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 선종(禪宗)의 태두(太頭)이며,

동국 선종의 종갓집 또는 동양 3보림중 하나로 알려져 있는,

장흥의 "보림사(寶林寺)"를 찾았습니다.

 

전라남도 장흥군 유치면 봉덕리 가지산(迦智山)에 있는 보림사(寶林寺)는,

대한불교조계종 제21교구 본사인 송광사의 말사이며,

 

 

 

 

신라의 선문구산(禪門九山) 중에서 제일 먼저 개산(開山)한 가지산파(迦智山派)의 중심 사찰인 보림사(寶林寺)는,

선종이 가장 먼저 들어와 문을 연 우리나라 선종의 종갓집으로,

 

 

 

 

보림사(寶林寺)는 가지산파의 법맥을 이어받은 보조국사 체징(體澄)에 의하여 창건 되었는데,

통일신라 시대에 헌안왕의 권유로 체징은 이 산에 들어와 터를 잡았고,

860년에 대찰을 창건하여 가지산파의 중심사찰로 발전 시켰으며,

 

 

 

 

그 뒤 끊임없는 중창과 중수를 거쳐,

6·25전쟁 때 소실되기 전까지는 20여 동의 전각을 갖춘 대찰이었으나,

공비들이 소굴로 이용하였던 이 절에다 도주하기 전에 불을 놓아 대웅전 등 대부분의 건물들이 불타고,

단지 천왕문(天王門)과 사천왕(四天王)·외호문(外護門)만 남았습니다.

 

 

 

 

보림사(寶林寺)의 천왕문(天王門)에는,

보물 1254호로 지정된 "목조사천왕상(木造四天王像)"을 볼수있어,

보림사의 사천왕상의 눈은 그린것이 아니라 갈색의 유리를 만들어 붙인것이라 하며,

 

 

 

 

사천왕상(四天王)은 중종 10년인 1515년에 조성되어 이후 두 차례에 걸쳐 중수 되었는데,

현존하는 천왕문 목조 사천왕상 가운데 가장 오래되었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 임진왜란 이전에 조성한 것으로는 유일한 것 입니다.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85호로 지정되어 있는 천왕문(天王門)을 들어서면,

노거수 나무들과 함께 비교적 너른 마당의 경내가 들어오며,

 

 

 

 

안으로 들어서면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본존으로 모시는 법당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고,

앞에는 나란히 서 있는 두 개의 삼층석탑과 1개의 석등을 볼수 있어,

 

 

 

 

국보 제44호인 보림사 삼층석탑 및 석등(寶林寺 南·北三層石塔─石燈)으로,

남탑의 높이는 5.4m이고 북탑의 높이는 5.9m이며 석등의 높이는 3.12m이며,

 

 

 

 

2기의 삼층석탑은 신라의 전형적인 탑 양식으로,

옥개석 위에 연꽃을 아로새긴 보주를 얹어 석등의 전체적인 인상이 경쾌하고 화려하며,

또한 석등은 석탑과 함께 완전한 형태를 지니고 있는데,

우아하고 아름다움이 넘치는 걸작으로 알려지고 있으며,

 

 

 

 

1934년 가을에 탑을 해체 복원할 때,

초층탑신 상면 중앙의 사리공(舍利孔)에서,

사리합(舍利盒)·자기류(磁器類)·목판(木版)·비단·사리·구슬 등의 사리장엄구와 함께 탑지(塔誌)가 발견되어,

탑의 조성연대 및 중건사실이 밝혀 졌는데,

 

 

 

 

탑지에 의하면,

이 탑은 서기 870년 경문왕이 선왕인 헌안왕의 명복을 빌기 위하여 건립한 원탑(願塔)으로 기록되어 있어,

이후 891년(진성여왕5)에 사리 7매가 봉안 되었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1478년과 1535년, 1684년 등 세 차례에 걸쳐 중수 되었음이 확인 되었습니다.

