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것을 들려주는 정자와 누각/영남권

낙동강변의 정사, 구미 송당정사(松堂精舍)_190629

겨울섬. 2019. 7. 9. 17:10

경상북도 구미시 선산읍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사 건축물인 송당정사(松堂精舍)를 찾았습니다.

 

낙동강변의 풍취 좋은곳에 여러그루의 노거수 소나무 숲에 자리하고 있는 "구미 송당정사(龜尾 松堂精舍)"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644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송당정사(松堂精舍)를 찾았을때 마침 후손이신 목사님이 정사주변을 정리하고 계시면서 흔쾌히 관람을 허락해 주십니다.

 

 

 

정사(精舍) 앞에는 정사의 주인인 송당(松堂) 박영(朴英)의 사후에 세운,

미수 허목(許穆 1595~1682)이 비문을 지은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어,

1822년(순조 11년)에 높이 218㎝, 너비 85㎝, 두께 27㎝의 크기로 세운 신도비가 있으며,

 

 

 

후손이신 목사님의 설명과 안내덕분에,

정사의 입구에는 박영(朴英)의 명경당(明鏡堂) 시비(詩碑)를 찾아볼수 있어,

有象非爲有(유상비위유)   형상이 있다하여 있는게 아니고

無形不是空(무형불시공)   형체가 없다하여 없는게 아니로다

實中知是實(실중지시실)   진실과 적중해야 진실을 알게 될지니

功外莫尋功(공외막심공)   스스로 쌓은 공외에 공을 찾지마라

 

 

 

한쪽에는 송당정사(松堂精舍)를 세운,

송당(松堂) 박영(朴英,1471~1540)이 직접 심었다고 전하는 모과나무가 한그루가 서있어,

 

 

후손의 말씀에 의하면 모과나무는 송당(松堂) 박영(朴英)이 노후에 정사를 건립하고 심었다고 하는데,

거의 500여년의 수령에 달하는 귀한 모과나무여야 하는데,

아쉽게도 원래의 나무는 볼수없고 지금의 노거수 모과나무는 아들 나무인 자목이라고 합니다.

 

 

 

송당정사(松堂精舍)는 낙동강변에 자리하고 있어,

정사뿐 아니라 정자의 위치로도 손색이 없을 정도의 정취가 빼어난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낙동강의 선산대교 바로 윗쪽에 자리해 있어,

강건너로 "신라불교 초전지"가 있는 곳으로 널리 알려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의 전경이 낙동강 너머로 들어 옵니다.

 

 

 

송당정사(松堂精舍)는 조선 전기의 무신이자 유학자인 송당(松堂) 박영(朴英,1471~1540)이,

1496년(연산군 2년)에 고향인 선산(善山)으로 낙향하여 낙동강가에 세운 강학지소(講學之所)로,

당시의 건물은 임진왜란때 불타 소실되었고 200년후 1860년대에 중건되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정사(精舍)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 기와집으로 아담한 편이며,

앞열에는 모두 마루를 깔았고 뒷열에는 서편에 온돌방 2칸과,

동쪽의 낙동강이 보이는 곳에는 마루 1칸을 연접시킴에 따라 마루칸이 앞열 마루와 연결되어 "ㄱ"자형을 이루게 하였으며,

오량가(五樑架)의 소로수장집의 구조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송당정사(松堂精舍)에 왔으니 "정사(精舍)"에 대해서 간략하게 알아 보자면,

정사(精舍)란 서원 · 서당과 더불어 조선시대 사학(私學)의 하나이며 불교의 도량(道場)도 정사라고 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朱子學)이 보급되던 고려 말에 본격적으로 세워졌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주자학의 융성과 더불어 곳곳에 건립 되어 지금도 영남지방에는 여러곳에 많이 남아 있는데,

명망 높은 선비가 강학소를 개설하면 그를 흠모하는 지학들이 모여들어 수학함으로써 많은 정사가 건립 되었으며,

고려말 길재(吉再:1353~1419)가 자신의 고향 선산인 금오산에 은거하면서 강학소를 개설한 것이 그 대표적인 예 이기도 합니다.

