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진천군 진천읍 산척리에 있는,

의사(義士) 이상설(李相卨)의 생가(生家)를 찾았습니다.

 

이상설 생가(李相卨 生家)는 충청북도의 기념물 제77호로 지정 되었으며,

조선 말기의 의사(義士) 이상설(李相卨,1870∼1917)이 태어난 집으로,

 

 

 

 

너른 들판을 바라보는 낮은 구릉의 작은 마을에 위치해 있으며,

 

 

 

 

생가(生家)는 정면 3칸에 측면 1칸 규모로 흙벽돌로 쌓고 진흙으로 마감한 초가로,

 

 

 

 

안채를 마주하고 헛간및 창고로 보이는 건물이 있어,

 

 

 

 

초가지붕의 작은 3칸의 규모인데,

한칸은 트여있고 두칸은 문이 없이 가람막만 하여둔 상태이며,

 

 

 

 

트여있는 한칸은 농기구 등을 보관하는 창고로 여겨지며,

 

 

 

 

가려져 잇는 한칸을 들여다 보니,

요즘의 화장실인 변소가 있습니다.

 

 

 

 

마당 한쪽에는 소박했던 살림을 알려주듯,

장독대와 함께 옆에는 절구 등의 모습도 보이고,

 

 

안채는 중앙 2칸에 앞으로 툇마루가 달린 안방을 들였는데,

이 방 사이에는 4분합 미닫이문을 달았고 좌측편에 1칸의 부엌을 들였고,

우측에는 툇마루 부분까지 확장한 1칸의 큰 웃방을 들였으며,

옆으로 다시 웃방에서 사용하기 위한 1칸의 툇마루를 두었습니다.

 

 

 

 

좌측편의 부엌은 문이 없이 거적으로 가림만 해둔 상태이고,

 

 

 

부엌을 들여다 보니,

옛사람들의 궁핍했던 살림살이를 짐작하게 하며,

 

 

 

 

부엌의 오른쪽으로 2개의 방이 나란이 있어,

 

 

 

 

들여다 본 작은방의 모습이며,

 

 

 

 

부엌쪽에 벽장이 있는 안방도 들여다 보게 됩니다.

 

 

 

작은방 앞에는 고방 이라고도 불렀던 창고가 붙어 있고,

 

 

 

 

생가(生家)는 약 40여 년 전에 무너진 것을,

1988년에 보수하여 지금에 이르고 있다고 합니다.

 

 

 

 

생가 앞에는 이상설(李相卨)의 사당및 유적등이 조성되어 있어,

 

 

 

 

사당 입구에는 이상설(李相卨)의 동상이 세워져 있으며,

 

 

 

 

당시 헤이그에서 열렸던,

만국평화회의에 갔었던 모습을 재현해둔듯 하며,

 

 

 

 

한쪽에는 1971년에 세운 숭모비가 보호비각 안에 있으며,

 

 

 

 

"보재 이상설 선생 숭모비(溥齋 李相卨先生 崇慕碑)"로,

거북 대좌 위에 높이 210㎝, 두께 45㎝, 너비 75㎝의 오석(烏石)으로 된 비신을 세우고,

 

 

 

 

 

두 마리의 용이 다투는 형상의 이수를 얹어 놓았는데,

비문은 이은상(李殷相)이 짓고 비명은 이범석(李範奭)이 쓰고 이상복(李相馥)의 글씨 입니다.

 

 

 

 

숭렬사(崇烈祠) 정면에는 늦은 계단위로 솟을삼문이 있으며,

 

 

 

 

삼문을 들어서면 사당인 숭렬사(崇烈祠)가 자리해 있어,

 

 

 

 

숭렬사(崇烈祠) 이상설 영정을 모신 사당으로,

원래 진청향교 부근에 있던 것을 1997년에 생가가 있던 지금의 자리로 이건 하였으며,

정면이 3칸, 측면이 2칸 반인 맞배지붕 목조기와집으로 반 칸의 앞퇴를 두고 있고,

회와 돌을 섞은 담장을 두르고 기와를 얹은 형태이며,

 

 

 

 

독립운동가인 이상설(李相卨,1870∼1917)은 조선국 충청도 진천 출생으로,

자(字)는 순오(舜五), 호(號)는 보재(溥齋)이고 본관은 경주이며,

1904년에 급제한 다음해에 의정부참찬이 되었으나,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된 후 울분을 참지 못해 길에서 연설한 후 두문불출하다가,

1907년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알리고자 고종의 밀서를 가지고,

이준, 이위종과 함께 헤이그에 갔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으며,

 

 

 

 

그 후 불라디보스톡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1910년에는 한일합방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내었으며,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1년 권업회 창설과 1914년 러일전쟁 10주년 기념일을 기하여,

대한광복군 정부 수립을 주관하여 정통령에 선임되기도 하는등 독립운동에 헌신 하였습니다.


1917년 4월 1일, 망명지인 연해주 니콜리스크에서 47세로 병사 했으며,

그는 죽기 전에 "동지들은 합세하여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제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닥에 날린 뒤 제사도 지내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데,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는 화장하고, 문고도 모두 불태워 졌습니다.

 

 

 

 

사당 입구에는 "유물 전시관"이 있어,

 

 

 

 

전시관은 아담한 규모로 이상설(李相卨)과 관련한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어,

 

 

 

 

"건국 공로 훈장증"과 함께,

 

 

 

 

훈장이 함께 전시되어 있어,

대한민국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려 1962년에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하였으며,

 

 

 

 

"이상설 선생 기념사업추진위원회"에서 1971년에 숭모비(崇慕碑)를 건립 하였고,

1975년 숭렬사(崇烈祠)를 건립 했으며,

대한민국 국가보훈처는 2005년 12월 그를 이 달의 독립운동가에 선정 하였습니다.

 

 

 

 

조국광복에 대한 일념 하나로 일생을 살았으나,

끝내 광복을 보지 못하고 망명지인 연해주에서 생을 마친 인물로,

그의 생을 되돌아 볼수 있는 곳으로,

충북 진천의 "이상설 생가(李相卨 生家)"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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