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에 있는,
봉화의 빼어난 정자, 청암정(靑巖亭)을 찾았습니다.
봉화 청암정(靑巖亭)은,
석천정사(石泉精舍)가 있는 석천계곡(石泉溪谷)과 더불어 명승 제60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청암정(靑巖亭)을 찾으며 옆에 있는,
권벌(權橃)의 호를 따서 세운 충재(冲齋) 박물관이 있어 먼저 들러 봅니다.
조선 전기의 문신이자 학자 권벌(權橃,1478~1548)의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중허(仲虛) 호는 충재(冲齋)·훤정(萱亭)·송정(松亭)이며,
지금의 안동시 북후면 도촌리인 도지촌(刀只村)에서 태어 났으며,
중종조 조광조(趙光祖)·김정국(金正國) 등 기호사림파가 중심이 되어 추진한 개혁 정치에 안동 사림파의 한 사람으로 참여하였으며,
사림의 도학정치를 주장 하였던 인물로,
1496년(연산군 2) 생원시에 합격하고 1507년(중종 2)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예문관검열·홍문관수찬·부교리·사간원정언 등을 역임 하였고,
1513년 사헌부지평으로 재임할 때 당시 신윤무(辛允武)·박영문(朴永文)의 역모를 알고도,
즉시 알리지 않은 정막개(鄭莫介)의 당상관계(堂上官階)를 삭탈하도록 청하여 직신(直臣)으로 이름을 떨쳤으며,
1514년 이조정랑에 임명되었고 그 후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영천군수에 임명 되었고,
1519년 예조참판이었을 때 조광조를 비롯한 사림들이 왕도정치를 극렬히 주장하자,
기호 지역 사림파와 연결되어 훈구파와 사림파 사이를 조정 하려고 하였으며,
이후 아버지가 연로하고 병이 있음을 들어 삼척부사를 자청하여 나갔고,
1519년 11월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파직당하고 귀향 하여,
1520년 43세 때 안동부(安東府) 내성면(乃城縣) 유곡(酉谷)에 은거 하였다가 1533년 복직되어 용양위부호군에 임명 되었고,
밀양부사를 거쳐 1537년 12월 한성부좌윤이 되었고 이듬해 2월 경상도관찰사 10월에는 형조참판에 임명 되었으며,
1539년 3월에 병조참판에 임용되고 6월 한성부판윤에 올랐으며,
그해 7월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일로 주청사(奏請使)가 되어 동지사 임권(任權)과 함께 명나라에 갔다가 이듬해 2월에 돌아 왔습니다.
1545년(인종 1) 5월 의정부우찬성이 되었고 7월 명종이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원상(院相)에 임명되어 활동하였고,
같은 해 8월 이기(李芑), 정순붕(鄭順朋), 허자(許磁), 임백령(林百齡) 등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 세력이 대윤(大尹) 윤임(尹任) 세력을 배척하자,
이에 반대하여 윤임, 유인숙(柳仁淑), 유관(柳灌) 등을 적극 구하는 계사(啓辭)를 올리기도 하였으며,
곧이어 위사공신(衛社功臣)에 책록되고 길원군(吉原君)에 봉해졌으나,
같은해 9월 우의정 이기, 우찬성 정순붕 등이 자기들과 논의가 다르다고 반대하여 삭훈 되었고 10월 사헌부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파면 되었습니다.
1547년 양재역 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처음 구례로 유배지가 결정되었으나,
곧 태천(泰川)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삭주(朔州)에 이배되어 이듬해인 1548년 유배지에서 졸 하였습니다.
권벌(權橃)은 조정에 있는 동안 경연시독관·참찬관 등으로 왕에게 경전을 강론하기도 했으며,
평소 독서를 좋아해 "자경편(自警篇)"과 "근사록(近思錄)"을 항상 품속에 지니고 다녔다고 하며,
1567년(명종 22)에 신원(伸寃)되었고 선조 즉위 후 직첩을 돌려받고 1568년 좌의정에 추증 되었고,
1588년 삼계서원(三溪書院)에 제향되고 후에 현종때 사액이 내려 졌으며,
1591년(선조 24) 대명회전 (大明會典)이 수정되어 이성계의 아버지가 이인임에서 이자춘으로 수정되자,
그는 조선의 종계(宗系)가 바로잡히게 한 데 노력한 공으로 광국원종공신 1등에 녹훈 되었다가 다시 증 의정부영의정에 추증되고,
그 해 불천위(不遷位)로 지정 되었으며 문집에 "충재문집 (冲齋文集)"등이 있습니다.
