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남도 구례군 마산면 지리산(智異山) 남쪽 기슭에 있는,

화엄사(華嚴寺) 입니다.

 

화엄사(華嚴寺)는 사적 제505호로 지정 되었으며,

통일신라시대에 창건되어 화엄종(華嚴宗)을 선양하였던 사찰로서,

대한불교 조계종 제19교구 본사이며,

 

 

 

 

화엄사로 들어가며 일주문 옆에 있는 안내도를 미리 보아 둡니다.

화엄사(華嚴寺)는 중관대사(中觀大師) 해안(海眼, 1567~?)이 1636년(인조 14년)에 쓴,

"호남도구례현지리산대화엄사사적(湖南道求禮縣智異山大華嚴寺事蹟)"등의 모든 사적기들은,

“544년(신라 진흥왕 5, 백제 성왕 22) 인도의 승려인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다”고 하였으며,

 

 

 

 

또한 "구례속지(求禮續誌)"에는 “진흥왕 4년에 연기조사(緣起祖師)가 세웠으며,

백제 법왕이 3,000명의 승려를 주석하게 하였다”고 부연하고 있고,

화엄사의 중건에 대해서도 “신라 선덕왕 때에 자장(慈藏)이 증축하고,

문무왕 때에 의상(義湘)이 장륙전(丈六殿)을 건립하였다”는 등의 기록이 있으며,

 

 

 

 

화엄사(華嚴寺)는 신라 말 도선(道詵)에 의하여 크게 확장 되었고,

고려 광종 때에 홍경선사(洪慶禪師)가 퇴락한 건물을 중수 하였으며,

문종이 전라도 및 경상도에서 이 절에 매년 곡물을 헌납하는 것을 허락함 으로써,

이를 저장하기 위한 2채의 큰 창고를 일주문 밖에 짓기도 하였으며,

또한, 인종은 정인왕사(定仁王師)로 하여금 이 절을 중수하게 하고,

1172년(명종 2)에 도선국사의 비를 세우도록 하였으며,

충숙왕 때에는 조형왕사(祖衡王師)가 대대적인 보수를 하였습니다.

 

 

 

 

조선시대의 화엄사는 1424년(세종 6)에 선종대본산(禪宗大本山)으로 승격 되었지만,

임진왜란의 병화로 완전히 불타버렸고 석경(石經)마저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는데,

이에 각성(覺性)은 1630년(인조 8)에 중건을 시작하여 7년 만인 1636년에 대웅전을 비롯한 약간의 건물을 이룩하였고,

1649년에는 선종대가람(禪宗大伽藍)으로 승격 되었으며,

 

 

 

 

1702년(숙종 28)에는 각성의 뜻을 이어받은 성능(性能)이 장륙전을 중건 하였는데,

숙종은 이를 각황전(覺皇殿)이라 사액(賜額)하고 선교양종대가람(禪敎兩宗大伽藍)으로 격을 높였으며,

이후에도 부분적인 보수가 계속 이루어졌지만 대규모의 중수는 없었다가,

1757년(영조 33) 대웅전을 중수 하였고 1769년에는 각황전을 중수 했으며,

1798년(정조 22)과 1827년(순조 27)에 각각 적조당과 보제루를 중수 하였으며,

1977년에는 각황전 해체보수를 완료했으며,

1984년부터 만월당·일주문을 세웠고 1989년 원융료·청풍당을 짓고 연기암을 복원 했습니다.

 

 

 

 

금강문 앞에는 오른쪽에 "벽암국일도대선사비(華嚴寺碧巖大禪師碑)"가 있어,

1663년(현종 4) 세운 비석으로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 1575∼1660년)의 비(碑)로,

벽암선사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비석으로,

비석은 거북받침돌, 비몸, 머릿돌을 제대로 갖추고 있는 전통적인 탑비의 형식을 갖추고 있으며,

비문은 당시 영의정이었던 이경석이 글을 짓고 형조판서를 지낸 오준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금강문을 지나면 다시 천왕문이 저만치 보이고,

 

 

 

 

오른쪽에는 홍매화가 한그루 만개해 있어,

추억의 기념으로 사진을 남기는 모습이 들어오고,

 

