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것을 들려주는 정자와 누각/영남권

창원의 정자, 관해정(觀海亭)_190206

겨울섬. 2019. 2. 21. 00:33

경상남도 창원시 마산합포구 교방동의 서원골에 있는,

조선시대의 누정 "관해정(觀海亭)"을 찾았습니다.

 

관해정(觀海亭)이 있는 서원골은,

무학산(舞鶴山) 계곡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숲이 우거진 풍치 좋은 곳으로,

관해정 앞에 있는 수령(樹齡) 470년을 넘긴 은행나무는 한강(寒岡)이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2호로 지정된 "관해정(觀海亭)"으로,

 

 

 

관해정(觀海亭)으로 들어가는 솟을대문 앞에는,

안내문과 더불어 바위에 여러 글씨가 암각되어 있어 "유상곡수유허지(流觴曲水遺墟址)"로,

 

 

 

옛날 이곳에 있었던 회원서원(檜原書院)주변 계곡 어딘가에,

자연의 암반 수석이 좋아 신라 말기를 대표하는 지식인 문창후(文昌侯) 최치원(崔致遠)이,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원지(苑池)시설이 있었다고 전하는 곳으로,

유상곡수유허지(流觴曲水遺墟址)는 구불구불한 물길에 술잔 띄우고 시를 지어 읊조리던 곳을 의미 합니다.

 

 

 

관해정(觀海亭)으로 들어가는 삼문은 닫혀 있으나,

바로 옆에는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관리사로 보이는 사주문이 별도로 나있어,

부탁을 드리면 관람 하실수도 있습니다.

 

 

 

문을 들어서면 왼편에 관해정(觀海亭)으로 들어가는 일각문이 있고,

 

 

 

관해정(觀海亭)은 조선조 선조~광해군때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초당을 지어,

시서(詩書)를 제자들에게 강론한 곳에 세워진 정자로,

임진왜란 후 그의 제자 장문재(張文哉)가 스승을 위하여 관해정을 세웠다고 하며,

1634년(인조 12)에 창원지방 사림들이 조선중기의 학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의 높은 학덕을 추모하기 위하여,

정자 옆에 회원서원(檜原書院)을 세웠는데 이 때부터 이 부근 계곡을 서원곡(書院谷)이라 부르게 되었고,

서원은 고종(高宗)때 대원군(大院君)의 서원 철폐령으로 없어지고 정자만 남아 있습니다.

 

 

 

한강(寒岡) 정구(鄭逑)는 함안 군수로 재직(1586년 10월~1588년 12월)하던 시절 합포의 문창후 월영대를 찾아보고,

최치원(崔致遠)의 유상곡수유허지(流觴谷水遺墟址)가 있고 자연의 암반 수석이 좋다는 말을 듣고 자주 이곳을 산책 하였고,

당시 제자인 장문재(張文哉)가 그의 스승을 위해 관망대로서 관해정을 짓고 아울러 취백당(聚白堂)이란 재실도 지었는데,

정구(鄭逑)가 세상을 떠나고 14년 후 문하생들은 그를 추모하여 1634년에 회원서원(檜原書院)을 세웠으며,

1708년에 제자인 문정공(文正公) 허목(許穆)을 추배 하였습니다.

 

 

 

관해정(觀海亭)의 현판이며,

 

 

 

정자는 정면 4칸 측면2칸의 팔작지붕으로,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이며,

 

 

 

마루에서 왼쪽에 있는 1칸반의 온돌방에는,

 

 

 

문위에 취백당(聚白堂)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문을 닫아두어 방의 내부는 볼수 없으며,

 

 

 

오른쪽에도 같은 크기의 방이 자리하고 있어,

 

 

 

방의 내부에는 행사때 사용하기 위한 물품 등을 보관하고 있습니다.