 

 

 

 

탑 뒤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어,

정면 5칸 측면5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이지만,

정면의 바깥 가장자리 2칸은 좁아서 칸수는 정면과 측면이 같으나,

정면인 폭 보다는 측면인 길이가 훨씬 길게 느껴지는 건물이며,

 

 

 

 

정면의 처마아래에는 "대적광전(大寂光殿)"의 현판이 올려져 있어,

"고요와 빛으로 충만한 상적광토에서 설법한다"고 하는,

청정한 법신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전각임을 알수 있는데,

 

 

 

 

법당 안에는 국보 제117호인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좌상(寶林寺 鐵造毘盧遮那佛坐像)"이 모셔져 있어,

불상의 높이는 2.51m이며 9세기 후반의 불상 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는데,

신라 하대에 유행했던 철제 불상으로 상체에 비해 하체가 큰편이며,

왼쪽 팔 뒷면에 대중(大中) 2년이라는 글이 있어서 신라 헌안왕 2년(858년)에 조성 된 것임을 알수 있으며,

지금의 불좌상(佛坐像)은 대좌(臺座)와 광배(光背)를 잃고 불신(佛身)만 남아 있는 상태이며,

불상의 왼팔 뒷면에 신라 헌안왕 2년(858),

무주장사(지금의 광주와 장흥)의 부관이었던 "김언경(金彦卿)"이,

자신의 봉급을 모아 시주하여 불상을 만들었다는 내용의 글이 적혀 있어서 정확한 조성연대를 알 수 있는 작품이며,

 

 

 

 

 

통일신라 전성기인 8세기의 불상에 비해 긴장감과 탄력성이 줄어들었고,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가슴 앞에서 U자형으로 모아지며,

다시 두 팔에 걸쳐 무릎으로 흘러내리고 있어 옷주름은 부드러운 곡선을 이루고 있지만 탄력을 잃은 모습이며,

이런 형태의 표현은 신라 불상에서 보여주던 이상적인 조형감각이 후퇴하고,

도식화되어가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9세기 후반 불상 양식의 대표적 특징이라고 할 수 있는데,

손은 왼손의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 모습으로 비로자나불이 취하는 일반적인 손모양이며,

 

 

 

 

대적광전(大寂光殿) 철조비로자나불좌상은 엎드려 절을 한후에,

어깨를 살짝 들어 바라 보았을때 가장 아름답다고 하며,

 

 

 

 

 

대적광전(大寂光殿)의 문에 조각되어 있는 꽃문살의 정교하고도 화려함을 느껴봅니다.

 

 

 

 

대적광전 뒤편에는 삼성각(三聖閣)이 자리하고 있어,

 

 

 

 

삼성각(三聖閣) 산신(山神)·칠성(七星)·독성(獨聖)을 함께 봉안하고 있는 전각으로,

불교에서는 산신을 가람수호신과 산 속 생활의 평온을 지켜주는 외호신으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우리나라에서만 볼수있는 불교 전각으로,

전통신앙인 삼신신앙(三神信仰)과의 습합현상을 살필수 있는 곳이기도 한곳으로,

산신각은 불교 밖에서 유입된 신을 모시는 건물이기 때문에 "전"이라 하지 않고 "각"이라 합니다.

 

 

 

 

삼성각에서 나오면 석가모니를 모시고 있는 중층의 전각인 대웅보전(大雄寶殿)이 있어,

 

 

 

 

대웅보전은 외관과는 달리 내부는 2층까지 통해서 한 층으로 되어 있는데,

중앙 단상에는 금동석가여래상과 양협시불을 안치 하였고,

구조양식으로 보아 조선 초기에 중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우수한 수법의 건물로,

이후 주민들은 대적광전을 다시 지어 대웅전에 있었던 비로자나불을 모셨다고 하며,

 

 

 

 

대웅보전(大雄寶殿)은 한국 전쟁 이전에는 국보 제204호로 지정된 소중한 문화재 였으나,

6·25전쟁 때 불타버린 대웅전은 서쪽을 향하여 옛 모습대로 다시 세웠으며,

정면 5칸, 측면 4칸, 중층팔작(重層八作)지붕의 큰 건물 입니다.

