마당에는 우리의 선비사상인 "천원지방(天圓地方)"을 의미하는,

하나의 섬을 둔 사각의 연못을 만나게 되는데,

가운데 있는 하나의 섬은 다산사경(茶山四境)의 제4경인 "연지석가산(蓮池石假山)"으로,

1808년 봄 다산이 초당으로 이주 후부터,

탐진강가에서 돌을 주워 산처럼 봉 쌓고 주변에는 백일홍과 대나무를 심어 조성 하였다고 하며,

 

 

 

 

다산초당은 원래 해남 윤씨인 귤림처사 윤단(1744-1821)이,

초가로 건립하여 후손을 가르치던 산정(山亭)이었으나,

아들인 윤문거 세 형제가 정약용을 초빙하여 기거하게 한 곳으로,

해남 윤씨의 세거지인 강진은 다산의 외가인데,

선비화가로 "자화상"으로 유명한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1668∼1715)의 손녀가 바로 다산의 어머니입니다.

 

 

 

 

강진만이 굽어보이는 만덕산 기슭에 자리한 다산초당다산초당(茶山草堂)은,

조선시대 후기 실학을 집대성한 대학자 정약용이 11년간 유배생활을 했던 곳이며,

다산(茶山)이라는 호는 강진 귤동 뒷산 이름으로 이 기슭에 머물게 되면서 자신의 호로 써 왔으며,

 

 

 

 

다산초당(茶山艸堂)의 현판으로 추사 김정희(金正喜)의 글씨이나,

추사의 글씨를 여기저기 집자해서 만든 것이라 하며,

 

 

 

 

초당의 내부는 문이 닫혀 있어 볼수 없었으며,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인 다산이 1801년 강진에 유배되어,

18년여 동안 적거생활하는 동안"목민심서"와 "경세유표"등 600여권의 방대한 책을 저술하면서,

조선시대 성리학의 공리 공론적이며 관념론적인 학풍을,

실용적인 과학사상으로 이끌고자 하는 실사구시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으로,

옛 초당은 노후로 붕괴되었던 것을 다산유적보존회에서 1957년 복원 하였는데,

초당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짚을 덮은 본래의 초당으로 복원될 예정이라 합니다.

 

 

 

 

다산초당 주변에는 유명한 다산사경(茶山四境)을 볼수 있어,

 

 

 

 

다산사경중 제1경인 정석(丁石)으로,

다산이 병풍바위에 초당의 주인이 자신임을 나타내기 위해,

자신의 성(姓)인 "정(丁)"자만 직접 새긴 글자이며,

 

 

 

 

 

초당의 앞뜰 마당에는 다산사경(茶山四境)의 제3경으로,

석간수를 떠 와서 이 위에서 차를 끓이는 청석(靑石)인 다조(茶窕)를 볼수 있으며,

 

 

 

 

뒤편에는 다산사경(茶山四境)의 제2경인 "약천(藥泉)"이 있어,

다산은 촉촉하던 땅을 팠더니 돌 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 나왔다고 하며,

 

 

 

 

이곳에 직접 샘을 만들고는 그 물로 차를 끓였는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시원한 약수가 나왔다는 약천(藥泉)은,

물을 마시면 담을 삭이고, 묵은 병을 낫게 한다고 기록 하였습니다.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의 본관은 나주, 자는 미용, 송보, 호는 사암, 여유당이며,

본관은 나주이며 자는 미용, 송보, 호는 사암, 여유당이며,

진주목사를 지낸 정재원의 넷째 아들로 태어나,

28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예문관검열, 병조참지, 형조참의 등을 지냈으며,

그는 출중한 학식과 재능을 바탕으로 정조의 총애를 받았으나,

 

 

 

 

1801년에 신유사옥으로 경상도 장기로 유배되었다가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다시 강진으로 유배 되었고,

처음에는 강진읍 동문밖 주막과 고성사의 보은산방, 제자 이학래 집 등에서 8년을 보낸 후,

1808년 봄에 다산초당으로 거처를 옮겨 생활 하였는데,

해배되던 1818년 9월까지 10여년 동안을 다산초당에서 생활하면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저술을 하였으며,

다산의 위대한 저술 업적이 대부분 이곳에서 이루어 졌습니다.

 

 

 

 

그는 피폐한 농촌사회의 모순에 관심을 갖고 정치개혁과 사회개혁에 대한 체계적으로 연구 하였는데,

특히 <경세유표>·<목민심서>·<흠흠신서>를 통해 실현 가능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습니다.

다산은 다양한 분야에서 천재에 가까운 인물로 자연과학에도 관심을 기울여,

홍역과 천연두의 치료법에 대한 책을 내기도 하였고 도량형과 화폐의 통일을 제안했으며,

건축기술인 거중기를 고안하기도 했었던 조선 후기 유형원과 이익의 학문과 사상을 계승하여,

실학을 집대성한 실학자 입니다.

 

 

 

 

다산 유적지의 맨 아래에는 서암(西菴)이 자리하고 있어,

다산 박물관 방향에서 오르면 처음 만나게 되는 건물로,

 

 

 

 

서암(西庵)의 마루 위에는,

"차와 벗하여 밤늦도록 학문 탐구한다"는 의미의 "다성각(茶星閣)'의 현판이 있으며,

 

 

 

 

서암(西庵)은 윤종기 등 18인 제자가 기거했던 유숙처로,

지금의 기숙사의 용도로 보여지며,

정약용의 유적지는 1808년에 지어져 잡초 속에 흔적만 남아있던 것을 1975년 강진군에서 다시 세웠다고 합니다.

 

 

 

 

조선후기 대표적 실학자이면서,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실학을 집대성한 곳으로,

강진을 대표하는 유적지인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 유적(遺蹟)인,

"다산초당(茶山草堂)"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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