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 치산서원(鵄山書院)과 박제상(朴堤上) 유적지_19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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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아야할, 지켜야할 문화재, 문화유산/영남

울산 치산서원(鵄山書院)과 박제상(朴堤上) 유적지_190204

겨울섬 겨울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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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있는,

치산서원지(鵄山書院址)를 포함하는 박제상유적(朴堤上遺蹟)을 찾았습니다.

 

치산서원지(鵄山書院址)를 포함하는 박제상유적(朴堤上遺蹟)은 울산광역시기념물 제1호로 지정 되었으며,

치산서원(鵄山書院)에서는 매년 3월 초 정일(丁日)에 향사를 봉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안내문을 통하여 기념관과 치산서원을 비롯한 박제상 유적지의 배치도를 미리보아 둡니다.

 

 

 

유적지인 치산서원(鵄山書院)으로 들어가는 초입에는,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부인 국대부인(國大夫人)을 기리는 비석으로,

신라 만고충신 충렬공 박제상 충렬묘,국대부인 신모사 지(新羅 萬古忠臣 忠烈公 朴堤上 忠烈廟, 國大夫人 神母祠 址)의 비석으로,

다리 안쪽에 있는 비석은 나무들에 가려 잘보이지 않게 자리하고 있으며,

 

 

 

치산서원(鵄山書院)의 홍살문을 지나면 서원의 외삼문인 삼강문(三綱門)이 자리해 있고,

삼강문은 충의와 효도 그리고 정절을 상징하며,

 

 

 

삼문을 들어서면 오른편에 동재인 경의재(景義齋)가 자리해 있고,

 

 

 

동재를 마주하고 서재인 서재인 영휘재(永徽齋)가 자리해 있어,

마주하고 있는 동재와 서재는 서원 유생들의 기숙사에 해당하는 건물이며,

 

 

 

외삼문과 마주하고있는 강당인 관설당(觀雪堂)이 자리하고 있어,

 

 

 

치산서원(鵄山書院)의 기원은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처를 제사지내기 위해,

신라시대 경주 묵장산(墨匠山)의 치술령(鵄述嶺)이라는 고개에 세워졌던 신모사(神母祠)’에서 출발 하였는데,

조선시대에 들어와 1745년(영조 21)에 영해박씨 주도로 신모사가 있던 두동면에 다시 건립하여 박제상과 그의 부인 및 두 딸을 제향하고 있으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91년에 복원 되었습니다.

 

 

 

치산서원(鵄山書院) 강당의 "관설당(觀雪堂)" 현판으로,

강당의 당호는 박제상(朴堤上)의 호를 따서 지었다고 하며,

 

 

 

관설당(觀雪堂)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로,

 

 

 

가운데 4칸의 큰마루를 두었고 양쪽에 앞에 반칸의 마루를 둔 1칸반 큐모의 방을 들였는데,

 

 

 

2개의 방은 모두 닫혀 있어서 안은 들여다 볼수 없고,

양쪽의 1칸반 방에는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만든 큰 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었습니다.

 

 

 

관설당(觀雪堂)의 마루위에는 1992년(단기4325)에 올린 중건기(重建記)의 편액(扁額)이 있고,

 

 

 

강당 뒤에는 사당이 자리하고 있어,

홍살문과 외삼문 그리고 강당과 사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어,

우리나라 서원(書院)과 향교의 기본 배치구도인 전학후묘형(前學後廟型)의 구도를 그대로 따르고 있슴을 알게 되고,

 

 

 

사당인 충렬묘(忠烈廟)오 들어가는 내삼문에는 성인문(成仁門)의 현판이 있고,

 

 

 

박제상(朴堤上)을 모신 충렬묘(忠烈廟)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의 구조이며,

 

 

 

충렬묘아래 동편에는 전사청(典祀廳)이 있어,

전사청은 제례에 올릴 제사 음식을 장만하고 제물, 제기 등 제사에 필요한 여러 가지 도구들을 보관하는 곳이며,

 

 

 

강당인 관설당(觀雪堂)을 비롯한 사당인 충렬묘(忠烈廟)등은 1990년이후 복원을 하여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고 하며,

 

 

 

충렬묘(忠烈廟)내부는 개방이 되어 있어,

박제상(朴堤上)의 위패와 영정을 볼수 있으며,

 

 

 

박제상(朴堤上,363∼419)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신라를 대표하는 충신으로,

