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광역시 광산구 임곡동 광곡마을에 위치하고 있는,

조선시대 정자인 "칠송정(七松亭)"과,

인근에 있는 서원인 "월봉서원(月峯書院)"을 찾았습니다.

 

칠송정(七松亭)은 고봉 기대승의 장남 함재(涵齋) 기효회(奇孝會)가,

1587년에 3년간 시묘살이를 하던 장소로 1650년경에 정자를 세웠으며,

그간 몇차례의 중건과 중수가 거듭되어 온것으로 알려져 있어,

 

 

 

 

정자 주변에 직접 일곱 주의 소나무를 뜰 앞에 심어,

사계절 불변의 지조를 지닌 소나무의 절개를 본받았다는 뜻으로 정자의 이름을 칠송정(七松亭)이라 하였으나,

지금은 일곱 그루의 소나무는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정자의 정면에 올려져 있는 "칠송정(七松亭)"의 현판으로,

현판의 글씨는 한말의 거유 석촌(石村) 장위산인(獐位山人) 윤용구(尹用求,1853∼1939)가 행서로 썻으며,

이 당시에 중수 또는 보수를 했을 것으로 여겨지며,

 

 

칠송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이며,

방은 들이지 않은 누각형의 정자로,

 

 

 

 

정자의 마루 위에는 현판외에 두개의 편액(扁額)을 볼수 있어,

 

 

 

 

후손으로 8세손 기봉국의 "호산승처필명정(湖山勝處必名亭)"의 편액(扁額)이 있고,

 

 

 

 

1905년(고종42)에 10대손 기동준이 쓴 "칠송정중건기(七松亭重建記)"의 기문(記文)이 있습니다.

 

 

 

 

정자는 외벌대 기단위에 정평주초를 놓고 원주의 기둥을 세웠으며,

4벽이 개방되어 있으며 우물마루를 놓고 사방에 머름대를 두었는데,

사이에는 제비추리 맞춤으로 마감하여 하방 부분을 장식하고 있으며 2고주 5량집으로 되어 있으며,

 

 

 

 

칠송정(七松亭)의 주인은 고봉 기대승의 장남 함제(涵濟) 기효회(奇孝會)로,

함재는 부친의 뜻을 좆아 벼슬길을 멀리하고,

초야에 묻혀 학문을 연마하며 평생을 지낸 조선의 선비였는데,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 대적하였고,

의곡(義穀) 3000석을 수집하여 의주의 행재소(行在所)로 수송하기도 하였기에,

이에 선조임금은 군기사검정(軍器寺劍正)이라는 벼슬을 제수하였으나,

그는 완곡하게 사양하고 이곳에 내려와 부친의 학통을 이어 받았습니다.

 

 

 

 

정자 옆에는 정자의 내력을 알려주는 "칠송정기(七松亭記)"의 비석이 있고,

 

 

 

 

칠송정(七松亭)이란 제목의 시가 이 정자의 의미를 말해주고 있어 가져와 봅니다.

七株元與古人期 偃蓋曾經鶴踏枝 일곱 그루 솔은 본디 옛사람과 기약했고 / 언개에는 일찍이 학이 거기 앉았었네

定作靑牛扶道骨 何須紺髮鍊霜脂 푸른 소 되어 도사 태우기로 되었는데 / 감발이 상지 제련하길 어찌 기다리리

巉巉化石明朝事 冉冉逢仙此日奇 험상궂은 돌로 됨은 지난날의 일이고 / 처진 가지 신선 만남 오늘날의 기연이네

白甲冰容誰更老 姑山正合對峨眉 흰 비늘의 찬 모습은 누가 다시 늙게 하랴 / 고야산(姑射山)은 아미산(峨眉山)과 마주하기 알맞구나

 

 

 

 

칠송정에서 마을을 지나 맨 안쪽으로 들어오면,

"월봉서원(月峯書院)"을 만나게 되어,

 

 

 

 