박물관에는 청암정(靑巖亭)과 석천정사(石泉精舍) 및 닭실마을의 현판과 물품등을 도난에 대비해 한곳에 모아 전시해 두어,
2개가 한쌍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옛날 닭실마을에서 혼례식에 사용했던 물품이며,
보물 902호 청암정(靑巖亭)에 있던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쓴 전서체의 청암수석(靑巖水石)의 현판으로,
허목은 권벌의 인품을 존경했고 청암정이 아름답다는 이야기를 누차 들었기에 한번 찾아가 보려 했으나,
너무 연로해서 봉화까지 갈 수 없는 처지여서 허목(許穆)은 아쉽고 그리운 마음을 담아 글씨를 써 보냈는데,
그때 그의 나이가 88세로 이 글씨는 1682년(숙종 8) 초여름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죽기 3일 전에 쓴 것으로 그의 마지막 글씨로 알려져 있습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석천정사(石泉精舍)의 주인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에게 써준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의 시문(詩文) 편액으로,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 2수중 2수로,
酉谷先公卞宅寬(유곡선공변택관) 선공이 닭실에 집터를 점지하니
雲山回復水灣環(운산회복수만환) 구름 걸린 산 둘러 있고 다시 물굽이 고리처럼 둘러있네.
亭開絶嶼橫橋入(정개절서횡교입) 외딴 섬에 정자 세워 다리 가로질러 건너도록 하였고
荷映淸池活畵看(하영청지활화착) 연꽃이 맑은 연못에 비치니 살아있는 그림 구경하는 듯하네.
稼圃自能非假學(가포자능비가학) 채마밭 가꾸고 나무 심는 것은 배우지 않아도 능했고
軒裳無慕不相關(헌상무모불상관) 벼슬길 연모하지 않아 마음에 걸림 없었네.
更燐巖穴矮松在(경인암혈왜송재) 바위 구멍에 웅크린 작은 소나무가 있어
激勵風霜老勢盤(격려풍상노세반) 풍상의 세월 격려하며 암반 위에 늙어가는 모습 더욱 사랑스럽구나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의 "제석천정사(題石泉精舍)"로 석천정사(石泉精舍)에 있었던 편액으로,
肩輿溪上路(견여계상로) 작은 가마가 지날 수 있는 시내가 길가에
書舍水雲間(서사수운간) 글 읽는 정사가 물과 구름 사이에 보이네
風雨三秋夜(풍우삼추야) 깊은 가을밤에 내린 비바람과
煙霜十月寒(연상시월한) 뿌연 서리에 시월의 공기 차갑구나
葉稠巖竇密(옆조암두밀) 나뭇잎은 떨어져 바위틈에 빽빽하고
苔厚石稜斑(태후석능반) 이끼는 바위틈에 두껍게 끼여 아롱졌네
百歲徜徜地(백세상상지) 백세토록 조상께서 거니시던 이곳에
親朋幾往還(친붕기왕환) 친한 벗들 얼마나 오갔던고
석천정사(石泉精舍)의 현판으로,
조선중기의 문신이자 서예가인 송재 송일중(松齋 宋一中,1632~1717)의 글씨이며,
닭실마을의 옛 생활 도구들도 전시 되어 있으며,
보물 제 901호로 지정되어 있는 왕의 명령서인 유지(有旨)와,
충(忠)자 족자는 권벌(權橃)이 중국 명나라의 사신으로 다녀 올때 명 나라의 태조가 직접 써 건네준 것이라 합니다.
박물관을 나와 협문을 통하여 청암정(靑巖亭)으로 들어 갑니다.
