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에 법수사지에 있는,

통일 신라 시대의 불탑인 "법수사지 삼층석탑(法水寺址 三層石塔)"을 찾았습니다.

 

법수사지 삼층석탑(法水寺址 三層石塔)은,

경상북도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의 가야산에 위차하고 있는,

남북국 시대 신라의 거찰 이었던 법수사지(法水寺址)에 있는 탑으로,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星州 法水寺址 三層石塔)"은 보물 제1656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석탑의 높이는 5.8m이며,

2층기단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전형적인 3층 석탑의 양식이며,

 

 

 

 

석탑은 9세기인 신라 애장왕(800~809년) 때 창건한,

"법수사지(法水寺址)" 내에 위치하고 있으며,

법수사지는 가야산 계곡을 석축으로 단을 조성하여 자리잡고 있습니다.

 

 

 

 

탑의 기단부는 지대석과 하대중석은 4매 부재가 맞물려 한 몸돌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대중석의 각 면에는 안상을 3개씩 음각 하였고,

하대갑석은 4매가 방형을 이루고 있으며,

상부에는 3단의 상대중석 괴임이 호형으로 쇠시리되어 있고,

 

 

 

 

상대중석은 4매로 구성하여 남․북쪽의 면석에는 탱주와 우주를 모두 양각하고,

동․서쪽 면석은 탱주만 양각하고 남․북쪽의 면석에 조금 끼워 넣어,

남․북쪽의 우주가 동․서쪽 면석의 우주를 겸하도록 했으며,

상대갑석은 남쪽과 북쪽의 2매로 결구되어 있는데,

옥신괴임은 2단으로 쇠시리가 호형이 아니고 사절로 각출되어 있어,

기단부는 전체적으로 보면 하층기단이 전형적인 신라석탑에 비해 높은 편이며,

 

 

 

탑신부는 1~3층 탑신석은 단일 부재로 네 모서리에 우주를 양각 하였고,

1층과 2층의 탑신석 상부와 1층 옥개석 하부에는 사리공을 설치해 놓았으며,

1층 탑신석 상부의 정방형과 1층 옥개석 하부의 사다리꼴형이 맞닿아 있는데,

단변 형태가 서로 맞지 않아 사리장구가 특수한 것인지 1층 옥개석 사리 장엄구를 별도로 두었는지 알 수 없으며,

사리장치는 해체 당시 이미 모두 수습된 상태로 1층에는 나무토막 3개가 매납되어 있고 나머지는 비워져 있었습니다.

 

 

 

 

옥개석의 낙수면은 비교적 완만하며 우동의 전각은 반전이 심하고 전체 두께도 얇은편이며,

1~3층의 옥개석 모두 전각부가 만나는 모서리 하부에 원형 풍경공이 한 개씩 뚫려있어,

1~3층의 옥개받침은 5단으로 위단으로 올라갈수록 내밀어져 있고 그 단부는 사절되어 있는데,

3층 옥개석의 상부에는 1단 노반 괴임을 각출하고 중앙에 원추형 찰주공을 뚫었으며,

 

 

 

 

상륜부는 노반만 남아 있고 복발 이상의 상륜부는 없으며,

노반은 방형 단일부재로 각형 층급이 각출되어 있고 중앙에는 찰주공이 뚫려있어,

찰주원공은 3층 옥개석 상부의 찰주 구멍과 꼭 맞게 설치되어 있고,

노반 상부에는 자연석을 1개 얹어 보주를 대신하게 했으며,

 

 

 

 

법수사지 삼층석탑은 을 살펴보면,

9세기 후반에 나타나는 석탑의 현상으로 탑의 규모가 작아진 것과,

지붕돌의 치켜올림이 지나치게 큰 점을 비롯하여 기단과 탑신에 인왕상 등의 장엄이 나타나는 부분,

층급받침이 5단에서 4단으로 축소되는 점 등의 특징이 있는데,

법수사지삼층석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의 9세기 후반기 특징을 보이고 있으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을 보이고 있어,

사찰의 창건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법수사지(法水寺址)는 주변 전체가 산으로 둘러싸여 있고,

높은 위치에 있어 경관이 수려하고 전망이 아주 좋은 곳으로,

지금 사찰은 폐사되고 삼층석탑과 금당지(金堂址)에 거대한 석축만이 남아 있는데,

서기 935년(경순왕 9) 10월에 경순왕이 시랑(侍郞) 김봉휴(金封休)에게 국서를 보내 고려 태조에게 항복을 청하자,

막내 아들 계자(季子)는 화엄종(華嚴宗)에 들어가 중이 되었는데 법명을 범공(梵空)이라 하였으며,

후에 법수사(法水寺)와 해인사(海印寺)에 머물렀다고 한다는 기록이 남아 있어,

 

 

 

 

법수사(法水寺)가 언제 어떻께 폐사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9개의 금당과 8개의 종각이 있는 거대한 사찰이었다고"경산지" 불우조에 전하고 있으며,

사역은 남북 150m, 동서 150m 정도이고 크게 세 단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석탑 주변에는 석등대석(石燈臺石)과 불상대석(佛像臺石),

장대석(長臺石) 등의 유구가 흩어져 있어 사찰의 규모를 짐작케 하는데,

 

 

 

 

폐사지의 유구들을 모아둔 곳에는,

연화문의 불상대석(佛像臺石)으로 보이는 석재도 보이고,

 

 

 

 

빗살의 무늬가 들어가 있는 오래된 기와 조각들을 볼수 있는데,

 

 

 

 

법수사지는 2015년에 대대적인 발굴로,

명문기와를 포함한 많은 물품들이 출토 되었으며,

건물지는 대부분 고려 시대에 축조되어 조선 시대까지 유지된 것으로,

 

 

 

 

최소 6개 동의 건물지와 기타 시설물이 확인 되었는데,

건물의 배치는 중심구역 전면에 1호 건물지가 조성되어 있고,

중심으로 좌ㆍ우에 금당지로 추정되는 건물지와 부속건물지가 어우러진 사역의 경관을 확인할 수 있어,

1호 건물지는 동-서 방향으로 계단시설과 보도시설을 갖추어 2호ㆍ3호ㆍ5호 건물지로 이어진 동선을 갖추었는데,

이는 고려 후기의 가람배치를 보여주고 있어 가람배치에 대한 이해를 높이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되고 있으며,

 

 

 

 

금당지로 추정되는 2호ㆍ3호 건물지는,

바닥에 전(塼)을 깔고 내부에 불단을 갖춘 구조로,

직사각형의 3호 건물지에서 불단은 세장방형으로 2호 건물지는 정방형(정사각형)의 2열로,

정방형의 3열의 모습은 2호 건물지에서 볼수있어 구분되는 모습을 볼수 있으며,

가구식 기단(架構式 基壇)의 설치와 석재 가공기술로 보아 격이 매우 높은 건물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1677년(숙종 3) 간행된 성주 지방지인 "경산지(京山誌)"의 기록에 의하면,

법수사지(法水寺址)는 9금당, 8종각 등 무려 천 칸이나 되는 사찰이었다고 되어 있어,

사역 규모가 합천 해인사를 능가하는 대규모 사찰임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합천의 가야면과 성주의 수륜면을 연결하는,

59번 국도의 도로아래에 위치하고 있어 그냥 지나치기 쉬운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가야산 일대에서 해인사 이상가는 큰 사찰였던 법수사지(法水寺址)를 살필수 있는곳으로,

경상북도 성주의 문화재, "법수사지 삼층석탑(法水寺址 三層石塔)"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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