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의 암자, 수도암(修道庵)
경상북도 김천시 증산면 수도리에 있는 암자로,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인 청암사(靑巖寺)의 부속 암자인 "수도암(修道庵)"입니다.
수도암(修道庵)은 해발 1,317m의 수도산의 상부에 위치한 도량으로,
옛날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이 도량을 보고 앞으로 무수한 수행인이 나올 것이라 하여,
산과 도량 이름을 각각 수도산, 수도암이라 칭하였다는 데에서 유래 되었으며,
그러나 백여 년 전부터 부처님의 영험과 이적이 많다하여 사람들이 불영산이라고도 부르게 되었습니다.
수도암은 고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 헌안왕 3년(859)에 도선국사(道詵國師)가 수도도량으로 창건 했으며,
도선은 청암사를 창건한 뒤 수도처로서 이 터를 발견하고 기쁨을 감추지 못하여 7일 동안 춤을 추었다고 하며,
그 뒤 이 절은 수도승들의 참선도량으로 그 이름을 떨쳤으나,
6·25전쟁 때 공비 소탕작전을 펼치면서 전소된 뒤 최근 들어 크게 중창 하였으며,
전각은 다시 세운지 오래지 않았으나 경내에 있는 석불상과 석탑,
그리고 지형을 상징한 석물 등도 모두 천여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는 곳으로,
매우 조용하고 한적한 곳여서 암자까지 걸어 오르는 숲이 우거진 오솔길은 아늑한 정취를 느끼게 해주며,
수도암은 암자의 규모를 넘어 작은 사찰로 여길수 있을정도 입니다.
계단을 오르고 다리를 건너서 가장먼저 만나게 된 당우는 나한전(羅漢殿)으로,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의 건물이며,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나한전 이지만 문살이 아름다우며,
나한전(羅漢殿)은 응진전(應眞殿)으로도 불리며,
석가모니의 설법장인 영산회상에서 유래한 전각으로,
중앙에 석가모니불이 모셔져 있고 좌,우로 부처님의 제자인 16나한(羅漢)을 봉안 하는곳으로,
이곳의 부처님과 나한들은 크기가 작아서 인지,
모두 나무와 유리로 된 상자속에 봉안 하였습니다.
계단을 따라 조금 더 오르면,
수도암(修道庵)의 중심 전각인 대적광전(大寂光殿)이 있어,
대적광전은 화엄종의 맥을 계승하는 사찰에서는 주로 이 전각을 본전(本殿)으로 건립하는데,
"화엄경"의 주불(主佛)인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봉안 하는 전각으로,
내부에는 보물 제307호인,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金泉 靑巖寺 修道庵 石造毘盧遮那佛坐像)"이 모셔져 있어,
불상의 높이는 2.51m이고 대좌 높이는 1.19m, 머리 높이는 70cm이며,
청암사 수도암 대적광전에 본존불로 모셔진 불상으로,
진리의 세계를 두루 통솔한다는 비로자나불(毘盧遮那佛)을 형상화한 것으로,
전체적인 모습이나 세부 표현을 볼 때,
통일신라시대에서 고려시대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민머리에는 상투 모양의 머리가 작지만 분명하게 표현 되었고,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은 풍만하며,
가늘게 치켜뜬 긴 눈과 평평한 코, 굳게 다문 작은 입 등에서 근엄한 인상을 풍기는데,
거구이면서도 위축되고 불안정하게 표현된 모습은,
시대적 특성을 반영한 것으로 보이는데,
양 어깨에 걸쳐 입은 옷은 형식적이고 간략하게 표현 되었고,
손은 왼손 검지를 오른손으로 감싸고 있는데 매우 사실적으로 묘사 했으며,
대좌는 상·중·하 3부분으로 구성된 8각 연꽃대좌로,
상대에는 반원형에 가까운 앙련(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2줄로 교차되어 있고,
앞면에 3마리의 사자상과 용머리 같은 것이 새겨져 있습니다.
이곳의 불상은 석굴암 불상보다 80㎝ 작은데,
9세기에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북석리에서 제작하였다고 하며,
당시 이 불상 운반에 골몰하고 있을 때 한 노승이 나타나서 등에 업고 이 절까지 운반 하였는데,
절에 다 와서 칡덩굴에 걸려 넘어졌다고 하며,
당시 노승은 산신령을 불러 크게 꾸짖고 칡덩굴을 모두 없애게 하였는데,
그래서 인지 지금까지도 이 절 근처에는 칡덩굴이 없다고 합니다.