 

 

 

송당정사(松堂精舍)의 현판이며,

 

 

 

정사(精舍)는 최근에 새로이 부분적으로 보수를 한듯 우물마루의 새로운 목재가 곳곳에 보이기도 합니다.

 

 

 

정사의 기단과 주춧돌은 모두 자연석을 이용하였고,

자연석의 네모난 디딤돌을 통하여 마루로 올라봅니다.

 

 

 

정사(精舍)는 간결하고 소박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어,

연이어 있는 2칸의 온돌방은 각기 큰문과 작은문을 두었으며,

 

 

 

2칸의 온돌방은 하나로 트여 있고,

온돌방은 깨끗하게 정리가 잘되어 있습니다.

 

 

 

1칸의 마루방은 단을 조금 높여 올려 두었는데,

온돌방과의 높이을 맞추기 위함 이거나 동쪽에 있는 낙동강의 조망을 위한 정자역활의 배려로도 보여집니다.

 

 

 

송당정사(松堂精舍)의 마루에서 앞을 내어다 보면,

낙동강의 전경이 한눈에 들어와..

 

 

 

송당정사(松堂精舍)는 영산암의 절경을 바라보며 강학에 전념한 곳이기도 하며,

"학송당"이라 부르기도 하였으며,

이곳에서 용암 박운(朴雲,1493~1562), 김취문(金就文1509~1570), 진락당 김취성(金就成), 송정 최응룡(崔應龍)등 다수의 유학자를 배출하여,

"송당학파"로 불리기도 하였습니다.

 

 

 

송당정사(松堂精舍)를 세운 송당(松堂) 박영(朴英,1471~1540)은 양녕대군의 외손자이기도 하며 일찌기 무예에 출중하여,

1492년(성종 23) 무과 급제하여 선전관, 조병장, 황간현감, 동부승지, 김해부사를 역임 하였고 병조참판에 올랐으나,

연산군이 성종이 기르던 사슴에 활을 쏘는 것을 보고 나라가 어렵겠다고 탄식하며 벼슬을 버리고 선산으로 은거하여,

신당 정붕에게 대학을 강의 받고 마봉사에서 만번을 읽고 격물치지(格物致知)를 깨닫게 되었고,

스승인 정붕(鄭鵬 1467~1512)과의 냉산에서 대화한 냉산문답(冷山問答)이 알려져 있으며,

의학을 공부하여 귀중한 생명을 구했고 후세에 대학동자(大學童子)로 부르기도 하였으며 시호는 문목(文穆) 입니다.

 

 

 

정사의 뒤편에는 사당이 자리해 있어,

 

 

 

정사(精舍)의 뒤편에 닜는 사당은 송당(松堂) 박영(朴英)을 모시는 불천위 사당인 문목사(文穆祠)이며,

시멘트 담장을 둘러서인지 사당인 문목사는 송당정사(松堂精舍)와는 어쩐지 이질감이 느껴 지기도 합니다.

 

 

 

송당정사(松堂精舍)는 간결하고 소박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고,

건물의 규모와 구성에 대한 내용이 기술된 5량가의 소로수장집이며 처마는 홑처마인데,

"송당정사 중건기(松堂精舍重建記)"가 전해 오고 있어서 건축의 유래와 변화 과정을 비교적 정확히 추정할 수 있는 건물이기도 합니다.

 

 

 

경북 구미의 문화재 탐방에서 찾은 곳으로,

송당(松堂) 박영(朴英,1471~1540)을 통하여 선산지역의 선비문화의 한부분을 살필수 있는 곳으로,

낙동강변의 풍광 뛰어난 곳에 자리하고 있으며 후손들의 정성어린 손길로 깔끔하게 관리가 되고 있는,

구미 송당정사(龜尾 松堂精舍) 방문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