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서구 세하동 274-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일제강점기의 정자 건축물인 "만귀정(晩歸亭)"을 찾았습니다.

 

광주광역시에서 멋있는 풍경이 있어 그것을 서구 8경이라 하고 있는데,

그중 제1경인 만귀정(晩歸亭) 으로 광주광역시의 문화재자료 제5호로 지정 되었으며,

 

 

 

 

입구를 들어서면 "만귀정시사창립기념비(晩歸亭詩社創立記念碑)"가 있어,

일제강점기인 1939년에 송광세(宋光世)가 쓴 글씨로,

한때 이곳을 무대로 한시(漢詩) 활동이 전개되었음을 알 수 있게 합니다.

 

 

 

 

정자에서 습향각 쪽을 향하는 곳에,

글씨가 새겨진 제단처럼 생긴 네모난 돌을 볼수있는데,

 

 

 

 

석재의 앞뒤로는 취석(醉石)과 성석(醒石)의 글씨가 새겨져 있어,

 

 

 

 

이곳에서 습향각으로 들어갈 때는 취하고,

나올 때는 깨어서 나오라는 말로 만귀정의 정취에 흠뻑 취하여도 돌아서 갈 때는 깨서 가라는 의미라 합니다.

 

 

 

 

만귀정(晩歸亭)은 흥성장씨(興城張氏)로 이 마을에 처음 들어온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羽,1704~1774)가,

1750년 경 후학을 가르치며 만년을 보내기 위해 세운 정자가 있었던 곳으로,

원래의 건물은 없어졌고 현재의 건물은 옛터에 후손들이 뜻을 기려서,

1934년에 인공적으로 땅을 파 약1,400평의 연못을 만들고 파낸 흙으로 동산을 만든 다음 그 위에 정자를 중건 하였으며,

만귀정의 중건 뒤에 세워진 습향각(襲香閣)과 묵암정사(墨庵精舍)가 다리를 사이에 두고 늘어서 있습니다.

 

 

 

 

만귀 장창우(晩歸 張昌雨)의 처음 이름은 한규(漢圭)이고,

자(字)는 자칠(子七), 호(號)는 효우당(孝友堂)이며,

부(父)는 세영(世英), 조(祖)는 익한(翊漢), 증조(曾祖)는 봉린(鳳麟)으로,

본성(本性)이 효우(孝友)하여 부모에게 정성을 다하고,

양친의 상사 때에는 3년 동안 여묘(廬墓)하고 밤낮으로 호곡(號哭)하여 슬피 우니,

지나가던 사람들이 효자라고 칭송하였다고 하며,

여묘(廬墓)하던 자리에 눈물이 하염없이 떨어져 풀이 자라지 못할 만큼 효성을 다하니,

이에 감동한 산 속의 큰 짐승들이 신변을 지키기 위해 주위를 호위하였다는 전설이 있으며,

 

 

 

 

만년에 지금의 서창 동하(洞荷) 마을 앞에 조그마한 정자를 짓고 학문에 전념하였고,

자질이 뛰어난 향중(鄕中)의 수재를 모아 교육에 전심하였는데,

그 정자의 이름이 바로 만귀정(晩歸亭)으로,

 

 

 

 

정자에는 겸산 이병수(李炳壽)외 다른 글씨체의 만귀정(晩歸亭) 현판을 2개를 볼수 있는데,

"만귀(晩歸)"란 비로소 제 갈 길을 찾아 돌아가는 이의 뒷모습이 떠오르는 글귀로,

늙은 만년(晩年)에 이곳에서 한가로이 풍류(風流)를 즐기자는 뜻이라 합니다.

 

 

 

 

정자의 주춧돌은 잘 다듬은 화강암을 마루까지 제법 길게 올렸으며,

 

 

 

 

만귀정은 앞면 2칸·옆면 2칸 규모를 갖추고 있으며,

골기와를 얹은 팔작지붕에 바닥에는 우물 마루를 깔았고,

동. 서. 남의 세 방향에 난간을 돌렸는데 방은 들이지 않은 누각형의 정자이며,

 

 

 

 

정자의 마루 위에는 많은 기문(記文)과 시판(詩板)의 편액(扁額)들이 올려져 있어,

 

 

 

 

이병수(李炳壽)가 1934년에 쓴 상량문(上樑文)을 비롯하여,

많은 이들의 시판(詩板)이 현액(懸額)되어 있고,

 

 

 

 

만귀정 중건기(晩歸亭 重建記)의 기문(記文)은 1934년 고광선(高光善)의 글 입니다.

