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송의 정자, 오체정(五棣亭)_190220
경상북도 청송군 현동면 개일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정자, 오체정(五棣亭)을 찾았습니다.
청송 오체정(五棣亭)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2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정자의 입구에는 오체정(五棣亭)에서 다섯 아들을 가르쳤던 남세주(南世柱)를 기리는 비석인,
"통정대부호군성재남공유허비(通政大夫護君誠齋南公遺墟碑)"가 자리해 있고,
오체정(五棣亭)은 성재(誠齋) 남세주(南世柱)가 5명의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작은 정자 였으며,
영양남씨(英陽南氏) 청송 입향조 남계조(南繼曺)의 6세손인 남도성(南道聖)이,
1734년(영조 10)에 할아버지 5형제분의 효행과 우애를 추모하기 위하여 지은 정자로,
이들 남자훈(南自熏)·남응훈(南應熏)·남유훈(南有熏)·남필훈(南必熏)·남시훈(南是熏) 5형제는,
1660년대의 인물로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며 학업에 전념하여 경전(經典)을 탐독하고 낙민서(洛민書)를 널리 연구해서 당세의 권위자가 되었으며,
부모에게 효도해서 향리로부터 남모(南某) 형제의 효행을 가위(可謂) 출천(出天)의 효(孝)라 했다고 전합니다.
정자의 전면에 있는 오체정(五棣亭)의 현판으로,
오체(五棣)’의 "체(棣)"는 시경 ‘소아’의 "상체지화(常棣之花)"이며 상체지화는 "아가위나무 꽃"으로,
아가위나무는 산사나무의 옛이름으로 찔구배나무 또는 산사육(山査肉) 이라고도 하며,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집안이 번성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체정(五棣亭)의 평면 구성은 특별하여,
정면 5칸, 측면 3칸의 "一"자(字)형 겹집으로 뒤쪽에 있는 "ㄷ"자형의 주사채와 함께 전체적으로 튼"ㅁ"자형을 이루는데,
겹처마로 꾸미고 팔작지붕 기와를 얹은 5량가의 굴도리집으로 앞쪽면은 오른쪽으로부터 툇간 2칸에 온돌방과 대청 순으로 구성되어 있고,
뒤쪽은 앞쪽과는 반대순으로 되어 있어서 앞뒤의 2칸 온돌방이 세 짝 미세기문을 사이에 두고 1칸씩 역대칭으로 맞물려 있어,
마치 2개의 건물을 엇갈리게 하나로 붙여둔듯한 현대적 건축 구조와 닮아 있습니다.
쪽마루 아래의 아궁이에는 근자에도 불을 들인 흔적이 있으며,
정자의 기둥은 바깥쪽으로는 모두 두리기둥을 사용하고 안쪽에만 네모기둥을 세웠는데,
누마루의 하부기둥은 밤나무를 사용하고 상부기둥은 소나무를 사용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며,
정면 다섯 칸 중 앞쪽은 서쪽에 대청마루를 두 칸을 두었고 가운데 방을 두 칸을 들였으며,
동쪽에 마루 1칸을 배치한 반면 뒤쪽은 동쪽 마루 1칸에 가운데 방을 두 칸이 있고,
서쪽 마루 두 칸을 배치함으로써 앞방과 뒷방이 엇갈리게 해두어 역대칭 구조로 되어 있으며,
이로써 정자 정면과 뒷면에 각각 한 개씩의 대청마루를 가지게 되어 특이한 모습을 보이고 있어,
정자의 문은 앞쪽의 온돌방 왼쪽과 뒤쪽의 온돌방 오른쪽은 대청 쪽에다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내외 공간을 확장할 수 있게 하였고,
나머지는 덧문을 달았으며 구조상 앞뒤 온돌방 앞쪽 2칸만 쪽마루를 달아내고 나머지는 계자난간을 둘러 정자건축의 멋을 한껏 살렸으며,
대청 바닥은 우물마루를 깔고 천장은 서까래를 노출시킨 연등천장으로 꾸몄습니다.
정자의 마루에는 여러개의 편액(扁額)이 올려져 있어,
주로 후손들의 시문(詩文) 편액(扁額)을 포함하여,
이곳을 다녀간 시인 묵객들의 시판(詩板)들이 있으며,
후손 남상현(南相鉉)의 "오체정중건기(五棣亭重建記)"의 기문(記文) 편액 등을 볼수 있습니다.
