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아름다운 사찰, 봉화 청량사(淸凉寺)
경상북도 봉화군 명호면 청량산(淸凉山)에 있으며,
삼국시대 신라의 원효(元曉)대사가 창건한 사찰인 봉화 "청량사(淸凉寺)"입니다.
청량산 도립공원 내에 자리한 청량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16교구 본사인 고운사(孤雲寺)의 말사이며,
청량사(淸凉寺)로 들어가는 길은,
산문을 통하여 차량으로 올라갈수 있으나,
사찰 아래에는 주차장이 없으므로 걸어가야 하는데,
도보로 가는경우에는 오르막이 심하기에 추천하지 않으며,
청량사 입구 주차장에서 윗쪽으로 1km남짓 더오면,
입석 주차장에서 길을 잡으면,
1.3km정도를 오솔길을 걷게 되는데,
오르막이 별로없고 산길을 굽이돌아가는 형태로 되어있어,
트레킹 수준으로 대체로 완만한 숲길로 이어져 걸을만 하며,
가는길의 초입에는,
절벽아래에 여러개의 굴을 볼수있는데,
위험해서 인지 들어가지 못하게 막아 두었습니다.
청량사로 가는 숲길에서는,
일제 강점기 시절 일제의 만행으로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소나무를 볼수있는데,
식민지 조선의 수탈에 혈안이 된 일본은 위안부와 강제징용도 모자라,
송진에서 기름채취가 가능한 사실을 알고 소나무까지 눈독을 들여,
전국에서 약 400톤이라는 양의 송진을 채취해 갔다고 하며,
소나무 껍질을 벗겨 송진을 채취하고 남은 상처에,
누군가가 장승처럼 얼굴을 조각해둔 모습도 볼수있고,
산책하듯 천천이 산길을 굽이돌아 어느정도 가다보면,
소나무의 가지사이로 연화봉 아래로 청량사의 모습이 살짝 들어오고,
곧이어 청량정사(淸凉精舍) 앞으로 지나가게 되는데,
청량정사(淸凉精舍)는 송재(松齋) 이우(李堣,1469∼1517)가 조카인 온계와 퇴계, 조효연 등을 가르치던 곳으로,
퇴계(退溪) 이황((李滉),1501∼1570)이 숙부인 송재 이우에 이어서,
이곳에 머물며 성리학을 공부하고 후진을 양성 하였던 곳 이기도 합니다.
청량정사를 지나면,
쓰러져 누워있는 고목과 함께 안내문이 있어,
일제 강점기에 일본의 만행중 하나로,
연유는 알수 없으나우리나라 여인을 느티나무 빈속에 넣어 불태워 죽인,
가슴아픈 사연을 간직한 600년된 느티나무로,
이제는 2019년의 호우로 쓰러져 누었는데 옛 이야기만 전하고 있습니다.
목적지인 청량사의 전경이 들어 옵니다.
청량사의 모습을 전하는 사진들은 많지만,
개인적 으로는 이곳에서의 전경이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며,
아래를 내려다 보면,
청량사의 아름다움중 하나인 채송화 꽃밭을 "만(卍)"자 모양으로 조성해 두었는데,
이해를 돕기위해 청량사의 산문에서 들어오는 곳에서 올라가는것으로,
청량사의 경내를 살펴 봅니다.
청량산 연화봉(蓮花峰)을 배경으로 자리잡은 내청량사(內淸凉寺)의 모습으로,
청량산 도립공원 내에 자리한 청량사(淸凉寺)는,
서기 663년(신라 문무왕 3)에 원효(元曉)대사가 창건 하였다고 전하며,
경내로 들어가는 길에는,
영내에 있는 전통찻집인 안심당(安心堂)앞에 세워둔 조형물에 눈길이 가고,
청량사 스님들의 정성이,
물이 내려가는 수로도 통나무를 이용하여,
공을 들여 꾸며 놓았슴을 볼수 있는데,
통나무의 홈속에 들어가 누우면 한여름의 더위는 잊어 버릴듯 합니다.
사찰로 들어오면서 내려다 보았던,
"만(卍)"자 모양의 채송화 꽃밭에 들어서면,
화단의 중앙에는 뒷짐을 진 애기 동자승이 지키고 있어,
얼굴에 살이 오른 통통한 얼굴에,
뒷 짐까지 지고 있으니 귀엽기 그지 없습니다.
