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사찰/영남지역

창녕을 대표하는 사찰, 관룡사(觀龍寺)

겨울섬. 2021. 4. 5. 17:45

경상남도 창녕군 창녕읍 옥천리의,

구룡산 중턱에 있는 사찰인 "관룡사(觀龍寺)"입니다.

 

창녕 관룡사(觀龍寺)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의 말사이며,

 

 

 

 

관룡사(觀龍寺)로 향하는 길에는 벚꽃이 절정에 달해 있으며,

 

 

 

 

관룡사로 가는 오솔길에는 한 쌍의 돌장승이 길의 양쪽에 서 있어,

경상남도 민속문화재 제6호인 "창녕 관룡사 석장승(昌寧 觀龍寺 石長丞)"으로,

사찰 입구에 두는 장승은 절의 경계를 표시하는 역할과 더불어 잡귀의 출입을 막고,

풍수지리적으로 허한 곳의 기운을 불어넣는 등의 기능을 하게 되는데,

이곳의 장승은 사찰의 경계표시·수문장의 역할과 함께 마을 사람들에 의해 그들의 수호신이 되고 있으며,

 

 

 

 

왼쪽에 있는 남장승은 높이 220cm 둘레 70cm의 크기로,

상투를 얹은 듯한 둥근 머리에 관모를 쓰고 있는데,

툭 튀어 나온 커다란 눈, 콧구멍이 뚫려있는 주먹코가 특이하며,

콧잔등에는 두 개의 주름을 새겨 놓았고 꼭 다문 입술 사이로 송곳니 두개가 뻗어 나와 있으며,

오른쪽의 여장승은 높이 250cm, 둘레 80cm로,

사다리꼴 모양의 받침돌 위에 구멍을 파서 세웠고,

상투모양이 조각되어 있지만 남장승과는 달리 관모가 없으며,

두 장승 모두 몸체에는 아무런 글귀가 없으며 육중한 몸매로 인해 전체적으로 안정감을 주고 있습니다.

 

 

 

 

주차장에 차량을 두고 돌계단을 오르면,

마치 산성의 일부 인듯 석문을 지나가게 되고,

 

 

 

 

석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에 서로 다른 시기에 세운듯한,

공덕비(功德碑)를 비롯한 4기의 비석이 있어,

 

 

 

 

관룡사(觀龍寺)신라시대 8대 사찰 중의 하나로서,

많은 문화재와 경치 좋은 사찰로 널리 알려진 곳으로,

신라시대부터 있었다는 사찰로서 "사기(寺記)"에 의하면 349년에 창건되었다고 하지만 확실하지 않으며,

삼국통일 뒤에는 원효(元曉)가 1,000명의 중국 승려에게 "화엄경"을 설법하고 대도량을 이룩 하였는데,

 

 

 

 

전설에 의하면 원효(元曉)가 제자 송파(松坡)와 함께 이곳에서 100일기도를 드릴 때,

갑자기 오색채운이 영롱한 하늘을 향해서 화왕산(火旺山) 마루의 월영삼지(月影三池)로부터,

아홉 마리의 용이 등천하는 것을 보고 절 이름을 관룡사라 하고 산 이름을 구룡산이라 하였다고 합니다.

 

 

 

 

관룡사는 748년(경덕왕 7) 추담(秋潭)이 중건하였고,

1401년(태종 1) 중건했으며 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17년(광해군 9) 영운이 재건하였고,

1704년(숙종 30) 가을 대홍수로 금당(金堂)과 부도 등이 유실되고 승려 20여 인이 익사하는 참변을 당한 뒤,

1712년에 대웅전과 기타 당우들을 재건 하였으며,

그 뒤 1749년(영조 25)의 부분적인 보수를 거쳐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계단을 올라 경내로 들어서면,

왼쪽에 범종루(梵鍾樓)가 자리해 있고,

 

 

 

 

오른쪽에는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140호인 "창녕 관룡사 원음각(昌寧 觀龍寺 圓音閣)"이 있어,

사찰의 누각인 "원음각(圓音閣)"은 조선 인조 12년(1634)에 세웠으며,

그 이후 역사는 알 수 없지만 건물에서 발견한 기록을 보면 영조 39년(1763)에 다시 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원음각은 대성전을 중심축으로 약간 서쪽으로 기울여 세운 것이 특징입니다.