 

 

 

 

대웅보전 뒤편에는 2개의 전각이 있어,

미타전(彌陀殿)과 조사전(祖師殿)이 자리하고 있는데,

 

 

 

 

미타전(彌陀殿)에는 전라남도 유형문화재 제191호로 지정된,

"장흥 전의상암지 석불입상(長興 傳義湘庵址 石佛立像)"이 있어,

이 석불입상은 장흥읍 금산리 제암산(帝岩山) 중턱에 있는 의상암지로 전해지는 절터에 있던것을,

1994년에 이곳 보림사(寶林寺) 경내로 모셔온 불상으로,

원만한 상호와 높은 육계 그리고 상체 옷무늬의 표현이나 당당한 어깨선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다고 합니다.

 

 

 

 

미타전 옆에는 "조사전(祖師殿)"이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 맞배지붕의 아담한 전각으로,

기와골 끝은 와구토로 마감하고 지붕 좌우에는 풍판을 달았으며,

정면 3칸에는 모두 띠살로 짠 분합문을 달았는데,

 

 

 

 

내부 불단에는 보조선사(普照禪師)와 도의선사(道義禪師) 그리고 염거선사(廉居禪師)의 진영을 봉안하였고,

좌측 벽에는 보우화상(普愚和尙)의 진영을 우측 벽에는 매화보살(梅花菩薩)의 진영을 모셨습니다.

 

 

 

 

대웅보전 옆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계 팔작지붕의 건물인 "명부전(冥府殿)"이 있어,

 

 

 

 

명부전(冥府殿)은 지장보살과 시왕 등을 모시는 전각으로 특이한 용마루를 형성하고 있는데,

용마루를 형성하는 착고, 부고 위에 평기와를 놓고 다시 그 위에 평기와에 구름무늬의 평기와를 얹고,

다시 숫마룻장 위에 용무늬로 용마루를 마무리하고 양 끝에는 용머리를 장식하였는데,

용마루 중앙에는 보주형 절병통을 세웠는데 용의 머리모양으로 하고 있어,

 

 

 

명부전(冥府殿)의 지붕에는 특이하게 용(龍)이 승천하는 형상이 기와에 얹어 있어,

보조선사(普照禪師, 804~880)가 절을 지으려고 나라 안 곳곳을 살피던 중에,

가지산에 와보니 좋은 절터가 있는데 큰 못이 있고 뱀, 이무기, 용이 많이 살고 있어서,

보조선사는 궁리끝에 도력으로 사람들에게 눈병을 앓게 한후,

가지산 아래 못에 흙과 숯을 가져다 넣으면 눈병이 나을 것이라는 소문을 퍼트렸고,

흙짐과 숯짐을 진 안질 환자가 줄을 잇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못은 메워 졌는데,

보조선사는 안나가려고 버티는 청룡과 백룡을 지팡이로 때려서 내쫓고 절을 지었다고 하며,

쫓겨난 두용은 서로 하늘에 오르려고 다투다가 백룡이 꼬리를 치는 바람에 산기슭이 패어 용소가 생겼고,

결국 백룡은 승천했지만 청룡은 상처를 입고 고개를 넘어가다가 죽었다고 합니다.

 

 

 

 

명부전(冥府殿)에는 염라대왕등 10왕을 모신 전각인데 주존은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모신 전각으로,

이 세상이 아닌 어두운 세계인 명부 세계(冥府世界)의 왕인 염라대왕을 모신 곳이라 하여 명부전이라 하며,

또한 염라대왕 한 분만 아니라,

지옥에 있어서 죄의 경중(輕重)을 정하는 열 분의 왕(十王)을 모신 곳이라 하여 시왕전이라고도 하며,

지장보살(地藏菩薩)은 억압받는 자, 죽어가는 자, 나쁜 꿈에 시달리는 자 등의 구원자로서,

지옥으로 떨어지는 사자의 영혼을 모두 구제할 때까지 자신의 일을 그만두지 않겠다는 서원을 세웠다고 합니다.