 신라는 백제를 견제하기 위해 402년(실성왕 1년) 일본에 내물왕(奈勿王)의 아들 미사흔(未斯欣)을,

412년에는 고구려에 미사흔의 형 복호(卜好)를 볼모로 보냈는데,

417년 내물왕의 큰아들인 눌지왕(訥祇王)이 왕위에 오르자 볼모로 잡혀 있는 동생들을 구출하려 했으며,

418년(눌지왕 2) 박제상(朴堤上)은 고구려와 왜국(倭國)에 볼모로 간 아우들을 데려오라는 왕명을 받들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장수왕(長壽王)을 언변으로 회유하여 복호를 구출하고 무사히 귀국 하였고,

부인의 간곡한 만류를 뿌리치고 왜로 들어가,

자신이 신라를 배반하고 도망온 사람처럼 속이고 눌지왕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무사히 탈출시키는데 성공 하였으나,

본인은 왜왕에게 잡혀 일본의 왕은 "일본의 신하가 되면 상을 내리고, 계림의 신하로 남으면 벌을 받을 것"이라고 협박과 회유를 했으나,

박제상은 "계림의 개돼지가 될 지언정 일본의 신하가 될 수 없다"고 투항을 거부하여 유배를 보냈다가 화형으로 죽었습니다.

후에 눌지왕은 박제상에게 대아찬(大阿飡)을 증직(贈職)하고 그의 처는 국대부인(國大夫人)에 봉하였으며,

미사흔을 박제상의 둘째 딸에게 장가들게 하였으며 박제상은 치산서원 외에 경상북도 영덕의 운계서원에도 봉안 되었습니다.

 

 

 

충렬묘 옆에 또하나의 사당이 있어,

박제상의 처 금교김씨(金校金氏)의 사당인 신모사(神母祠)로 내삼문에는 망해문(望海門)의 현판이 있고,

 

 

 

1칸의 맞배지붕의 아담한 사당인 신모사(神母祠)로,

 

 

 

신모사(神母祠)는 박제상의 처 국대부인(國大夫人) 금교김씨(金校金氏)을 모신곳으로,

 

 

 

왜국(倭國)에서 눌지왕(訥祇王)의 아우 미사흔(未斯欣)을 탈출시키고,

남아서 처형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박제상의 처와 두 딸은 울분을 이기지 못하고,

경주의 묵장산 치술령(鵄述嶺)이라는 고개에 올라 통곡하다 죽어 망부석이 되었고 영혼은 새가 되어 날아가 숨었다는 전설이 전하며, 

김씨부인은 숨진 후 국대부인(國大夫人)에 추봉되었으며 후인들이 그 절의를 사모하여 박제상의 처를 "치술신모(鵄述神母)"라 칭하고,

신모사(神母祠)를 세워 제사 지냈다고 하며 치산서원(鵄山書院)의 기원이 되었습니다.

 

 

 

관설당(觀雪堂) 동편에는 또다른 건물로 들어가는 사주문이 있어,

 

 

 

정면 4칸 측면 1칸반의 팔작지붕의 재실또는 관리사로 보이는 건물이 있고,

 

 

 

윗쪽에는 쌍정려로 들어가는 문인 "사효문(思孝門)"이 있어,

 

 

 

사당인 쌍정려(雙旌閭)는 1칸의 맞배지붕으로 단출한 규모이며,

 

 

 

쌍정려(雙旌閭)에는 박제상의 두 딸로 장녀인 "아기(阿奇)"와 막내딸인 "아경(阿慶)"의 영정을 모신 곳으로,

 

 

 

박제상의 처 김씨부인은 박제상이 돌아오지 않자,

일본이 보이는 바닷가에 큰딸인 아기(阿奇)와 막내딸인 아경(阿慶) 두 딸을 데리고 치술령(鵄述嶺, 765m) 올라가,

남편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가 망부석(望夫石)이 되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며,

박제상의 처 금교김씨(金校金氏)와 함께 두딸의 사당을 지어 제를 지내고 있습니다.

 

 

 

치산서원(鵄山書院)을 돌아보고 충렬공 박제상 기념관으로 향합니다.

 

 

 

박제상 기념관 앞에는 "삼모녀상"이 있어,

박제상의 부인과 두 딸이 일본으로 떠난 박제상을 기다리다,

순국소식을 듣고 망부석이 되었다는 설화를 바탕으로 삼모녀를 조각한 상이라고 하며,

 

 

기념관 뒤에는 "신라충신 박제상 추모비"가 자리해 있습니다.