 

 

 

 

남도의 별서정원을 대표하는 소쇄원과 명옥헌이 자연상태에서 약간의 인공미를 가미했다면,

만귀정은 극락강이 바라보이는 자연경관이 아름다운 곳에 정자를 짓기위해,

연못을 파고 인공적으로 동산을 만들었으니 그 두곳과는 전혀 다른 정원이라고 할수 있으며,

 

 

 

 

정자의 마루에서 잘 꾸며둔 만귀정의 정취를 즐겨 봅니다.

 

 

 

 

만귀정은 큰 연못 가운데 세워진 수중(水中) 정자인데,

그 옆에는 습향각(襲香閣)과 묵암정사(默庵精舍)라는 이름의 정자가 다리를 사이에 두고 나란히 늘어서 있는데,

두 정자 모두 만귀정 중건 이후에 건립 되었다고 하며,

 

 

 

 

만귀정에서 연못을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를 건너면,

아담한 규모로 또하나의 정자가 있어,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雨)의 7세손이자,

송정읍장이었던 묵암 장안섭이 1940년에 지은 "습향각(襲香閣)"으로,

 

 

 

 

"습향각(襲香閣)"의 현판으로,

"주위의 연꽃 향기가 정자로 엄습(掩襲)하여 온다"는 뜻이라고 하며,

 

 

 

 

정자는 사방 1칸의 팔각지붕으로 아담한 규모이며,

 

 

 

 

한칸의 정자여서 인지,

천정의 구조도 육각정자나 팔갈정과 같이 조금 복잡해 보입니다.

 

 

 

 

습향각에서 또다시 다리를 건너면 아담한 정자가 하나 더 있어,

 

 

 

 

맨 안쪽에 있는 "묵암정사(默庵精舍)"도 조촐한 규모인 한 칸의 정자로,

 

 

 

 

묵암정사는 장창우의 7세손인 장안섭 송정읍장의 공로와 덕행을 기리기 위해,

1960년에 광산군민들이 성금을 모아 건립한 것이라 하며,

 

 

 

 

마루 위에는 묵암정사(默庵精舍)의 현판이 있고,

 

 

 

 

기장산하(氣壯山河)의 편액이 있어,

석촌石村 윤용구尹用求(1853∼1937)으 글씨로,

윤용구는 조선 후기에 도승지 등의 벼슬을 지냈고,

대한제국 수립 후에도 법부, 탁지부, 내무대신 등으로 10여 차례 임명되었으나 이를 모두 거절 했다고 하며,

 

 

 

 

그외 현액시(懸額詩)로 보이는 편액 한기가 올려져 있습니다.

 

 

 

 

만귀정은 큰 연못 가운데에 세운 정자로,

다리를 사이에 두고 다른 정자들과 한 줄로 늘어서 있어,

큰 연못 가운데 세운 습향각과 묵암정사가 더불어 있는 주변 자연경관의 아름다움으로,

당시 시인묵객들이 찾아와 시를 짓고 서로의 흥취를 돋운 곳으로 유명한 곳이며,

봄이면 벚꽃이 흐드러지고 여름이면 배롱나무꽃과 창포꽃이 땅바닥을 뒤덮고 있고,

가을이면 연못가 왕버들 나무가 흥취와 시상을 떠오르게 하는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귀정 현판에 걸려있는 효우당(孝友堂)의 "만귀8경"을 가져와 봅니다.

瑞石明月 무등산에는 밝은 달이 떠 있고

龍江漁火 용강에는 어부들의 불빛이 있네

馬山淸風 마산에는 맑은 바람 산들거리며

樂浦農船 낙포에는 농사를 위한 배가 오간다

漁燈暮雲 어부들의 등불에 저녁 구름 피어나고

松汀夜雪 송정에는 흰눈이 밤을 밝히며

錦城落照 금성에는 아름다운 저녁 노을

野外長江 들 밖에는 길고 긴 강물이 흐르네

 

 

 

 

만귀정은 1974년 신성일과 윤정희 주연의 "꽃상여"가 촬영된 곳으로,

허장강이 상여 앞에서 소리를 하고 꽃상여는 이 동네 사람들이 모두 엑스트라로 나서 상여를 맸다고 하며,

당시 허장강은 이 영화로 제13회 대종상 남우조연상을 받기도 했으며,

1960년에는 박복남, 복원규, 김해연 주연의 "탈선춘향전"을 찍은 곳이라고 합니다.

 

 

 

 

자연을 최대한 활용한 우리고유의 별서 정원인 원림이 아닌,

인공적으로 조성한 정원 이지만,

효우당(孝友堂) 장창우(張昌羽)를 되돌아 볼수 있고,

철에 따라 각기 다른 모습의 연못이 있는 정자의 정취를 느낄수 있는곳으로,

광주의 정자 문화재인 "만귀정(晩歸亭)"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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