월봉서원(月峯書院)은 조선 전기의 문신인 기대승(奇大升,1527∼1572)의 위패를 모시고 봉향하는 곳으로,

월봉서원의 정문격인 외삼문인 "망천문(望川門)"이며,

 

 

 

 

옛날의 사립대학이라 할 수 있는 월봉서원(月峰書院)은,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을 추모하기 위해,

고봉 사후 7년만인 1578년(선조 11년)에 낙암(현 신룡동)에 세웠으나,

임진왜란 때 피해를 입어서 동천(현 산월동)으로 옮겨서 건립했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로 훼철 되었다가 1941년 현재 위치에 새로 지었는데,

1978년부터 사당과 장판각, 내삼문, 외삼문 건립에 착수하여 1981년에 준공을 하였습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좌측에는 기숙사 격인 서재(西齋)가 자리하고 있어,

 

 

 

 

서재(西齋)에는 "존성재(存省齋)"의 현판이 걸려 있고,

 

 

 

 

우측에는 동재(東齋)인 "명성재(明誠齋)"가 있어,

 

 

 

 

명성재(明誠齋)는 "배움에 있어서 밝은 덕을 밝히는데 성의를 다하라"는 뜻이라 하며,

 

 

 

 

동재와 서재를 지나면 중앙에 강당인 "빙월당(氷月堂)"이 있어,

광주광역시 기념물 제9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전라남도유림에 의하여 1938년에 건립 되었다고 합니다.

 

 

 

 

빙월당의 전면에는 "월봉서원(月峯書院)"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강당의 이름인 빙월당(氷月堂)의 현판도 있어,

정조가 기대승의 고결한 학덕을 빙심설월(氷心雪月)에 비유하여,

빙월당이란 이름을 하사 하였다고 합니다.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1527∼1572)은 행주 기씨(幸州 奇氏)로,

이조 중종 22년(1527~1572) 11월 18일 광주시 소고룡리(지금의 新龍洞)에서 출생하였으며,

고봉은 독학으로 32세에 문과을과에 장원하여 관계에 진출하였고,

성균관대사성, 사간원대사간 등 내직을 두루 거치고 46세에 타계 하였으며,

덕원군(德原君)에 추봉되고 시호는 문헌(文憲) 입니다.

 

 

 

 

고봉(高峰)의 문집으로는 경연강론을 모은 논사록(論思錄)과 주자문록 등 다수가 있으며,

조선의 성리학에 큰 영향을 끼쳤는데,

특히 퇴계 이황과의 8년에 걸친 "사칠이기왕복론변(四七理氣往複論辨)"은 유명하며,

월봉서원은 1654년(이조 효종 5년)에 사액(賜額) 되었습니다.

 

 

 

 

빙월당의 오른쪽에는 전사각(典祀閣)이 있어,

 

 

 

 

전사각(典祀閣) 제사음식을 준비하고 제기 등을 보관하는 곳이며,

 

 

 

 

빙월당 왼쪽에는 "장판각(藏板閣)"이 있어,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장판각(藏板閣)에는 고봉 문집 11권의 고봉집(高峯集) 외에,

논사록(論思錄), 왕복서(往復書), 이기왕복서(理氣往復書) 등의 목판(木板) 474매와,

월봉서원강당, 충신당, 명성재, 존성재, 유영루 등 현판이 보관되어 있는데,

고봉 문집 판각 474매는 광주광역시 유형문화재 제1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강학공간이 강당 뒤에는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을 배향하는,

제향공간인 사당인 숭덕사(崇德祠)이 있으나,

문이 닫혀있어 들어갈수는 없습니다.

 

 

 

 

기대승의 장남 함재(涵齋) 기효회(奇孝會)의 행적을 돌아볼수 있고,

성리학의 대가로 새 학설을 제시하여 학계에 주목을 받았으며,

스승인 퇴계 이황과 사단칠정(四端七情)을 주제로 한 8년 간의 서신왕래로,

유명한 일화를 남겼던 인물인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의 생을 돌아볼수 있는곳으로,

충효의 정자인 광주의 칠송정(七松亭)과 월봉서원(月峯書院)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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