 

 

 

천왕문(天王門)의 사천왕상은 화엄사 중창의 주역인 벽암 각성(碧巖 覺性)이,

나라를 지키고 백성을 보호 하겠다는 염원을 담아 조성 하였다고 하며,

 

 

 

 

천왕문(天王門)에는 목각 사천왕상(木刻四天王像)을 안치하였는데,

지국천왕(持國天王)은 비파(琵琶)를 들고 동쪽에 있고,

보검(寶劒)을 들고 있는 증장천왕(增長天王)은 남쪽을 수호 하고 있으며,

 

 

 

 

서쪽의 광목천왕(廣目天王)의 손에는 용과 여의주(如意珠) 또는 견색(絹索; 새끼줄)으로,

북쪽의 다문천왕(多聞天王)은 보탑(寶塔)을 받쳐든 모습을 하고 있어,

불법을 수호하고 부처님의 세계를 지키는 사천왕(四天王)들은 불교경전에 나타나는 인도 재래의 신(神)인데,

불교의 수호신이 되어서 사방을 지키게 된 것이라 합니다.

 

 

 

 

화엄종의 중심사찰이 되었던 이 절에는 창건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많은 고승들이 머물면서 창사의 이념인 화엄사상의 구현이 이루어져 왔는데,

창건주인 연기조사를 비롯하여,

정행(正行)·낭원(朗圓)·현준(賢俊)·결언(決言)·관혜(觀惠) 등의 화엄학승(華嚴學僧)들이 머물렀고,

 

 

 

 

신라 말 화엄학이 남북악(南北岳)으로 나누어져 대립할 때,

후백제 견훤(甄萱)의 복전(福田)이었던 관혜가,

고려 왕건(王建)의 복전이었던 해인사의 희랑(希朗)과 대립된 학파(學派)를 형성함으로써 이 절이 중요시 되었으며,

 

 

 

 

고려시대에는 의천(義天)이 이 절에 들러 연기조사의 영정(影幀)에 예를 표하고 그를 찬탄하는 시를 남겼으며,

의천의 문도인 정인왕사는 이곳에서 도량을 베풀었고,

 

 

 

 

조선시대에도 이곳에서 많은 고승이 배출 되었는데,

특히, 선수(善修)가 "화엄경"을 강의하여 그 종풍(宗風)을 크게 드날린 뒤,

각성·처능(處能)·수초(守初)·명안(明眼)·새봉(璽峰)·조관(?冠)·윤장(玧藏) 등이 그 뒤를 이어 화엄사상을 펼쳤으며,

 

 

 

 

이들 외에도 해안(海眼)이나,

임진왜란 당시 주지로 절을 수호한 설홍(雪泓)·윤눌(潤訥)을 위시한 많은 고승들이 이 절을 위하여 크게 기여하였고,

근세에는 대강사 진진응(陳震應)이 머무르기도 하였습니다.

 

 

 

 

강당으로 사용되는 보제루(普濟樓)를 지나면,

화엄사의 중요한 당우들이 있어,

 

 

 

 

정면으로는 동서 쌍탑(雙塔)의 동탑과 대웅전이 있고,

 

 

 

 

마당에는 동서 쌍탑(雙塔)이 있어,

보물 제132호인 "구례화엄사 동 오층석탑(求禮 華嚴寺 東 五層石塔)"으로,

화엄사 경내 대웅전 앞마당 동쪽에 있는데,

재질은 화강암으로 단층기단에 오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지닌 석탑으로,

탑은 대웅전 석단 하단에 마련된 마당에 서오층석탑(보물 제133호)과 나란히 서 있으나,

세부 형태나 배치 위치로 볼 때 서로 다른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데,

석탑의 건립시기도 9세기 말에서 10세기 초로 추정되고 있으며,

 

 

 

 