 

 

 

 

원음각의 안쪽에는 약사전(藥師殿)이 자리하고 있고,

약사전 앞마당에는 큼직한 대좌 위에 3층석탑이 있어,

경상남도의 유형문화재 제11호인 "창녕 관룡사 약사전 삼층석탑(昌寧 觀龍寺 藥師殿 三層石塔)'이며,

 

 

 

 

석탑은 커다란 바위를 바닥돌 삼아,

2층 기단(基壇) 위에 3층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며,

아래층 기단의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는 기둥모양을 조각했고,

가운데기둥 양 옆으로 얇고 넓직하게 안상(眼象)을 새겼는데,

위층 기단 역시 네 모서리와 면의 가운데에 기둥모양을 새겼으며,

탑신부는 1층 지붕돌이 파손이 심한 편이며 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한 개씩의 돌로 쌓아 올렸고,

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3단으로 간략화 되었는데,

규모도 작아졌고 각 부분의 양식이 간략해진 모습으로 보아 고려 전기에 만든 작품으로 보입니다.

 

 

 

 

"창녕 관룡사 약사전(昌寧 觀龍寺 藥師殿)"은 보물 제146호이며,

관룡사는 임진왜란 때 이곳 약사전만 남기고 다른 건물들은 모두 불에 타버렸다고 하는데,

약사전은 조선 전기의 건물로 추정하며,


규모는 앞면 1칸에 옆면 1칸으로 맞배지붕의 매우 작은 불당으로,

지붕 처마를 받치기 위해 장식하여 짜은 간결한 형태는 기둥 위에만 있는 주심포 양식이며,

옆면 지붕이 크기에 비해 길게 뻗어 나왔는데도 무게와 균형을 잘 이루고 있어 건물에 안정감을 주고 있고,

단칸 법당 안에는중생의 병을 고쳐 준다는 약사여래를 모시고 있으며 좌우 벽체에 벽화를 그려 장식 했으며,

상량문에는 1507년(중종 2년)에 다시 지어졌고 1609년에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어,

몇 안되는 조선 전기 건축 양식의 특징을 잘 보존하고 있는 건물로,

작은 규모에도 짜임새가 훌륭한 전각 입니다.

 

 

 

 

약사전에는 보물 제519호로 "관룡사 석불좌상"으로도 불리는,

"창녕 관룡사 석조여래좌상 (昌寧 觀龍寺 石造如來坐像)"이 모셔져 있어,

불상의 높이는 110cm로 삼단의 8각연화대좌 위에 앉은 좌상으로 광배는 전하지 않으며,

 

 

 

 

오른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에 편안히 내려놓고 있고,

왼손은 손바닥을 위로 한 채 놓여 있는데 무엇인가를 받쳐든 듯한 특이한 모습을 취하고 있어,

통일 신라 시대의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 여래 좌상"을 본떠 만든 것으로,

머리 가운데에 있는 반달 문양은 고려 시대의 불상 형식을 따랐습니다.

 

 

 

 

약사전 앞에 있는 담장 너머에는,

보기힘든 능수벚꽃이 환하게 피어올라 있어,

 

 

 

 

가지를 늘어뜨린 능수화가 찾은이들의 시선을 사로 잡고 있으며,

 

 

 

 

원음각을 지나면 너른 마당과 함께 관룡사의 전각들을 만날수 있는데,

 

 

 

 

사찰의 중심건물로 금당인 "관룡사대웅전(觀龍寺 大雄殿)"으로,

보물 제212호로 지정 되었으며,

겹처마에 팔작지붕으로 앞면과 옆면이 모두 3칸인 다포 계통의 건물로,

정면 중앙칸이 넓어서 좌우로 안정된 구조를 보여 주는데,

내부의 중앙 뒷줄에 세운 2개의 고주에 의지해 불단을 설치하고 그 위에 닫집을 가설했으며,

내외이출목으로 출목 바로 위에 있는 살미첨차의 끝이 삼각형을 이루고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의 내부에는 보물 제1730호인,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및 대좌(昌寧 觀龍寺 木造釋迦如來三佛坐像 ─ 臺座)"가 있어,

