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무안군 청계면 사마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인 화설당(花雪堂)을 찾았습니다.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71호로 지정된 "화설당(花雪堂)"은,

마을 초입에 있는 마을회관 옆에 자리하고 있으며,

 

 

 

 

화설당(花雪堂)은 유운(柳運, 1580~1643)이 1610년경에 건립했는데,

명칭은 1612년 겨울에 나주 목사 박동렬(朴東說,1564-1622)이,

화설당이라 이름 한것은,

조선 중기의 문신 수은(睡隱) 강항(姜沆, 1657~1618)과 함께 찾아와,

겨울인데도 동백꽃이 있어서 화설이라 하고 시 1수를 남긴데서 연유한다고 하며,

 

 

 

 

정자앞 마당에는 아단한 규모의 연못이 있으나 말라 있는데,

연못 한가운데 둥근 섬이 떠있는 형태의 방지원도를 표현하는 "천원지방(天圓地方)"으로 보이며,

 

 

 

 

화설당을 살펴보면 앞뒤로 툇마루를 두었고,

우측부터 방 두 칸을 들이고 두칸은 대청마루를 한 " 一"자형 구조로,

 

 

 

 

화설당(花雪堂)은 1728년과 1869년에 중수 하였는데,

건축 구성에 있어서도 다른 정자와 평면형식이 구별이 되고 있어,

완전한"一"자형 으로 좌로부터 방, 방, 대청 2칸 순으로 꾸며져 있고 전·후로 모두 툇마루를 설치 하였으며,

좌측 방에는 이 지역 민가에서 볼 수 있는 봉창도 설치 하였습니다.

 

 

 

 

큰 마루쪽에는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마루쪽으로의 개방성을 더한 모습이고,

 

 

 

 

좌우 끝에 퇴를 내었는데 좌측의 퇴칸에 눈길이 가며,

좌측 퇴는 앞뒤로 보았을 때 퇴를 죽여 바로 꺽여 있는데,

다른 칸에 비해 기둥이 넷이 아니라 둘만 필요하게 되었다는 점이며,

 

 

 

 

좌측 네번째 칸은 앞뒤 퇴칸에 해당되는 부분은,

다른 부분보다 마루를 좀더 높게 만든 것도 특이한 구조이며,

 

 

 

 

화설당의 마루 위에는 많은 편액들이 올려져 있어,

 

 

 

 

화설당(花雪堂)의 현판으로,

현판은 유운(柳運)의 친구였던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1689)이,

칡뿌리로 쓴 글씨 갈필휘호(葛筆揮毫)로 알려져 있으며,

 

 

 

 

노송괴오(老松魁梧)의 현판도 있어,

옛날 정자가 세워질 당시에는 주변에 우람한 노송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늙은 소나무와 으뜸가는 오동나무"라는 의미 이며,

 

 

 

 

주재제우(舟載諸友)의 현판이 올려져 있으며,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이 나주 목사(羅州牧使)로 있을때,

이곳에 들려 남긴 시판(詩板)을 비롯하여,

 

 

 

 

화설당차 남곽선생운(花雪堂次 南郭先生韻)을 비롯하며,

여러 현액시(懸額詩)들이 올려져 있는데,

위의 "남곽선생"은 1612년경에 나주목사를 재임한 남곽(南郭) 박동열(朴東說)을 이르며,

 

 

 

 

 

화설당중수기(花雪堂重修記)를 비롯한 기문(記文)들도 여러 기 올려져 있어,

그 중 수은(睡隱) 강항(姜沆)은 이곳에 "화설당기(花雪堂記)"를 남겼는데,

강항(姜沆) 임진왜란 때 의병장 활약 하였고 정유재란 때에는 일본에 포로로 끌려 갔으며,

4년 여 동안 일본에서 겪고 보고 들은 것을 세세하게 기록한 간양록은 널리 알려져 있으며,

1600년에 탈출하여 대구향교, 순천향교수 등을 지낸 뒤 후학양성 힘쓴 인물 입니다.

 

 

 

 

안을 들여다 보니,

두칸의 온돌방은 하나로 트여 있어서 너른 공간을 보여주고 있고,

 

 

 

 

화설당의 마루에서 내려다 보면,

마당안의 아담한 연못이 들어오고,

 

 

 

 

화설당(花雪堂)에서의 전경은,

이곳이 정자의 개념 보다는 강학과 교류의 공간으로 활용 되었기에,

내어다 보이는 풍광은 그리 뛰어나지 않습니다.

 

 

 

 

전라남도 무안에서 찾았던 문화재로,

특이한 건물구조를 살필수있는 곳이며,

강학과 교류를 위한 정자인 화설당(花雪堂)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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