기단과 탑신의 결구방식이 신라 석탑의 양식을 따르고 있으면서도,

백제계 석탑양식이 혼합된 모습을 보이고 있는데,

기단부면석의 구성이나 초층탑신 체감율 등은 신라계 석탑양식을 보이며,

면석과 초층탑신의 결구와 안쏠림, 기단 갑석이 평박한 모습은 백제계 석탑양식을 보이는데,

특히 초층탑신과 기단부에서 사리장엄이 발견되어,

신라 말에서 고려 초에 이르는 석탑의 양식변화와 사리장엄 방식을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탑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보물 제133호인 '구례화엄사 서 오층석탑(求禮 華嚴寺 西 五層石塔)"은,

화엄사 경내 대웅전 앞마당의 서쪽에 있으며,

재질은 화강암으로 이중기단에 오층의 탑신과 상륜부를 지닌 석탑으로,

탑은 대웅전 석단 하단에 마련된 마당에 동 오층석탑(보물 제132호)과 나란히 서 있으나,

동탑과는 달리 이중기단 형식이며 하층기단부터 초층탑신에 걸쳐 조각상이 가득하며,

탑의 양식이나 조각상의 수법으로 볼 때 9세기 말에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으며,

 

 

 

 

구례화엄사 서 오층석탑(求禮 華嚴寺 西 五層石塔)은,

기단부의 점유 면적을 좁히고 오층의 탑신을 지녀 외관상 고준한 느낌이 드는 것이 특징이며,

좁고 높은 기단과 탑신의 외형에서 가파른 체감율을 지니고 있으며,

옥개석 전각에 나타나는 처마 곡선 등에서 단아한 기품을 풍기고 있습니다.

 

 

 

 

탑의 앞면에는 장방형의 배례석이 남아 있는데,

상면에 3구의 연잎을 고부조로 새겼으며 측면에는 안상이 있으며,

 

 

 

 

탑의 기단부는 상하층 2단으로 되어 있어,

상층기단 갑석은 남북으로 이음이 있는 2매의 판석으로 올렸는데,

하단에는 부연이 있고 상면 중앙에는 2단의 각형받침을 각출하여 초층탑신을 받치고 있으며,

각 면석에는 탱주를 중심으로 좌우 1구씩, 4면 8구의 팔부중상을 입상으로 새겼고,

 

 

 

 

탑신부는 오층으로 탑신석과 옥개석이 각각 1매로 되어 있어,

탑신부는 모두 모서리에 우주를 새겼으며,

초층탑신의 경우 면석에 각 면 1구씩 사천왕상을 조각 하였는데,

사천왕상은 창이나 검을 쥐고 있으며 북쪽 다문천왕은 왼손에 보탑을 쥐고 있습니다.

 

 

 

 

대웅전 앞에는 조성한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쾌불지주가 있는데,

당간지주와는 조금 다른 용도로 쾌불을 걸기위한 기둥을 세우기 위한 대형 지주가 3기가 있으며,

 

 

 

 

보물 제299호로 지정된 " 구례 화엄사 대웅전(求禮 華嚴寺 大雄殿)"으로,

대웅전은 화엄사의 건물 중 각황전(국보 제67호) 다음으로 큰 건물이며,

8세기에 창건하여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36년에 벽암(碧巖)대사가 중건 했다고 하며,

 

 

 

 

대웅전에는 삼신불(三神佛)인 비로자나불, 노사나불, 석가모니불을 모셨는데,

비로자나불은 불멸의 원리를 상징하기 때문에 법신불(法身佛)이라 하며,

노사나불은 보살로 있으면서 서원을 세우고 수행을 거듭한 결과,

그 공덕으로 깨달음을 얻은 부처이기 때문에 보신불(報身佛)이라고 하며,

석가모니불은 현실 세계에 나타나 중생을 교화한 부처이기 때문에 화신불(化身佛)이라고 하며,

불상 뒤에는 보물 제1363호인 "화엄사 대웅전 삼신불탱(華嚴寺 大雄殿 三身佛幀)이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은 정면 5칸에 측면 3칸의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단 위에 남향으로 세워 졌는데,

기둥은 배흘림으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했으며 기둥 위와 사이에는 공포가 짜여져 있는 다포계 형식이며,

규모도 크고 아름다우며 건축 형식의 특징과 균형이 잘 잡혀있는 건물 입니다.

