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것을 들려주는 정자와 누각/영남권

배롱나무꽃이 아름다운 정자, 거창의 소진정(遡眞亭)

겨울섬. 2021. 4. 3. 02:00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구사리 1036-1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거창 소진정 (居昌 遡眞亭)"입니다.

 

거창 소진정 (居昌 遡眞亭)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624호로 지정 되었으며,

정자의 주변에는 배롱나무가 많아 배롱나무꽃이 아름다운 곳으로,

 

 

 

 

소진정(溯眞亭)은 조선 명종 때의 문신인 도희령(都希齡,1539~1566)을 기리는 정자로,

후손들이 1920년에 포연대(鋪淵臺) 언덕 위에 건립한 정자라 하며,

 

 

 

 

도희령(都希齡)은 홍문관 저작을 역임하였으며,

귀향하여 남명 조식(南冥 曺植 1501~1572) 등과 교유하였는데,

조식이 1549년 8월초에 이곳에 와서 소진정 아래 부소연(가매소)에서 목욕하며,

"욕천(浴川)"이라는 칠언절구의 시를 남겼으며,

 

 

 

 

소진정(遡眞亭)의 현판으로,

후손들은 도희령을 기려 그의 시 속에 있는 말을 따서 정자의 이름을 "소진정(遡眞亭)"이라 하였습니다.

 

 

 

 

정자는 경사진 대지에 순응하여,

제각기 다른 기둥으로 비스듬이 자리한 위치에 맞추어 세웠으며,

 

 

 

 

소진정은 누각형태의 정자로,

정면 3칸, 측면 2칸이며 난간은 계자난간에 지붕은 팔작지붕의 형태를 갖추고 있으며,

추운 겨울에도 이용할 수 있도록 정자 내부에도 방을 두었는데,

방은 미닫이문을 이용하여 두 칸의 방으로 쓸 수 있게 하였으며,

 

 

 

 

너른 마루쪽으로는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방에서 내러다 보이는데 확장성을 더 하였고,

 

 

 

 

두칸의 온돌방은 나란이 연이어 있는데,

 

 

 

 

온돌방의 내부의 모습으로,

2개의 방은 미딛이 문을 제거하면 넓게 사용할수 있도록 해 두었고,

 

 

 

 

정자의 마루위에는 월회당(月會堂)의 현판이 있고,

 

 

 

 

원운(原韻)의 시판(詩板)이 편액되어 있고,

 

 

 

 

후손 등이 남긴 차운(次韻)의 시들이 편액(扁額)들이 있으며,

 

 

 

 

월회당기(月會堂記)의 기문 편액이 있고,

 

 

 

 

정자의 내력을 알려주는 "소진정기(溯眞亭記)"의 기문(記文) 이 있습니다.

 

 

 

 

도희령(都希齡)은 1548년(명종 3년) 어머니 삼년상을 치르고 상복을 벗었는데,

처가인 김해에서 합천군 삼가면 토동으로 돌아와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사 (雷龍舍)를 짓고 후학들을 가르쳤으며,

이듬해 추석이 막 지날 때 제자들과 거창 감악산을 유람 했는데,

그가 감악산을 오른다는 소식에 인근 함양 선비인 임희무와 박승원 등 여러 사람이 찾아와 함께 했으며,

그는 산에서 내려와 감악산 골짜기를 흐르는 물이 바위에 부딪혀 소용돌이 치는 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고 목욕했다고 하며,

 

 

 

 

남명 조식(南冥 曺植)의 시 "욕천(浴川)"이 전하고 있어,

全身四十年前累(전신사십년전루) 온 몸에 쌓인 사십년 허물은

千斛淸淵洗盡休(천곡청연세진휴) 천 석 맑은 물에 모두 씻어버리네

塵土倘能生五內(진토당능생오내) 티끌이 만약 오장에 생겨 있다면

直今刳腹付歸流(직금고복부귀류) 지금 바로 배를 갈라 저 물에 띄어 보내리

남명 조식이 소진정 아래 감악산 계곡 포연(鋪淵)에서,

목욕을 하고 지은 시로 몸과 마음을 깨끗히 하겠다는 의지를 볼수있습니다.

 

 

 

 

정자에서 보면 언덕아래에 커다란 바위가 있어,

 

 

 

 

정자에서 내려와 가까이 가보니,

경지를 조망 할수있는 자리가 있으며,

 

 

 

 

바위에는 포연대(鋪淵臺)가 암각되어 있어,

이곳 아래에서 남명 조식이 목욕한곳 임을 알수 있습니다.

 

 

 

 

도희령(都希齡)은 퇴계 이황(1501~1570)과 더불어 영남권 대표 선비로,

벼슬에 나가지 않고 평생 초야에서 학문을 닦고 제자를 양성 했으며,

조정에서도 그를 몇 차례 중앙에 불렀으나,

그 때마다 거절하고 오히려 중앙정치에 대한 비판과 직언을 아끼지 않았으며,

학문적으로는 내외의 경의(敬義)를 중시 하였는데,

성리학의 이론적 심화를 중시한 동갑내기 퇴계 이황과는 달리,

그는 학문적 실천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학풍을 보였습니다.

 

 

 

 

소진정 바로 아래에는 도희령의 후손인 우재 도재균이,

소진정을 세우고 4년 후인 1924년에 지은 임청정(臨淸亭)이 있어 함께 돌아볼만 하며,

도희령(都希齡)의 생을 되돌아 볼수있고,

여름의 배롱나무꽃이 아름다운 곳으로 거창의 정자인 소진정(遡眞亭)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