일반적으로 사찰의 중심 불전 앞에 세워진 것으로,
대법회가 있을 때 불전에서 행할 행사를 치르는 누각(樓閣)이 자리해 있고,
청량사는 산지에 조성하다 보니,
돌로 축대를 쌓아 조성한 크고 작은 공간과 터가 많은 편인데,
사찰의 경내 어디에든 공간만 있으면 채송화 꽃밭이 조성되어 있으며,
크고 작은 돌 축대를 유심히 살펴보면,
축대의 돌들 사이 등에는 이끼를 붙이고,
다육이나 와송등을 심어두고 가꾸어 둔 모습이 들어와,
이곳 청량사 스님들의 공력을 새삼 실감케 하며,
청량산 연화봉(蓮花峰) 기슭에는 내청량사(內淸凉寺)가,
금탑봉(金塔峰) 아래에는 외청량사(外淸凉寺)가 있는데,
두 절은 모두 663년(문무왕 3)에 원효(元曉)가 창건하였다는 설과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는 설이 있으나,
창건연대로 볼 때 의상은 중국에 있었으므로 원효가 창건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며,
창건 이후 오랫동안 폐사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중건 등의 역사는 전하지 않으나,
창건 당시 승당(僧堂) 등 27개의 부속건물을 갖추었던 큰 사찰이었다는 것만 전하여지고 있으며,
현재의 두 절은 비록 거리가 다소 떨어져 있지만 상호 연관적인 관계에 있습니다.
누각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금탑봉과 함께 5층 사리탑이 노송과 어우러져 한폭의 그림과도 같은 모습을 볼수 있는데,
청량사 5층석탑으로,
이탑은 1990년에 세워 졌으며,
석탑에는 석가모니 부처님의 진신사리 5과가 봉안되어 있다고 하며,
윗쪽에는 맞배지붕의 아담한 전각으로,
지장보살(地藏菩薩)을 봉안한 지장전(地藏殿)이 있어,
보물 제1666호인 "봉화 청량사 목조지장보살삼존상(奉化淸凉寺木造地藏菩薩三尊像)"으로,
불상 내부에서 발원문을 포함한 복장물이 발견 되었는데,
발원문을 통해 지장보살상, 시왕상, 기타 제상들이 1578년에 함께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으나,
현재는 지장보살과 도명존자와 무독귀왕 등 삼존상만 남아 있으며,
지장전 앞에는 삼각우송(三角牛松)의 소나무를 볼수있는데,
청량사를 창건한 원효(元曉,617~686)대사와 뿔이 세 개 달린 사나운 소에 관한 것으로,
“스님이 청량사를 창건하기 위하여 애를 쓰든 중 하루는 절 아래 마을을 내려가게 되었는데,
그 때 마침 뿔이 세 개가 달린 소를 몰며 논일을 하는 농부를 만나게 되어,
스님이 자세히 보니 소가 주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고 오히려 애를 먹이고 있었기에,
이에 스님이 농부에게 이르기를 "소를 시주하면 어떻겠느냐"고 하였더니,
농부는 마치 스님의 말을 기다리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혼쾌히 시주를 하였으며,
이까래(고삐의 경상도 사투리)를 받아든 스님은 소를 몰고 절로 돌아와 일을 시키니,
농부가 시킬 때와는 달리 말을 아주 잘 들었는데,
목재며 건축재료 등 청량사 신축에 필요한 모든 자재를 이 삼각우(三角牛, 뿔 셋 달린 소)가 운반 했는데,
준공을 하루 앞둔 전 날 안타깝게도 열심히 스님을 도왔던 삼각우가 그만 죽고 말았는데,
스님은 고마운 그 소를 위하여 유리보전 앞에 묻어주고,
뿔 셋 달린 소의 무덤이라 하여 삼각우총(三角牛塚)이라 하였는데,
그 삼각우총에서 소나무 한 그루가 자라기 시작하더니 커서는 세 뿔 달린 소처럼 가지가 셋으로 갈라졌다고 하며,
사람들은 모두 신기해하며 이 소나무를 "삼각우송(三角牛松)"이라 불렀으며,
뿔 셋 달린 소는 지장보살의 화신(化身)이라고도 하였다는 설화가 전해오고 있습니다.