대적광전 앞에는 보물 제297호로 지정되어 있는,
"김천 청암사 수도암 동·서 삼층석탑(金泉 靑巖寺 修道庵 東·西三層石塔)"이 자리하고 있어,
2기의 삼층석탑으로 법당인 대적광전을 사이에 두고 동·서쪽에 서 있는 쌍탑으로,
859년(헌안왕 3)에 도선국사가 세웠다고 전해지는데,
양식이나 조각 수법을 볼 때 통일신라시대 중기 이후에 조성된 것으로 여겨지며,
3층 석탑은 도선이 창건 당시에 이 절터가 마치 옥녀(玉女)가 베를 짜는 모습을 갖추고 있는 지대라 하여,
베틀의 기둥을 상징하는 뜻으로 두 탑을 세웠다고 합니다.
높이 4.25m의 서탑은 2층 기단을 형성하였으며,
2층과 3층의 옥신과 옥개를 잘 유지 하였고,
기단부는 각 면 1석으로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다시 1석으로 된 중석과 갑석 등 4석으로 하층 기단을 형성 하였습니다.
중석 각 면에는 우주와 탱주 1주가 모각 되었고,
갑석 상면에는 가벼운 경사가 있으며, 1단의 각형 굄이 있고,
상층 기단 중석은 각 면 1석씩으로 짜고 우주만을 모각 하였으며,
갑석은 1매 판석으로 덮었으며 부연이 없는 것은 동탑과 같은데,
상면에는 가벼운 경사가 있고 2단의 굄으로 탑신을 받고 있으며,
탑신부는 옥신·옥개석이 각 층 1석이며,
옥개석은 동탑보다 더욱 넓어졌으며 추녀 밑은 직선이며 낙수면의 경사도 완만하며,
낙수면의 곡선 역시 거의 수평에 가깝다가 전각에서 가벼운 반전을 나타냈고,
옥개석받침은 각 층 모두 5단이며, 추녀에서 깊이 들어가 공간을 남겼음이 주목 되는데,
2층의 옥신은 초층에 비하여 현저하게 줄어들었으나 체감률은 온화한 편이며,
초층옥신에는 우주가 모각된 사이로,
각 면 여래좌상 1구씩을 연화대 위에 돋을새김 하였으며,
상륜부는 노반과 보륜, 보주 등이 남아 있습니다.
이 두 탑은 그 형식이 서로 다를 뿐 아니라 탑과 법당과의 거리가 가까운 데 비하여,
두 탑의 거리는 너무 멀어, 본래부터 쌍탑의 형식으로 시설되었다고는 보기 어려우며,
다만 당시의 신앙적 요청에 의하여 서로 상대한 위치이기는 하나,
별개의 장소에 다른 형식으로 건립되었다고 추정 됩니다.
동탑은 높이 3.76m의 크기로 단층 기단을 형성하였는데,
장대석을 놓아 네모난 지대석을 마련하고,
그 위에 각 면 1석으로 중석을 구성 하였으며,
중석의 받침기둥인 탱주(撑柱)의 흔적은 없고 모서리기둥인 우주(隅柱)는 매우 희미하게 표현 되었고,
갑석은 2매의 판석을 동서로 덮었는데 그 밑에는 부연이 없는 것이 특이하며,
상면에는 가벼운 경사가 있고 중앙에는 호형(弧形)과 각형으로 2단의 굄이 있습니다.
탑신부(塔身部)는 옥신(屋身)과 옥개석(屋蓋石)이 각 층 1석이고,
2·3층옥신에는 다른 조각은 없고 차례로 감축된 가운데 우주만을 모각(模刻) 하였으며,
옥개석은 넓은 편이며 전각의 반전은 매우 경미하며,
옥개석받침은 1·2층이 4단, 3층은 3단으로 줄어 들었고,
초층옥신은 위가 좁고 아래가 넓은 4우주를 나타냈으며,
각 면에는 깊이 약 5㎝의 네모난 감실을 마련 하였는데,
감실 안에는 조각이 분명하고 잘 정제된 여래좌상을 각 면 연화좌 위에 부육조(浮肉彫)로 표현 하였고,
상륜부(相輪部)에 작은 갑석형을 이중으로 나타낸 작은 노반과 복발,
그리고 보주 하나가 남아 있습니다.
