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최초의 석탑이 있는, 경주 분황사(芬皇寺)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에 있는,
삼국시대의 사찰인 " 분황사(芬皇寺) "입니다.
분황사는 경주로의 수학여행에서 빠트리지 않은 문화유적중 하나로,
대한불교 조계종 제11교구 본사 불국사의 말사이며,
입구에는 "원효성지"이며 국보 문화재인 "분황사 모전석탑"이 있슴을 알려주고 있으며,
분황사(芬皇寺)에 입장 하려면 유료이며,
관람료는 위의 그림을 참조 하시면 됩니다.
분황사(芬皇寺)는 서기 634년(선덕여왕 3) 신라 최초의 여왕인 선덕여왕이 창건한 사찰로,
신라를 지키는 호국룡이 살고 있는 신성한 절로 여겨 졌으며,
이 절의 석탑은 신라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석탑으로 한국 최초의 석탑 중의 하나로 알려져 있으며,
입구를 들어서면 모전석탑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 오는데,
국보 제30호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은,
높이가 9.3m이며 돌을 벽돌(塼) 모양으로 다듬어 쌓은 모전석탑(模塼石塔)으로서,
634년(선덕여왕 3) 분황사의 창건과 동시에 건립되었다고 생각되나,
뒤에 몇 차례 보수되어 어느 정도까지 원형이 남아 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기단(基壇)은 한 변이 약 13m이고 높이는 약 1.06m의 막돌로 쌓은 토축(土築) 단층 기단인데,
밑에는 상당히 큰 돌을 사용하였고 탑신(塔身) 밑이 약 36㎝ 높아져 경사를 이루었으며,
현재 탑신부는 3층까지 남아 있으며 회흑색의 안산암(安山岩)을 작은 벽돌모양으로 잘라서 쌓았는데,
위의 폭이 아래폭보다 약간 좁습니다.
탑신 4면에는 입구가 뚫려져 있는 감실(龕室)을 개설하고,
입구 좌우에 거의 원각(圓刻)에 가까운 인왕상(仁王像)을 배치하였으며 두 짝의 돌문을 달아 여닫게 하였는데,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조각의 형태는 인간화가 꽤 많이 진전 되었으나,
얼굴이나 신체 등에서 형태가 불균형한 면을 보이는 등 추상화된 면이 남아 있는데,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지금 감실 안에는 머리가 없는 불상을 안치하고 있으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은 아니며,
초층탑신 4면에 감실을 개설한 예는 미륵사지석탑(彌勒寺址石塔, 국보 제11호)에서,
초층탑신 4면에 통로를 개설하고 그 중심에 찰주(擦柱 : 탑의 중심 기둥)를 세운 점과 서로 통하며,
이러한 형식은 목탑에서 초층탑신 내부가 공간이 되고,
4면에 내부로 통하는 문을 개설하는 형식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기단 위에는 네 모퉁이에,
화강암으로 조각한 사자 한 마리씩을 배치하였는데,
두 마리는 수컷이고 두 마리는 암컷여서 두쌍의 사자를 배치 한것이며,,
2층과 3층탑신은 초층에 비하여 높이가 현저하게 줄어서 장중한 감을 주는데,
옥개석(屋蓋石)은 벽돌 1장의 두께로 처마를 삼고 아래위에 탑신을 향하여,
감축되는 받침과 낙수면(落水面) 층단이 있습니다.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으며,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며,
지금 분황사 경내에는 이 탑을 수리할 때 남은 석재가 따로 보관되어 있어,
지금의 모습이 창건 당시의 형태가 아님을 알 수 있으며,
"동경잡기"에는 "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는 아니라고 합니다.