 

 

 

2008년에 개관한 "충렬공 박제상 기념관"으로,

 

 

 

기념관은 그리 큰 규모는 아니지만 박제상 일대기 및 가족이야기를 밀랍인형과 도표, 영상 등으로 꾸며져 있고,

문화관에는 박제상이 살던 신라시대상과 울주의 민속 등이 모형으로 전시되어 있어,

 

 

 

박제상(朴堤上)의 사신행렬을 디오라마로 재현 해두어,

신라의 옛모습을 살펴볼수 있도록 해 두었으며.

 

 

 

남해안지역의 전형적인 토기인 침선문토기(沈線文系土器)와,

좁고 편평한 바닥과 아가리가 오므라드는 항아리 모양의 "옹형토기"가 진열되어 있고,

 

 

 

왼쪽의 울산 율동에서 출토된 "파수부대부장경호" 토기와,

중앙에 5세기 이후 부산 지역에 등장한 전형적인 신라 토기인 "이단 투창 고배(二段 透窓 高杯)"가 있고,

오른쪽에는 신라의 토기로 견부와 목 표면에 말 그림을 그리거나 여러 종류의 기하학적 무늬를 새겨 장식한,

"대부 장경호(臺附 長頸壺)"가 함께 전시되어 있습니다.

 

 

 

전시실 한쪽에는 울산지역의 유명 유적들을 차례로 알아볼수 있도록 준비를 해두었고,

 

 

 

덧널무덤으로도 불리는 목곽묘(木槨墓)의 제작과정을 디오라마로 알기 쉽게 표현 해두어,

나무널과 덧널 사이에는 여유가 있는 형태로 나무널이 피장자를 담아 운반할 수 있는 작은 것인데 비해서,

덧널은 다량의 목재를 사용하여 현장에서 설치한 것으로,

너무널과 달리 덧널 내부의 규모는 나무널과 부장품을 함께 넣을 수 있는 공간을 마련 하기도 하며,

덧널 속에는 이름 그대로 나무널이 있는 예가 일반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복을 위해서 실을 구하는 모습도 재현해 두었는데,

 

 

 

실제 사용하였던 옛날 도구들과 인형을 함께 배치 해두어 옛 사람들의 생활을 알기쉽게 해 두었고,

 

 

 

호롱불과 책 그리고 화로와 죽부인등,

옛날 생활에서의 필수품인 다양한 생활도구들을 전시해 두었고,

 

 

 

안쪽에는 충렬공 박제상과 관련한 전시를 별도로 해두어,

 

 

 

왜국(倭國)에 들어가 미사흔(未斯欣)을 탈출 시키고,

왜왕에게 잡혀 협박과 회유를 당하는 모습이 인형으로 재현해 두었으며,

 

 

 

안쪽에는 화감암의 비석을 앞두고 인형으로 재현해둔,

 

 

 

박제상(朴堤上)과 그의 부인인 국대부인(國大夫人) 금교김씨(金校金氏)의 모습이 재현되어 있습니다.

 

 

 

박제상(朴堤上)과 부인인 국대부인(國大夫人)의 행적이 기록으로 전하는 책들로,

1145년(인종 23)경에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三國史記)와,

1281년(충렬왕 7)경에 고려 후기의 승려 일연(一然)이 편찬한 사서(史書)인 삼국유사(三國遺事)와,

1797년(정조 21)에 이병모(李秉模) 등이 왕명에 의하여 편찬한 오륜행실도(五倫行實圖)와,

1933년 최준(崔浚)이 동경잡기(東京雜記)를 수정, 보완하여 간행한 경주의 지지(地誌)인 동경통지(東京通志)가 진열되어 있으며,

 

 

 

눌지왕(訥祇王)의 동생 미사흔(未斯欣)을 구하기 위해,

왜국(倭國)으로 향하는 박제상(朴堤上)의 비장한 모습을 재현해 두었습니다.

 

 

 

울산을 여행하면서 찾았던 곳으로,

신라시대 충신 박제상(朴堤上)의 충렬(忠烈)을 찾을수 있고,

박제상의 처 금교김씨(金校金氏)와 두 딸의 정정를 살펴볼수 있는곳으로,

울산의 치산서원(鵄山書院)과 박제상(朴堤上) 유적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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