 

 

 

 

첩첩산중의 깊은 산골의 산중턱은 아니지만,

비교적 너른 터에 자리하고 있는 보림사(寶林寺)는 조용한 편이며,

 

 

 

 

경내의 한쪽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비석이 있고,

 

 

 

 

보물 제158호인 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비(普照禪師彰聖塔碑)가 있어,

전체 높이 3.46m로 비신의 높이는 2.64m이고 너비는 1.37m로,

귀부와 이수는 화강석, 비신은 대리석으로 되어 있으며,

 김영의 찬문에 김원, 김언경의 서자로 자경은 2.4cm이며,

 

 

 

 

조형은 신라 전성기의 것이지만 귀두는 용두화하였고 목은 직립하여 생경한 인상을 주는데,

이수도 정연하게 규격을 갖추었으나 세선각문 등에서 형식화되었음을 볼 수 있으며,

 

 

 

 

각부는 완존해 있으며,

다른 비석에 비하여 전체적으로 매우 높고 큰 당대 비석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데,

행부터 제7행의 "禪"자까지는 김원이 해서로 썼으며 그 이하는 김언경이 행서로 썼으며,

내용은 보조선사(普照禪師)에 관해서 전하고 있어,

보조의 휘는 체징, 속성은 김, 804년(애장왕 5) 웅진(충남 공주)에서 출생 하였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보조선사창성탑비 안쪽에는 보물 제157호인 "보림사 보조선사탑(寶林寺 普照禪師塔)"이 있어,

이 탑의 높이는 4.1m이며 이 탑은 보조선사 체징(體澄)의 사리탑으로,

보조선사(普照禪師)는 헌강왕이 내린 시호이며, 창성은 탑호이며,

일제강점기에 사리구를 절취당하면서 도괴된 것을 복원한 것으로,

8각 원당형을 따른 이 탑은 8각 지대석 위에 놓여 있고 지대석 윗면에는 얕은 1단의 굄이 마련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뒤에 팔각 석재가 2중으로 놓였는데 손상이 심한데,

탑신도 8각이며 너비는 상대석과 거의 같으며 상륜으로는 보륜·보주 등이 차례로 놓여 있으며,

조루가 섬려하고 그 형태도 정돈된 편으로 조성은 보조선사가 입적한 880년의 4년 후인 것으로 추정 되는데,

 

 

 

 

이 부도에서 가장 주목되는 것은 탑신에 새겨진 사천왕상으로,

염거화상탑(국보 제104호)에서 사천왕이 처음 등장한 이후로 고려 초까지 대부분의 탑신에 사천왕상이 표현되고 있어,

사천왕은 부처님을 호위하는 신중(神衆)으로 선사의 묘탑인 부도에 사천왕이 표현된 것은,

선사를 부처와 같이 동등하게 생각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습니다.

 

 

 

 

부도의 앞쪽에는 탑비가 남아 있어서,

보조선사의 행적 및 당시 사찰의 대외관계 등 모든 내용을 알 수 있는데,

비문에 의하여 볼 때 이 부도의 조성연대는 880년경으로 추정되며,

이 시기는 왕실의 후원을 입어 선승들의 부도와 탑비가 활발하게 만들어지고,

예술적으로 뛰어난 부도가 만들어지던 시기로,

보조선사탑은 이 시기 조형의 아름다움을 잘 드러내주고 있습니다.

 

 

 

 

사리탑과 탑비를 돌아보고 나오는길에,

다른 사찰과 달리 아래로 내려오게 옛날식으로 해두어,

직접 솟아 나오는 물을 바로 먹을수 있도록 되어 있는 샘물에 눈길이 가며,

 

 

 

 

돌아보고 나오는길에는,

사찰의 담장 밖에는 전통방식의 "해우소가" 있어,

아랫쪽으로 바람이 잘통하게 해두어 냄새를 잡고자 하는 구조로,

 

 

 

 

내부를 들여다 보니,

절반은 현대식으로 바뀌어져 있습니다.

 

 

 

 

장흥을 대표하는 사찰로,

국보와 보물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를 간직하고 있는 곳으로,

한국불교 선종(禪宗)의 태두(太頭)인 사찰로,

전남 장흥의 "보림사(寶林寺)"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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