 

 

 

마루 위에는 "관해정기(觀海亭記)"와 "관해정중수기(觀海亭重修記)" 등의 기문(記文) 편액(扁額)들이 올려져 있고,

 

 

 

관해정(觀海亭)의 마루에서 내려다 보면,

바다는 보이지 않으나 노거수 은행나무와 정자앞을 흐르는 계곡이 들어오며,

정자의 마당은 좁은편여서 입구인 솟을 대문과 베롱나무가 있는 담장이 바로 앞에 있는듯 합니다.

 

 

 

관해정(觀海亭)은 대지 140평과 건평 26평으로,

정면 4칸, 측면 2칸의 정자 건물을 중심으로 외삼문(外三門) 관리사(管理舍) 등이 포함되어 있어,

그리 여유있는 마당을 둔듯 하지만,

옛날에는 서원이 있었고 담장밖 은행나무도 권역에 들어갔을 것으로 보아,

계곡과 가까운곳에 위치 하였고 세월의 흐름으로 지금이 모습으로 남아 있는듯 합니다.

 

 

관해정(觀海亭)에 있는 동백나무에는,

겨울꽃인 동백이 꽃망울을 터트리기 시작 합니다.

 

 

 

관해정(觀海亭)의 주인 정구(鄭逑,1543~1620)의 자는 도가(道可) 호는 한강(寒岡) 본관은 청주(淸州) 출신지는 경북 성주(星州)로,

5세에 이미 신동으로 불렸으며 1563년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을 1566년에 남명(南冥) 조식(曺植)을 찾아 뵙고 스승으로 삼았고,

대곡(大谷) 성운(成運)까지 당시대 3현(賢)에게서 학문을 닦았고,

1563년 향시(鄕試)에 합격했으나 이후 과거를 포기하고 학문 연구에 전념 하였는데,

1580년 비로소 창녕현감(昌寧縣監)으로 관직생활을 시작하여,

1584년 동복현감(同福縣監)을 거쳐 이듬해 교정청낭청(校正廳郎廳)으로 "소학언해", "사서언해" 등의 교정에 참여 하였고,

1588년 12월 함안 군수를 질병 재발로 사직 후 1592년 통천 군수로 재보임될 때까지 3년간 관해정에서 요양하며 후진을 양성 하기도 하였으며,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통천군수(通川郡守)로 재직하면서 의병을 일으켜 활약 하였고,

1593년 선조의 형인 하릉군(河陵君)의 시체를 찾아 장사를 지낸 공으로 당상관으로 승진한 뒤,

우부승지, 장례원판결사·강원도관찰사·형조참판 등을 지냈으며,

1608년(광해군 즉위년) 임해군(臨海君)의 역모사건이 있자 관련자를 모두 용서하라는 소를 올리고 대사헌직을 그만두고 귀향 하였으며,

전체적으로 중앙 관직보다는 지방의 수령으로 더 많이 활약 하였으며 학문은 성리학, 예학, 제자백가, 역사, 산수(算ㅡ數), 병진(兵陣), 의약(醫藥),

풍수지리(風水地理), 복서(卜筮) 등 여러 방면에 걸쳐 능통 박학하고 문장에 깊이가 있었고 특히 예학에 뛰어 났다고 하며,

이후경·서사원·황종해 등 많은 제자를 배출하여 영남 남인학파의 한 줄기를 이루었습니다.

1623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1625년 문목(文穆)의 시호를 받았으며 창원 마산의 회원서원(檜原書院), 성주 회연서원(檜淵書院), 천곡서원(川谷書院),

칠곡의 사양서원(泗陽書院), 창녕의 관산서원(冠山書院), 충주의 운곡서원(雲谷書院), 현풍의 도동서원(道東書院) 등에 제향 되었습니다.

 

 

 

신라때 최치원(崔致遠)의 유허가 전하고 있고,

한강(寒岡) 정구(鄭逑)가 문하생들에게 시서를 강론 하였으며,

무학산(舞鶴山) 계곡에서 바다를 바라볼 수 있는 숲이 우거진 풍치 좋은 곳으로 이름나 있던 곳 였으나,

세월의 흐름과 도시화로 인해 옛 풍광은 찾기 힘들어진 곳으로,

경남 창원의 정자 문화재, 관해정(觀海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