안쪽에는청량사의 중심전각인 유리보전(琉璃寶殿)이 있어,
경상북도의 유형문화재 제47호인 "봉화 청량사 유리보전(奉化 淸凉寺 琉璃寶殿)"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식(多包式) 팔작지붕의 건물로,
다포계인 듯하나 주심포계(柱心包系)와 절충한 조선 후기적인 특징을 지니고 있는 건물이며,
유리보전(琉璃寶殿)의 현판은 고려의 명필였던 공민왕의 친필로 알려져 있는데,
유리보전은 일반적으로 약사여래불을 모신 전각으로,
내부에는 보물 제1919호로 지정된,
"봉화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 및 복장유물((奉化淸凉寺乾漆藥師如來坐像및 腹藏遺物)이 봉안되어 있어,
청량사 건칠약사여래좌상은 흙으로 형태를 만든 뒤,
그 위에 삼베를 입히고 칠을 바르고 말리는 과정을 반복해서 일정한 두께를 얻은 후 조각하여 만든 건칠불상으로,
이 불상은 오래전부터 청량사의 주불전인 유리보전의 주불로 봉안되어 온 것으로 추정되며,
엄숙한 상호, 당당하고 육감적인 양감, 균형 잡힌 신체, 탄력과 절제된 선묘 등에서,
석굴암 본존불 계통의 통일신라 전성기 불상의 양식계통을 따르고 있는데,
"해인사 건칠희랑대사좌상"과 더불어 우리나라 최고(最古)의 건칠불상으로 알려져 있으며,
왼쪽의 협시불자리에 비어 있는곳은 문수보살로,
개금불사 보존처리를 위해 비어있는 보습입니다.
유리보전 안쪽에는 종무소와 승방이 자리해 있으며,
안쪽의 산아래에는,
사찰에서 산신을 봉안하는 한국 사원 특유의 전각 가운데 하나인 산신각(山神閣)이 자리해 있어,
산신각(山神閣)에는 호랑이와 노인의 모습으로 묘사한 산신을 봉안하거나,
이를 탱화(幀畵)로서 도상화한 그림만을 모시기도 하는데,
산신신앙은 불전(佛典) 안에서는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없으며,
우리나라 특유의 산악숭배신앙과 관련이 깊지만,
우리나라 불교사의 초기 및 중기의 사찰에서는 산신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차차 나타나기 시작한 산신각은,
하근기(下根機) 사람들을 위한 방편으로 건립된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산신각 앞마당에서 보이는 전경으로,
전각의 지붕 너머로 가까이에는 금탑봉과 오층석탑이 있고,
멀리로는 청량산 축융봉까지 들어오며,
앞마당 옆에는 아담한 규모의 돌탑 분수가 시원함을 전해 줍니다.
청량사는 산세의 풍광과 더불어 주변 풍경도 일품 이지만,
이곳 스님들의 정성과 노고로 꾸며둔 아기자기한 채송화 꽃밭들이 있어,
화단의 한쪽에는 반가사유상(半跏思惟像)이 조성되어 있어,
원래 이 상은 부처가 태자였을 때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출가하여,
중생구제라는 큰 뜻을 품고 고뇌하는 태자사유상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며,
기왓장 위에 작은 지게로 화분을 대신하고,
흰 고무신까지 화분의 소품으로 두어 완성한 채송화 화단에도 눈길이 가며,
아름다운 산세속에 자리한 사찰에,
여러 소품들이 더해져 더욱 빼어난 채송화 화단을 이루어 두었는데,
채송화 꽃밭이 더해져,
개인적인 판단으로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산사"로는 다섯 손가락에 드는 곳이,
바로 이곳 "청량사"라고 말할수 있을 정도 입니다.
청량사는 풍수지리학상 길지 중의 길지로 꼽히는데,
육육봉(12 봉우리)이 연꽃잎처럼 청량사를 둘러싸고 있고,
청량사는 연꽃의 수술자리에 위치하여 빼어난 풍광을 자랑하고 있는데,
스님들의 정갈한 노력이 곳곳에 묻어있는 채송화 꽃밭으로인해,
더욱 아름다운 사찰인 곳으로 봉화 청량산(淸凉山)의 "청량사(淸凉寺)"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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