창녕 관룡사 목조석가여래삼불상은,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좌우에 약사여래와 아미타여래로 이루어진 삼세불이며,

삼불 중 석가여래상 대좌 윗면 묵서에는 조각 승려, 불상 조성에 소임을 맡은 승려와 제작시기를 기록하고 있는데,

1629년에 조성하기 시작하여 1630년에 완성 하였으며,

수화승 현진을 비롯하여 승일(勝一), 천민(天敏), 수영(守英), 탄행(坦行), 철의(哲義) 등이 제작에 동참 하였으며,

 

 

 

 

목조석가여래삼존상은 안정적인 신체비례에,

넓적하고 볼살이 오른 얼굴에 어린아이 같은 천진한 표정과,

단순하면서도 힘이 느껴지는 옷주름 표현 등이 특징인데,

중앙에 위치한 석가여래상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을 취하고 변형 편단우견식 대의를 입었으며,

좌우 약사여래상과 아미타여래상은 한 손은 가슴위에 올리고 다른 손은 무릎 위에 놓고,

엄지와 중지를 맞댄 수인에 통견식 대의를 입었습니다.

 

 

 

 

대웅전(大雄殿) 쇠서(牛舌)의 곡선은 짧고 견실하며,

내부에서는 대들보를 받은 공포의 제일 앞부분만 보아지의 형태로 변해 있는데,

이와 같은 것은 조선 중기 이전의 공포에서 보이는 특징들이며,

1965년 해체복원공사 때 중앙칸 마루도리에서 상량문이 발견되어,

1401년(태종 1) 창건되었고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1617년(광해군 9) 재건 했으며,

1749년(영조 25)에 다시 중창 했음을 알 수 있으며,

 

 

 

 

대웅전의 벽면 옆에는 옛날 사찰의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나무로 만든 구시통으로도 불리던 대형 "구유(氍毹)"가 있어,

구유는 많은 대중들의 밥을 퍼두는 함지통이라 할 수 있는데,

본시 구유는 아름드리 통나무속을 파내고 마소의 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인데,

많은 신도들이 운집하느 법회나 대작불사를 회향할때와 유사시 승병들의 밥을 퍼두던 용기로 발전 하였습니다.

 

 

 

 

대웅전의 옆에는 정면 3칸에 측면 1칸의 맞배지붕 구조의 "칠성각(七星閣)"이 있어,

 

 

 

 

칠성각(七星閣) 인간의 수명장수와 재물을 관장하는 칠성신을 모시는 사찰 전각으로,

칠성은 본래 도교에서 신앙하던 것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기우·장수·재물을 비는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았는데,

칠성신 신앙이 불교에 수용되어 사찰 안에 칠성각을 짓고 칠성신을 모시게 되었으며,

이는 우리나라의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한 경우이며,

 

 

 

 

칠성각 뒤편에는 2개의 전각이 나란이 서있어,

 

 

 

 

응진전(應眞殿)은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한 전각으로,

 

 

 

 

부처님의 제자로 지혜와 신통이 뛰어난 열여섯분(16분)의 아라한인 십육 나한을 모신 전각이며,

중앙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을 그리고 좌, 우측에 8 분씩 나한상을 모십니다.

 

 

 

 

응진전 옆에는 작고 아담한 규모인 산령각이 있어,

산신각(山神閣)으로도 불리는 전각으로,

사찰에서 산신을 봉안하는 한국 사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보여주는 곳으로,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畵)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하는데,

 

 

 

 

산신신앙은 원래의 불전(佛典) 안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으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차 나타나기 시작한 산신각은,

하근기(下根機)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대웅전의 오른쪽에는 명부전(冥府殿)이 있어,

명부전(冥府殿) 죽은 사람이 간다는 저승의 유명계(幽冥界)를 상징하는 사찰 당우로,

지장보살을 중심으로 해서 시왕을 모시기 때문에 지장전(地藏殿) 또는 시왕전(十王殿)이라고도 하며,

 

 