탑의 한쪽에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97호인 "경주 분황사 화쟁국사비부(慶州 芬皇寺 和諍國師碑趺)"가 있어,
상대·중대·하대의 3부분으로 구성된 비석 받침대와 비석대좌 그리고 빗돌받침으로 원효대사를 기리는 비의 받침돌이며,
고려 명종대(1170∼1197) 한문준이 건립한 화쟁국사비의 대석이 남아있어,
원효(元曉)대사를 위한 비석이나 시호(諡號 : 죽은 이의 덕을 기리어 붙여주는 호)가 없음을 애석하게 여긴 왕이,
"대성화쟁국사(大聖和諍國師)"라는 시호를 내리고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으며,
이 비석은 1597년(선조 30) 정유재란 때 분황사가 소실되면서 파괴된 듯하며,
이후 비석의 대좌만 남게 되었는데 조선 말기에 이곳을 찾은 추사 김정희의 고증으로,
이것이 승 원효의 비석을 세웠던 비부임이 밝혀지게 되었습니다.
한쪽에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9호인 "경주 분황사 석정(慶州 芬皇寺 石井)"이 있어,
사찰내에 있는 돌우물로 바위틈 사이로 솟아 오르거나 흘러 내리는 물이 잘 고이도록 바위를 움푹하게 판 뒤,
그 위에 다시 돌을 쌓아 시설해 놓은 모습으로,
겉면은 8각을 이루고 안쪽의 벽은 둥근 원형을 이루고 있는데,
"호국룡변어정(護國龍變魚井)"이라고도 불리는 이 우물에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
분황사 우물과 금학산 기슭 동천사의 동지와 청지라는 우물에는,
각각 통일신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호국룡이 살고 있었는데,
원성왕 11년(795)에 중국 당나라 사신이 이 용들을 물고기로 변신시켜 잡아가니,
두 여인이 왕 앞에 나타나 이 사실을 아뢰며 남편을 찾아줄 것을 아뢰었는데,
두 여인의 말을 들은 왕은 사람을 시켜 물고기를 다시 빼앗은 후 각각의 우물에 놓아 주어 살게 하였는데,
이 우물이 "호국삼룡변어정"으로 나라를 지키는 세 마리의 용이 물고기로 변한 우물이라는 뜻이며,
통일신라시대에 설치된 우물로,
조선시대에 와서 불교억압정책에 따라 사찰내의 모든 돌부처의 목을 잘라 이 우물에 넣었던,
아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곳이며.
남아있는 통일신라시대의 돌우물 가운데 가장 크고 우수한 것이며, 현재에도 사용될 만큼 보존 상태가 양호합니다.
안쪽에는 정면 3칸에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구조의 보광전(普光殿)이 있어,
보광전(普光殿) 약사유리광여래를 모신 법당으로,
사찰에 따라 석가모니불이나 비로자나불을 모시기도 하는데,
보광전 에서는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319호로 지정된,
"분황사 약사여래입상(芬皇寺 藥師如來立像)"을 만나게 되어,
이곳의 불상은 원래 755년에 "강고내미"가 만든 약사불로 알려져 있으나,
당시의 원형은 거의 파괴되고 조선시대 광해군 때에 새로 보수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으며,
얼굴은 넓적하고, 법의는 두껍고, 조각수법이 전체적으로 투박해 조선 후기의 양식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분황사(芬皇寺)는 왕분사(王芬寺)라고도 하며,
자장과 의상 그리고 원효가 설법 하면서 명성을 떨쳤으며,
신라십성(新羅十聖) 가운데 3명의 대사가 주석한 사찰로,
솔거가 그린 분황사의 관음보살이 유명 합니다.
국보 문화재인 "경주 분황사 모전석탑(慶州 芬皇寺 模塼石塔)'를 만날수 있으며,
원효(元曉)대사의 유허인 "화쟁국사비부"를 살필수 있고,
세 마리의 호국룡의 이야기를 통하여 통일 이후에 당나라와의 관계도 유추 할수있는 석정(石井)을 비롯하여,
살펴보고 돌아볼것이 많은 사찰로 경주의 "분황사(芬皇寺)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