 

 

 

 

대웅전의 동편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있어,

화엄사의 명부전은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가 조선 중기인 1630년에 다시 재건한 것으로,

규모는 1단의 장대석 기단위에 정면 5칸, 측면 3칸의 규모로,

기둥 위에만 공포를 설치한 주심포계에 맞배지붕을 올렸으며,

 

 

 

 

법당 내부에는 지장보살좌상이 봉안되어 있으며,

좌우에도명존자와 무독귀왕을 협시로 봉안하며,

죽은 자의 죄를 심판하는 염라대왕 등 10명의 시왕상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대웅전의 서편에는 정면 5칸의 맞배지붕의 "영전(影殿)"이 있어,

영전은 응향각(凝香閣)의 중노전(中爐殿)으로 대웅전, 나한전의 소임을 맡은 스님이 거주했던 전각 이었는데,

영전으로 바뀌었으며,

 

 

 

 

영전(影殿)에는 화엄사를 창건한 연기조사(緣起祖師)를 비롯하여,

자장율사와 원효성사, 의상조사, 도선국사등 화엄사의 역대조사를 비롯하여,

화엄사에서 주석하셨던 선사와 대사 분들의 영정(影幀)을 모시고 있습니다

 

 

 

 

영정 옆에는 원통전(圓通殿)이 있어,

조선 숙종29년(1703) 계파선사께서 중건했고 1978년에 명선스님이 해체중수 했으며,

1997년에 종열스님이 관세음보살상을 개금 하였으며 2006년 10월 종삼스님 기와번와를 하였으며,

 

 

 

 

원통전(圓通殿)의 편액은 정조23년(1799)에,

조선후기에 공조판서, 한성부판윤, 판중추부사 등을 역임한 문신인 조종현(趙宗鉉,1731~1800)의 글씨이며,

 

 

 

 

원통전에는 관세음보살님, 칠성, 독성, 산신이 모셔져 있는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크고 넓고 자비로운 덕이 있으신 분으로,

극락세계에서 아미타 부처님을 도우시는 분으로,

세상의 모든 곳에 나타나 형편을 살피고 모든 이들을 괴로움과 어려움에서 구해 주시는 분으로,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 이라고도 합니다.

 

 

 

 

원통전의 서편 안쪽에는 나한전(羅漢殿)이 있어,

당청을 하지 않은 나한전(羅漢殿)은 인조10년(1632)에 벽암선사께서 중건 하였는데,

정조조(正祖朝)에 화재로 소실된후 정조19년(1795)에 담인(曇仁)선사가 중건했고,

1984년 도광스님이 하얀나한상을 개채(改彩)를 했으며,

2005년에 명섭스님이 새로 후불탱화와 십육나한탱화를 조성과 주련을 달았으며,

 

 

 

 

나한전(羅漢殿)에는 부처님의 제자인 16분의 아라한(阿羅漢)을 모셨으며,

응진전(應眞殿)이라고도 합니다.

 

 

 

 

나한전 앞에는 "흑매(黑梅)"라고도 불리는,

장육화(丈六花)로 명명 되어있는 화엄사 홍매화(紅梅花)가 있어,

조선 숙종 때 각황전을 중건하고 기념하기 위해 계파선사께서 심었다는 홍매로,

봄철에 화엄사를 찾는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으며 우리나라 고매(古梅) 중 가장 색이 붉은 홍매입니다.

 

 

 

 

국보 제67호인 화엄사 각황전(華嚴寺 覺皇殿)으로,

670년 의상법사가 건립한 3층 장륙전으로 장륙존상을 봉안했으며,

사방 벽은 화엄석경으로 장엄되어 있었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99~1702년에 성능대사가 중건 했으며,

193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 중수 되었는데,

 

 

 

 

각황전(覺皇殿)은 정면 7칸에 측면 5칸의 중층 팔작지붕 건물로 높은 석조 기단 위에 세워 졌으며,

기둥은 평주이며 기둥머리 위에 창방과 평방이 놓여 있고,

평방 위와 기둥 사이에 공포를 짜올린 다포계이며 상하층 모두 내외2출목으로 되어 있으며,

1층 앞면에는 살문을 달고 옆면·뒷면은 일부만 벽으로 막았는데 2층은 사방에 작은 창을 달았고,

천장은 우물천장이고 그 주위에 경사진 빗반자가 있으며,

 

