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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경의 문화재, 청산재(靑山齋)_190509|

겨울섬. 2019. 5. 16. 19:08

경상북도 문경시 영순면 의곡리의 의곡마을에 있는,

조선시대의 재사(齋舍)인 "청산재(靑山齋)"를 찾았습니다.

 

문경 청산재(聞慶 靑山齋)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83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대문없이 담장만 둘러져 있어,

 

 

 

청산재(靑山齋)는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대제학, 대사헌, 이조판서 등을 역임한 허백당(虛白堂) 홍귀달(洪貴達)의 넷째 아들인,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1473~1508)의 재사(齋舍)로서,

홍언충(洪彦忠)은 후사가 없어 외손인 검간(黔澗) 조정(趙靖)이 창건한 것으로,

조선전기 외손봉사(外孫奉祀)의 좋은 예로서 지금까지 이루어지고 있는 문경지역의 전통 유교문화를 이해하는 문화적 의미가 있는 곳으로,

 

 

 

청산재(靑山齋)는 정면3칸 측면2칸의 홑처마 맞배지붕의 건물로,

건축연대를 18세기 이전으로 올려 볼 수 있는 평면형식과 고식(古式)의 영쌍창(暎雙窓)과 평면형식등의 건축수법이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18세기 이전의 건축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당시의 지방사림(地方士林)과 사대부(士大夫)의 건축 유형 및 양식편년을 살펴볼수 있는곳으로 의미가 있는곳으로,

 

 

 

정자 역할을 겸한 재사인 청산재(靑山齋)의 초석은 호강암의 자연석을 두고 마루앞의 기둥은 원주를 올렸으며,  

 

 

 

마루앞 처마 아래에는 "청산재(靑山齋)"의 현판이 있고,

 

 

 

재사(齋舍)의 왼쪽에 나있는 돌계단을과 나무계단을 통해 마루에 오를수 있어,

 

 

 

4칸 크기의 청산재(靑山齋) 마루는 제법 너른편이며,

평면 구조는 재사(齋舍)라기보다 "정사(精舍)"에 가까워보이는 구조이며,

 

 

 

마루 뒷면에 열려있는 판문으로 뒤쪽을 보면,

지은지 오래지 않아보이는 고방(庫房)으로 보이는 건물이 있고,

 

 

 

마루에는 2기의 편액만 볼수가 있어,

"청산재중수기(靑山齋舍重修記)"의 기문(記文)이 있고,

 

 

 

또다른 기문(記文)으로 "청산재사중수기(靑山齋舍重修記)의 편액이 있습니다.

 

 

 


재사(齋舍)의 오른쪽에는 2칸 크기의 온돌방 하나만을 두었는데,

 

 

 

온돌방과 마루가 통하는 곳에는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넌출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해두어 방과 마루가 필요시 하나의 공간으로 쓸수있도록 해 두었고,

 

 

 

2칸의 온돌방은 하나로 트여 있습니다.

 

 

 

청산재(靑山齋)의 주인인 홍언충(洪彦忠,1473~1508)은 조선전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부계(缶溪) 자는 직경(直頃) 호는 우암(寓菴)이며,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그 해에 또 다시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이어 정자·저작·박사 등을 역임 하였고,

1498년에는 문흥을 일으키기 위해 유능한 젊은 관료들에게 휴가를 주어 독서에만 전념케 하던 제도인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질정관(質正官), 부수찬, 이조좌랑 등을 역임한 뒤 병으로 사임 하였다가,

1503년 수찬(修撰)으로 복직해 교리(敎理)가 되고 그 해에 정조사(正朝使)의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 왔으며,

이듬해 갑자사화(甲子士禍)가 일어나자 글을 올려 임금을 간하다가 노여움을 사서 문외출송(門外黜送)되었다가 다시 진안에 유배 되었고,

이어 아버지 홍귀달(洪貴達)이 경원으로 유배될 적에 또 다시 해도(海島)로 이배 되었다가,

중종반정이 일어나 풀려 났는데 중종이 불러 직강(直講)을 제수 했으나 벼슬에 나아가지 않고 시와 술로 생을 보냈습니다

천성이 신중하면서 솔직하고 재기가 있어 어릴 때에 이미 학문에 깊이 통달 하였고,

문장에 능했을 뿐만 아니라 글씨에도 뛰어 났으며 특히 예서(隷書)를 잘 썼다고 하며,

그는 문장으로 정순부(鄭淳夫), 이택지(李擇之), 박중열(朴仲說) 등과 함께 당대의 사걸(四傑)이라 불렸으며,

문경의 근암서원(近巖書院)에 제향 되었고 저서로는 자만사(自挽辭)가 있습니다.

 

 

 

외손봉사(外孫奉祀)로 청산재(靑山齋)를 세운 조정(趙靖,1555~1636)은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안중(安中) 호는 검간(黔澗)으로,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활약 하였고 1596년 왜와의 강화를 배격하는 소를 올렸으며,

1599년에 천거로 참봉이 되고 1603년 사마시에 합격한 뒤 1605년 좌랑으로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며,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공주까지 호가(扈駕)하였고 그 뒤 벼슬이 봉상시정에 이르렀으며,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와 교유하였으며 경술(經述)과 문장에 뛰어났던 인물로, 

사후 이조판서에 추증되고 상주의 속수서원(涑水書院)에 봉향 되었고 저서로는 "검간문집"과 "진사일록(辰巳日錄)"이 있습니다.

 

 

 

경상북도 문경의 문화재 탐방에서 찾은곳으로,

조선전기 외손봉사(外孫奉祀)의 특이한 예을 살필수 있으며,

재사(齋舍)의 건물로 지어 졌으나 정사(精舍) 또는 정자에 가까운 구조와 형태를 볼수있는 곳으로,

우암(寓庵) 홍언충(洪彦忠)의 재사(齋舍)인 문경의 문화재인 "청산재(靑山齋)"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