 

 

명부전 내부에 봉안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576호인,

창녕 관룡사 명부전 목조지장보살삼존상 및 시왕상 일괄(昌寧 觀龍寺 冥府殿 木造地藏菩薩三尊像 및 十王像 一括)으로,

명부전에는 주존불인 목조지장보살좌상을 중심으로 좌우에 도명존자상과 무독귀왕상이 서 있으며,

 

 

 

 

시왕상, 판관상, 귀왕상, 인왕상 2구 등 모두 17구가 서로 대칭을 이루며 봉안되어 있는데,

이 가운데 무독귀왕입상과 제8평등대왕상에서 나온 원문에 의하면 명부전 존상은 모두 효종3년(1652)에,

응혜(應惠), 계찬(戒贊), 밀운(密云), 인계(印戒), 축한(笁閑), 해기(海機), 사민(思敏) 등,

9명의 조각승에 의해 조성되어 관룡사에 봉안 되었음을 알 수 있으며,

 

 

 

 

관룡사 명부전 지장시왕상과 권속은 긴 신체비례에 방형의 얼굴 그리고 간결한 옷주름 등이 특징이며,

이 지장시왕상과 권속일괄은 봉안처와 조성시기 조각승이 명확하여,

17세기 명부전 존상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고 있습니다.

 

 

 

 

명부전을 나오면 전각옆에 있는 너럭바위에는,

사람을 무서워 하지도 않는 노령으로 보이는 개 한마리가 편하게 쉬고 있고,

 

 

 

 

바위 옆에는 용선대로 가는 안내표지가 있어,

 

 

 

 

종무소가 있는 안양료의 담장을 따라 길을 나서 보면,

 

 

 

 

500m의 산길은 그리 멀지 않으며 험하지 않아 트레킹 정도의 수준이며,

 

 

 

 

용선대로 가는 길 옆에는 무슨 심사가 틀렸는지,

몸통을 비비 꼬아서 자라고 있는 소나무도 만날수 있고,

 

 

 

 

마침내 용선대(龍船臺)가 저만치에 들어옵니다.

 

 

 

 

시원한 전망이 있는 용선대에 자리한 보물 제295호인,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昌寧 觀龍寺 龍船臺 石造如來坐像)"으로,

 

 

 

 

불상의 높이는 188cm이고 대좌의 높이는 136cm로,

높은 대좌 위에 항마촉지인을 한 좌상으로 광배는 없어 졌으며,

약사전에 봉안된 석불좌상과 달리 통일신라 불상양식을 보여주는 불상입니다.

 

 

 

 

나발의 머리에 낮은 육계가 있으며,

양감이 적당히 표현된 각이 진 얼굴은 단정한 인상을 주는데,

길게 옆으로 찢어진 눈썹과 눈, 오똑한 코의 표현 등에서 신라불상의 특징을 찾아볼 수 있으며,

 

 

 

 

불신은 풍만하고 안정감이 있지만 어깨가 좁고 결가부좌한 다리가 경직되게 표현되어,

석굴암 본존상에서 보이던 당당함이 많이 감소 되었으며,

법의는 통견으로 평행한 옷주름이 도식적으로 처리되고 있어 조성시기가 다소 내려감을 알 수 있는데,

 

 

 

 

대좌는 3단으로 반구형의 상대에는 연꽃잎 안에 꽃무늬인 화문(花紋)이 있는 중판 연꽃무늬가 앙련으로 새겨져 있고,

중대는 8각이고, 하대는 4각형의 받침 위에 복련의 중판 연꽃무늬가 조각되어 있어서,

통일신라 후반 대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어서 조성시기는 통일신라 9세기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이곳 용선대(龍船臺) 에서의 경치는 빼어난 풍광을 자랑 하는곳으로,

이곳에서의 일출도 장관이라고 합니다.

 

 

 

 

구룡산의 암벽들이 에워싸듯 감싸고 있는 사찰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어 답사 코스로도 좋은곳 이지만,

이 지역 어디에서도 찾을수 없는 빼어난 풍광을 지닌 곳으로,

경남 창녕의 빼어난 사찰인 "관룡사(觀龍寺)"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