 

 

 

각황전(覺皇殿)의 대불단 위에는 석가불·아미타불·다보불(多寶佛)이 있고,

그 좌우에 보현보살과 문수보살 그리고 관음보살과 지적보살(知積菩薩)이 있으며,

이 불상과 보살상들은 3m가 넘는 거대한 불상으로,

도금불사 때 발견된 복장기(腹藏記)에 의해 1703년(숙종 29)에 조성 되었음이 확인 되었으며,

또한 불단 밑에는 임진왜란 때 파손된 1,500여 점의 석경이 봉안되어 있습니다.

 

 

 

 

각황전과 원통전이 마주하는곳에는,

보물 제300호인 "구례 화엄사 원통전 앞 사자탑(求禮 華嚴寺 圓通殿 앞 獅子塔)"가 있어,

높이 3m의 크기로 "노주(露柱)"라고도 불리는 석탑 모양의 석조물로,

길쭉하고 네모난 윗받침돌의 덮개돌을 4마리의 사자가 받치고 있어서 "사자탑"으로 부르는데,

부처의 사리를 모셔놓은 것이라 하기도 하고 불가의 공양대(拱養臺)로 쓰였을 것이라고도 추정하는데,

 

 

 

 

탑의 형태는 2층 기단 위에 탑신을 올린 모습으로,

여러 장의 장대석으로 짜여진 직사각형의 받침돌 위에 기단부가 놓였고,

아래층 기단은 무늬 없는 석재로 구성 되었으며,

위층 기단은 각 모서리에 사자상을 놓은 모습이며,

사자들은 연꽃받침 위에 앉아 연꽃이 조각된 돌을 머리에 이고 있고,

탑신에는 직육면체 모양의 몸돌이 놓여 있는데,

몸돌의 각 면에는 직사각형의 테두리를 두르고 그 안에 신장상을 1구씩 얕게 조각 했으며,

위층기단을 4마리의 사자를 이용해 만든 것은,

구례 화엄사 4사자 3층석탑(국보 제35호)을 모방한 것으로 보이나,

조각기법이 그보다 뒤떨어지는 것으로 보아 9세기에 건조된 것으로 여겨집니다.

 

 

 

 

왼쪽에는 구례 화엄사 각황전 앞 석등(求禮 華嚴寺 覺皇殿 앞 石燈)이 있어,

국보 제12호로 지정 되었으며,

우리나라에 남아 있는 석등 가운데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석등으로,

중대석을 장구 형태로 만든 고복형(鼓腹形) 석등으로,

전체적 규모에 있어 장중하면서도 세부 조각이 뛰어나 9세기 통일신라 석조미술을 대표하는 작품이며,

기단부와 화사석 및 지붕과 상륜부가 완벽하게 남아있어 완성미를 더하고 있으며,

 

 

 

 

이 석등은 9세기 통일신라 석조미술에서 자주 등장하는,

안상과 귀꽃 등을 적절히 배치되어 화려함을 더하고 있으며,

간주석이 장구 모양으로 되어 안정감을 느낄 수 있는데,

반면 화사석은 별다른 문양이나 장식을 하지 않아 전체적으로는 크기에 걸맞는 위풍당당한 위용을 보이며,

세부의 조각 수법도 정교하여 신라 석등의 백미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각항전에서 나와,

국보 제35호인 "구례 화엄사 사사자 삼층석탑(求禮 華嚴寺 四獅子 三層石塔)"을 보러 하였으나,

 

 

 

 

화엄사를 대표할만한 문화재인 사사자 삼층석탑(四獅子 三層石塔)은 보수작업중여서,

아쉽게도 보지못하고 발걸음을 돌려야만 합니다.

 

 

 

 

지리산에 산재해 있는 수많은 사찰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며 으뜸으로 자리하고 있는 사찰로,

국보를 비롯하여 보물등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사찰이며,

홍매화가 피어나면 더욱 많은 이들이 고매(古梅)를 찾아 오는 곳으로,

전남 구례의 고찰인 "화엄사(華嚴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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