오체정(五棣亭)의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ㄷ"자 형으로 자리하고 있는 정자를 위한 살림집인 주사채가 들어오며,
도로에서 들어와 주차장이 있는 정자의 옆면에서의 전경이며,
노거수 소나무로 둘러있는 오체정(五棣亭)이 자리한 이곳의 구릉과 관련해 전해오는 이야기로,
보현산 베틀봉 전설이 전하고 있어 보현산(1,121m)은 백두대간 태백 산맥이 남쪽으로 뻗어 나온 줄기이며,
그 산봉우리중 하나가 베틀봉으로 선녀가 하늘에서 내려와 베를 짜다가 북을 놓쳤는데,
그 북이 눌인천 물줄기를 따라 내려오다 북 모양의 구릉을 만들었다고 하며,
높이 6m에 넓이는 약 600평 정도 되는 암석으로 지금의 오체정이 자리 잡고있는 구릉이라고 합니다.
오체정(五棣亭)의 지금의 모습은 서쪽의 길안천 지류인 눌인천만 흐르고 있지만,
원래는 병보천과 눌인천이 만나는 곳으로 사방이 하천 이었으며,
오체정이 서 있는 자리는 약 6m 높이의 암석(巖石)으로 베를 짜는 북모양의 섬 형태로 생긴 약 600평 정도의 대지를 이루고 있어,
흡사 바다와 같은 들판의 가운데 배를 띠워놓은 것과 같은 작은 봉우리 위에 200여 년 된 울창한 소나무 숲 가운데 서 있어,
청송군의 명소로 이름난 곳이기도 합니다.
오체정(五棣亭)은 영양남씨(英陽南氏) 청송 입향조인 운강 남계조(南繼曺)의 증손 성재 남세주(南世株)가,
자훈(自勳) 응훈(應勳) 유훈(有勳) 필훈(必勳) 시훈(時勳) 다섯 아들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로,
지을 당시에는 규모가 지금 보다는 작았다고 하는데 다섯 아들 공부시키기 위한 맞춤형 공부방이다 보니 규모를 키울 까닭이 없었으며,
5형제는 아버지의 바람대로 유가의 여러 경전과 주자학을 깊이 공부해 학문이 높은 경지에 도달 했으며,
형제간에 우애도 깊어 다섯 행제가 항상 같은 방에서 같은 이불을 덮고 잤고 식사도 한 상에서 했다고 합니다.
형제 중 한 사람이 함께 하지 못하면 나머지 네 형제는 식사는 물론 잠도 제대로 이루지 못할 정도 였다고 하며.
5형제의 부인들도 남편의 우애를 본받아 한 번도 다투는 일이 없었다고 전하고 있어,
5형제는 부모에게도 효성이 깊어 마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습니다.
현재의 정자는 남세주의 증손이자 자훈의 손자인 남도성(南道聖)이 할아버지 5형제의 우애와 효성을 오래도록 기리자며 증축 하였고,
이때에 와서야 오체정(五棣亭) 편액을 걸었고 나중에 문중 사람들이 관리사와 취식공간을 마련 했다고 합니다.
길안천을 향하여 흐르고 있는 눌인천과 주변의 전경을 내려다 보면서 정자의 마루에서 내려 옵니다.
정자에서 내려와 주사채를 들여다보니,
사채에는 오체정(五棣亭)을 관리 하는듯 사람이 살고 있으며,
주사채의 벽에는 다양한 약재와 건조 식료품 등을 걸어 두었고,
주사채는 "ㄷ"자형의 구조로 홑처마로 꾸미고 기와로 박공지붕을 얹은 납도리집으로,
자연석으로 주춧돌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와 대들보를 장식 없이 간단히 결구시킨 3량가의 가옥이며,
마당 한쪽의 평상 위에는 버섯을 비롯한 약재들을 말리고 있어,
이곳에 살고 계신분이 직접 채취해 온듯 여겨지며,
커다란 가마솥에 장작으로 무엇인가 끓이고 있는 모습이 들어와,
가마솥의 열린 부분을 들여다 보니,
대추등과 함께 약재의 모습이 살짝 보여 건강을 위한 약재를 달이고 있는듯 여겨집니다.
경상북도 청송(靑松)은 주왕산(周王山)에서 갈라져 나온 지맥들에 둘러싸여 있는 산지(山地)고을여서,
산과 계곡이 아름답기로 유명하여 빼어난 정자가 많은 곳으로,
처음에는 5명의 아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작은 정자 였으며,
후손에 의해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성재(誠齋) 남세주(南世柱)와 다섯아들의 유허가 남아있는 곳으로,
청송의 정자 문화재, 오체정(五棣亭)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