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천을 여행하면서,
영천의 보물문화재인 숭렬당(崇烈堂) 을 찾았습니다.
영천시내인 성내동에 자리한 숭렬당(崇烈堂)의 입구로,
외문과 내문사이를 크지않은 규모 이지만 숭렬공원으로 꾸며놓아 시민들이 휴식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습니다.
소공원에는 앞쪽에는 "포은 정몽주 선생 자당 변 한국대부인 영천이씨 추모비(圃隱 鄭夢周 先生 慈堂 卞 韓國大夫人 永川李氏 追慕碑)" 와,
안쪽에 숭렬당의 주인인 우군 우절제사 이순몽 장군 개선 송덕시비로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
영천이공 시 위양 휘 순몽 신도비(永川李公 諡 威襄 諱 順蒙 神道碑)" 가 자리해 있습니다.
숭렬당(崇烈堂)으로 들어가는 내문으로,
위양공(威襄公) 이순몽[1386~1449]의 본관은 영천이며 조선 전기 세종 때의 무신으로,
대마도와 여진족 정벌에서 큰 공을 세워 복장군(福將軍)이라 불렸습니다.
이순몽은 1417년 무과에 합격해 의용위 절제사(義勇衛節制使)·우군 절제사(右軍節制使)·도총제(都摠制) 등을 거쳐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를 지냈으며,
세종의 총애를 받은 인물로 사후 위양(威襄)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저서로는 『위양공실기(威襄公實記)』가 전하고 있습니다.
내삼문을 들어서면 왼쪽에 작은 건물이 있으며 창고와 이곳을 관리하는 관리사로 보여집니다.
보물 제521호로 지정된 조선시대의 건물 숭렬당(崇烈堂) 입니다.
조선 세종 때에 무신으로 활동하면서 쓰시마[對馬島]와 여진 정벌에 나섰던 이순몽(李順蒙, 1386~1449)이 살았던 살림집으로,
1433년(세종 15)에 중국식으로 지은 건물입니다.
숭렬당(崇烈堂) 현판은 동농 김가진의 글씨로,
김가진(金嘉鎭, 1846~1922)은 조선 말기의 문신, 독립운동가로 독립협회 창설과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참여하였던 인물입니다.
숭렬당 건물에서는 규모가 큰 익공, 건실한 기풍의 초새김[草刻], 행공(行工)과 배바닥의 간략한 초새김 등이 특이한데,
이것은 조선 초기의 건축구조 이지만 조사에 따르면 18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이 되는데,
숭렬당은 구조가 조선 전기의 수법을 보이고 있지만 일부 재료의 정교하고 아름다운 조각들이 조선 후기의 수법을 보여주고 있으며,
조사결과 몇차례 수리가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전반적으로로 검소하고 건실하게 지은 집입니다.
숭렬당의 대청 마루에는 여러개의 현판등이 보이는데,
이곳을 보수또는 중수하면서 올린듯한 상량문의 현판도 보이고..
숭렬당(崇烈堂) 현판 뒤의 향사당 입규(鄕射堂 立規) 현판으로,
이 현판은 향사당에 출입하는 사람들의 향규(鄕規)를 적어놓은 것으로서,
광해군 6년(1614)에 복재(復齋) 정담(鄭湛 1552~1634)이 지었으며 크기는 126㎝×32.5㎝로 총 1091字가 음각되어있습니다.
향규는 전문과 규약 10조 및 후기(後記)로 구성되어 있는데, 내용은 17세기초 영천 사림이 전란 후 사회기강을 확립하려는 의도를 집약하고 있으며,
당시의 사회적 상황과 조선시대의 향촌사회가 변화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어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17호로 지정이 되었습니다.
현판대신 액자에 넣어 숭렬당의 역사를 전해주는 자료도 있으며,
경기도 양평군 개군면 공세리에 있는 이순몽의 묘소의 사진도 자료로 걸려있는데,
참고로 이순몽의 묘소는 전형적인 조선 전기 양식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합니다.
이곳의 건물의 배치는 강당인 숭렬당과 위패를 모신 사당으로 나뉘는어 지는데,
맨 앞쪽의 남문(南門)과 숭렬당·후문(後門), 그리고·사당이 남북 일직선에 자리하고 있으며,
건물의 주변에는 막돌을 섞어 쌓은 토담이 남문부터 시작하여 둘러져 있고,
후문부터는 동서로 또 다른 안쪽 담을 둘러 전당후사(前堂後祠)의 건물 배치를 보여고 있는데,
이순몽은 아들이 없고 딸만 있었던 탓에 후손이 끊어져 안채는 없어졌으며 제향은 유림에서 대신하고 있습니다.
이곳의 마루는 방앞과 대청마루, 대청앞의 마루의 높이가 3단으로 나누어 구성 되었슴을 볼수있고,
기단 위에 다듬지 않은 둥글고 넓적한 자연석을 주춧돌로 놓고서 그 위에 둥근 두리기둥을 세워 건물의 기초를 잡았습니다.
숭렬당의 건물 양쪽에는,
온돌방 1칸씩을 두었는데 퇴량이 부섭지붕을 따라 결구되어 있으며,
방이 딸린 앞면의 내기둥 위의 공포에 용두를 조각하여 한결 아름답게 꾸몄습니다.
숭렬당의 구조를 살펴보면 앞면 5칸 중에 가운데 3칸 위에는 맞배지붕이 올려져 있지만,
좌우 툇간 위의 지붕은 가적지붕으로 처리하여 특이한 모습을 보여주는데,
가적지붕은 바깥쪽으로 경사가 진 편사(偏斜)지붕으로 대체로 영천 지방에서 볼 수 있는 것으로,
맞배지붕이 팔작지붕으로 변형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여수의 진남관 이나, 통영의 세병관과 같은 군사용 건물에서 느껴지는 것 같이,
집주인인 이순몽이 무인 으로서의 웅장함과 기개를 넉넉히 느낄수 있는곳으로,
조선 초기의 건물로 고려시대의 건축 형상을 살펴볼수 있는 몇 안되는 건물중의 하나라는데 가치가 있다고 합니다.
숭렬당 뒤에 자리해 있는 위양사(威襄祠)입니다.
사당인 위양사(威襄祠)로 들어가는 문또한,
외삼문으로 되어있어 사당의 주인인 혼백과 제례나 방문객을위한 문을 따로이 사용하게 해두었습니다.
위양사(威襄祠)는 위양공의 사저(私邸) 숭렬당 경내에 있는 이순몽(李順蒙)의 묘우(廟宇)로,
1614년 광해조에 영천 사림과 방손들이 건립했는데 1759년(영조 35년)에 새로이 중창을 하였다가 2004년에 다시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사당의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규모로 되어 있으며,
위양사(威襄祠)의 현판 입니다.
불천위에 오른 이순몽(李順蒙)은 후손이 없는까닭에,
지방 사림의 주관으로 후손을 대신해 춘추 제향을 올리고 있습니다.
위양사의 사당 옆마당에 누워서 자라고 있는 향나무의 모습으로,
들어서면 조선시대의 관청에 들어온 착각을 일으키게도 하는 아름다운 목조 건출물인,
영천의 보물 문화재 "숭렬당" 방문기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