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의 사찰, 비슬산(琵瑟山) 대견사(大見寺)_210421
대구광역시 달성군 유가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통일신라의 제42대 흥덕왕 당시 창건한 사찰인 대견사(大見寺) 입니다.
대견사(大見寺)로 가는길은,
비슬산 자연휴양림을거쳐 등산로를 이용하는 방법과,
비슬산 자연휴양림 공영주차장에 차량을 주차하고,
차량 매표소에서 참꽃 군락지 입구에 있는 사찰인 대견사 입구까지는,
유로로 전기차 또는 셔틀버스를 이용하면 쉽게 오를수 있는데,
비슬산의 진달래가 절정이라고 하는 시기여서 인지,
코로나19로 인해 행사가 취소된 올해도,
평일 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관람객이 찾아 줄을서고 기다려야,
셔틀버스나 전기차를 이용할수 있으며,
비슬산 톱바위 아래의 주차장에 내리면,
영화와 드라마 촬영지로도 이름 났슴을 알리는 안내문이 있고,
주차장에서 비교적 평탄한 길을 300m 남짓 걸으면,
대견사(大見寺)의 입구에 다다르게 되어,
안내문에는 진달래가 절정일 무렵의 대견사(大見寺) 주변의 사진이 있어,
대견사(大見寺)는 설악산의 봉정암과 지리산의 법계사와 더불어,
1,000m이상의 고지에 자리 잡은 사찰 중 한 곳 입니다.
안으로 들어서면 까마득한 절벽위에 서 있는,
대견사지 삼층석탑(大見寺址 三層石塔)이 저 멀리서 보이고,
대견사(大見寺)로 들어가는 앞 마당에는,
"작은 거북바위"의모습을 볼수 있고,
대견사(大見寺) 주위에는 여러가지 이름의 수많은 바위들을 볼수 있는데,
요사채의 지붕너머로는 "층층바위"가 있으며,
대견사(大見寺)의 창건자는 미상이나 신라 흥덕왕 때 창건된 사찰로,
당나라 문종(文宗)이 절을 지을 곳을 찾고 있었는데,
하루는 낯을 씻으려고 떠놓은 대야의 물에 아주 아름다운 경관이 나타났다고 하며,
이곳이 절을 지을 곳이라 생각한 문종은 사신을 파견하여 찾게 하였는데,
결국, 중국에서는 찾을 수 없게 되자 신라로 사람을 보내어 찾아낸 곳이 이 절터라고 하며,
이 터가 대국에서 보였던 절터라 하여 절을 창건한 뒤 "대견사(大見寺)"라 하였다는 전설이 전하며,
창건 이후의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지만,
1416년(태종 16) 2월 29일과 1423년(세종 5) 11월 29일에,
이 절에 있던 장륙관음석상(丈六觀音石像)이 땀을 흘려 조정에 까지 보고 되었고,
종파는 교종(敎宗)에 속하였다고 하며,
절의 폐사에는 빈대와 관련된 일반적인 설화가 전래되고 있으며,
그 시기는 임진왜란 전후로 전해지고 있는데,
그 뒤 1900년에 영친왕의 즉위를 축하하기 위하여 이재인(李在仁)이 중창 하였으나,
1908년 허물어지기 시작하여 1917년 다시 폐허화 되었는데,
2011년 11월 대견사 재건 공사가 착공되어,
2014년 3월 적멸보궁, 요사채, 산신각, 목조와가 등 건물 4동이 완공되어,
이로써 대견사가 폐지된 지 100여년 만에 다시 복원 되었습니다.
대견사(大見寺)의 중심 전각으로 금당인 대견보궁(大見寶宮)으로,
고려말의 건축 양식인 맞배지붕의 주심포 양식으로 최기영 대목장이 건립 하였으며,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시고 있는 적멸보궁(寂滅寶宮)여서,
전각의 명칭도 "대견보궁(大見寶宮)"으로 한듯 하며,
내부에는 적멸보궁(寂滅寶宮)의 전각 이므로 부처님은 모시지 않고,
유리를 통하여 부처님의 진산사리를 모신 적멸보궁(寂滅寶宮)이 있어,
대견사(大見寺)는 천하명당의 전통적인 비보사찰로,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셔놓은 8대 적멸보궁(寂滅寶宮) 가운데 하나라고 하며,
이곳의 진신사리는 서기103년 스리랑카 도와 사원에 봉안 되었다가,
1881년부터 쿠루구데 사원에 모셔진 부처님 진신사리가 대견사에 모셔 졌습니다.
대견보궁 옆에는 맞배지붕의 1칸 규모의 작은 전각이 있어,
산신각(山神閣)은 사찰에서 산신을 봉안하는 한국 사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로,
한국불교의 토착화 과정을 일러주는 좋은 예로,
산신각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畵)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하는데,
산신신앙은 불전(佛典) 안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우리나라에만 있는 특별한 전각 이기도 합니다.