두 탑의 형식은 옥신과 기단 또는 옥개에서도 차이를 보이는데,
탑의 형태는 가냘픈 점이 있기는 하지만 조각은 단정한 편으로,
그 제작연대는 적광전 내의 석조비로자나불상에 준하여 신라 중기 이후인 9세기 후반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동탑과 서탑 사이에는 창주도선국사비(刱主道詵國師碑)로 불리는 수도암비를 볼수 있어,
아주 오래 되어 보이는 이비석은,
글씨에 몰두해 입신(立神)의 경지에 오른 신라의 명필로 알려진 김생(金生,711∼?)의 글씨가 남아 있는것으로,
최근에야 밝혀진 비석으로,
재질이 화강암인 이 비석은,
높이 177㎝, 너비 60∼61㎝, 두께 42∼44㎝ 크기이며,
일제강점기에 새긴 것으로 짐작되는,
"창주도선국사(刱主道詵國師)"라는 커다란 글자 때문에 잘 보이지 않지만,
본래는 세로 길이 4∼5.5㎝인 글자를 200자 정도 새겼다고 하며,
그 글자 가운데 "김생서(金生書)"와 "원화삼년(元和三年)"의 표기가 있어,
"원화(元和)"는 당나라 헌종(805∼820)이 즉위한 이듬해부터 사용한 연호로,
원화삼년은 서기 808년을 의미 합니다.
안쪽에는 정면3칸에 측면2칸의 맞배지붕의 아담한 전각인,
약광전(藥光殿)이 있어,
내부에는 보물 제296호로 지정되어 있는,
"김천 청암사 수도암 석조보살좌상(金泉 靑巖寺 修道庵 石造菩薩坐像)"이 있는데,
약광전의 석불좌상은 도선이 조성한 것으로 전해지며,
금오산 약사암과 직지사 삼성암에 있는 약사여래와 함께 방광하였다 하여 3형제 불상으로 불리는데,
높이 1.54m의 고려시대 석불좌상으로,
머리에 원통형의 관(冠)을 쓰고 있어서 보살상처럼 보이지만,
광배와 대좌가 있고 신체 각 부분의 표현으로 보아 여래상을 표현한 것으로 보이는데,
얼굴은 단아한 모습인데 마모가 심해 세부수법을 자세하게 확인하기 어려우며,
부처의 몸에서 나오는 빛을 형상화한 광배(光背)에는 연꽃무늬·덩쿨무늬·불꽃무늬가 새겨져 있고,
양 어깨에 걸쳐져 있는 옷의 주름은 도식적이고 각선(刻線)은 얕은 편이며,
두 손은 무릎 위로 나란히 모아 법계정인을 취하고 보주(寶珠)를 들고 있는 모습인데,
이 두 손의 조각 수법은 다른 어느 곳보다도 퇴화된 형식적인 기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대좌는 1.22m에 달하는 방형 대좌(方形臺座)로서 상·중·하대로 구성되어 있으며,
상대에는 각 면에 3엽, 모서리 1엽씩 모두 16엽의 복판연화문(複瓣蓮花文)이 앙련(仰蓮)으로 조각 되었고,
중대도 방형으로 각 면에 길쭉한 안상(眼象)이 새겨져 있으며,
하대는 위에 3단의 각형(角形) 받침을 마련하여 그 아래에 상대와 동일한 복연화(覆蓮華)를 배치 하였으며,
같이 모셔진 비로자나불의 형태를 따르고 있습니다.
신체가 위축되어 긴장감이 없는 느슨한 표현이라든지,
도식적으로 처리된 옷주름, 형식적인 광배와 대좌의 표현으로 보아,
고려 초기에 만들어진 작품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청암사(靑巖寺)의 산내 암자로,
동학란과 6·25전쟁을 거치면서 전소되어 폐사의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근자에 크게 중창하여 사찰에 비견할만한 규모를 갖추고 있는 암자로,
많은 문화재를 보유하고 있는 곳으로,
청암사(靑巖寺)의 부속 암자인 "수도암(修道庵)"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