산신각 옆에는 건물의 한쪽에 작은 법당을 차린 관음전(觀音殿)이 있어,
관음전(觀音殿)의 내부에는 태종실록 등에,
이 자리에 있던 장육관세음보살상(丈六觀世音菩薩像)이,
국난이나 홍복이 있을 때 땀을 흘렸다는 기록에 근거해 조성하게 되었는데,
관세음보살(觀世音菩薩)은 불교에서 가장 대중적으로 알려진 보살로,
일반인에게 가장 친숙하며 널리 숭상되며,
세간의 중생이 갖가지 괴로움을 겪을 때 그의 이름을 부르면,
그 음성을 듣고 큰 자비로 중생을 괴로움에서 벗어나게 해주므로 관세음(觀世音)이라고 합니다.
관음전의 뒤편에는 승탑 또는 석등의 하단으로 보이는 연화문의 석물이 있고,
관음전의 뒤에는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바위에는 마애불이 음각되어 있어,
하부에는 연화대좌(蓮華臺座)를 새겼고,
대좌(臺左)의 윗면에 아래가 넓은 5개의 원형을 중복되게 새겨 놓고,
원형의 아래로는 고사리 문양을 대칭되게 새겨 놓아서,
화염문(火焰文)에 휩싸인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처럼 보이는데,
이러한 문양은 연꽃 좌대(座臺) 위에서,
부처가 선정(禪定)에 드는 모습을 수행의 다섯 단계로 그려낸 것으로,
우리나라에 정통 밀교수행법(密敎修行法)이 전래되었음을 말해 주는 유가심인(瑜伽心印)으로,
밀교문양(密敎紋樣)의 존재는 주변의 유가면(瑜伽面), 유가사(瑜伽寺)등의 지명(地名)과 관련지어 볼 때,
비슬산 일대의 밀교(密敎)와의 연관성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라고 합니다.
마애불 옆 틈사이에는 자연동굴이 자리하고 있어,
자연동굴의 내부는 참선의 장소로 추정 되는곳으로,
안으로 들어서면 서너명이 앉을수 있을 정도의 공간이 있고,
좌선굴 또는 도성굴이라고 하는데,
다른 방향으로 나올수 있는 이굴을 통과하면 성공한다는 전설이 있습니다.
대견사(大見寺)의 앞마당 끝에는,
대구광역시 시도유형문화재 제42호인 "대견사지 삼층석탑(大見寺址 三層石塔)"이 있어,
석탑의 전면에는 배례석(拜禮石)으로 추정되는 장방형의 석재가 남아 있고,
비슬산 중턱의 옛 절터에 남아 있는 탑으로,
높이 3.67m의 크기로 자연암벽 위에 기단(基壇) 위에 3층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으로,
절내의 여러 석재들과 더불어 쓰러져 있던 것을 1988년에 겨우 복원한 것이며,
일반적인 탑과 달리 절벽의 높은 바위를 바닥돌 삼아 그 위로 기단과 탑신을 올려 놓았는데,
전체적으로 완전한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하나의 석재로 구성된 하층기단의 각 면에는,
양 우주(隅柱 : 모서리기둥)와 1개의 탱주(撑柱 : 받침기둥)를 새겼는데,
상면에는 호각형(弧角形) 2단의 받침을 조출하여 상층기단을 받고 있으며,
상층기단에는 양 우주만이 새겨졌고,
상면에는 하나의 석재로 조성된 상층기단 갑석(甲石)이 놓여 있으며,
갑석의 하면에는 각형 1단의 부연(副椽)이 있고,
상면에는 조출된 각형 2단 받침이 초층탑신을 받고 있으며,
탑신석과 옥개석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 되었고,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새겨져 있는데 초층탑신이 2층에 비해 3배 정도 높게 조성되어 있으며,
옥개석은 파손이 심한데 층마다 각형 4단의 옥개받침을 조출 하였고,
낙수면의 경사는 약간 급하게 조성 하였으며,
추녀는 수평을 이루다 전각(轉角)에 이르러 약간 반전되고 있고,
옥개석의 상면에는 각형 2단의 탑신굄대가 조출되어 있으며,
상륜부는 멸실되어 아무것도 남아있지 않습니다.
이 석탑은 9층탑이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전체적인 비례로 보아 본래 3층석탑으로 건립된 것으로 여겨지며,
이 석탑은 산 정상의 암반에 건립되어 넓은 시계가 확보된 점으로 보아,
명산에 절을 세우면 국운이 흥한다는 불교신앙인 산천 비보사상(裨補思想)에 따라 건립된 한 예임을 알 수 있는데,
전체적인 양식으로 보아 고려시대 초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자연동굴 옆에는 위로 오르는 계단이 있어,
계단을 넘어서면 100만㎡에 걸쳐 있는 천상의 화원을 만나게 되는데,
이곳의 진달래 군락지는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전성기에 이 사찰은은 비슬산의 중심사찰이었다고 하며,
산 밑에 있는 소재사(消災寺)는 옛날 이 절의 식량이나 각종 생활용품·의식용품 등을 공급하던 곳이었다고 하며,
현재 이 절의 축대 밑에는 맑은 물이 솟아나는 샘터가 있으며,
가뭄 때면 달성군 사람들이 이곳에 와서 기우제를 지내고 있는 곳으로,
일본의 기를 꺾고 대마도를 끌어당긴다는 속설에 의거 1917년 일제에 의해 강제 폐사 되었다는 사찰 이지만,
이제 다시 복원되어 진달래의 군락과 더불어 많은 이들이 찾는 곳으로,
대구 비슬산(琵瑟山)의 암자와도 같은 사찰인 "대견사(大見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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