하당(荷塘) 권두인(權斗寅, 1643~1719)의 "청암정 기문(靑巖亭 記文)에,
"정자의 북쪽에 바위가 높다랗게 솟아 높이가 약 한 길 가량으로 그 색이 매우 푸르렀기 때문에 청암(靑巖)이라 이름 했다"고 적고 있으며,
척촉천(擲燭川)이라 불리는 연못에는 돌다리인 석교(石橋)가 놓여 있고,
돌다리를 건너면 거북바위인 구암(龜巖)이고 바위 위 돌계단인 석계(石階)를 오르면 정자인 청암정(靑巖亭)에 오르게 됩니다.
청암정은 충재(冲齋) 권벌(權橃,1478~1548)이 닭실마을에 종가를 지으면서 조성한 정자로,
1526년(중종 21) 거북 모양의 너럭바위 위에 세워졌으며 구암정(龜巖亭)이라 했다가 청암정으로 바꿨으며,
당시에는 마루만 6칸으로 아궁이가 없었으나 뒷날 큰아들 청암 권동보(權東輔, 1518~1592)가 방을 2칸 늘려 지었으며,
정자 주변에 못을 판 후 냇물을 끌어들여 물을 채워놓고,
장대석으로 좁고 긴 돌다리를 축조해 정자에 다다를 수 있도록 해 두었으며,
청암정은 바위를 평평하게 다듬지 않고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살리면서 주춧돌과 기둥 길이를 조정하여 지은 집으로,
주추의 높이가 각각 다른 구조를 가지고 있어 자연을 활용하여 정자를 세운,
옛사람들의 지혜와 자연암반을 이용하여 청암정을 짓고 주위에 연못을 만든 매우 탁월한 조경기법을 볼 수 있습니다.
청암정(靑巖亭)은 "정(丁)"자 형으로 마루가 6칸이고 방이 2칸이며 방의 좌우에는 누마루가 있어,
정자의 마루에 오르면 사방이 탁 트여 있고 자연이 한눈에 들어와,
호방한 선비의 기상을 느끼게 하며 높다란 누마루는 주변 경치를 느끼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청암정(靑巖亭)은 평소 돌다리를 막고 정자에는 오르지 못하게 하고 있으나,
마침 이곳에 계신 젊은 후손의 배려로 석계(石階)를 따라 청암정(靑巖亭)에 오를수 있어 다행 입니다.
6칸의 너른 마루에는 현판과 여러 시문(詩文)과 기문(記文)들을 볼수있어,
해서로 쓴 청암정(靑巖亭) 현판으로,
매암(梅庵) 조식(曺湜·1526~1572)의 글씨로 알려져 있으며,
퇴계 이황(退溪 李滉, 1501~1570)의 "기제유곡청암정(寄題酉谷靑巖亭)"의 시문(詩文) 편액이 있으며,
예안인 민절공 백암 김늑이 차운(次韻)하여 지은 차운시(次韻詩) 시문(詩文)이며,
충재 박물관에서 보았던 미수(眉叟) 허목(許穆)의 절필(絶筆)인 전서(篆書)체의 "청암수석(靑巖水石)"의 현판으로,
미수는 청암수석 네 글자를 쓴 뒤 그 옆에 작은 해서로 다음과 같이 써 놓았습니다.
"청암정은 춘양 권충정공의 산수에 있는 옛집이다. 골짜기 수석이 가장 아름다워 절경으로 칭송되고 있다.
내 나이 늙고 길이 멀어 한 번 그 수석간에 노닐지는 못하지만, 항상 그곳의 높은 벼랑 맑은 시내를 그리워하고 있다.
특별히 청암수석 네 글자를 큰 글씨로 써보내니 이 또한 선현을 사모하는 마음 때문이다.
그래서 이 사실을 기록해 둔다. 8년 초여름 상완에 태령노인 쓰다.
(靑岩亭者 春陽權忠定公山水舊墻 洞壑水石最佳稱絶景 僕年老路遠 不得一遊其間 懷想常在高壁淸溪 特書靑岩水石四大字 亦慕賢之心也 識之
八年孟夏上浣台嶺老人書)
여기서 8년은 숙종 8년으로 1862년에 해당합니다.
정조의 어명으로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쓴 편액이 있고,
그외 2기의 차운시(次韻詩) 시문(詩文)과,
기문(記文)으로 보이는 1기의 편액을 찾아 볼수 있습니다.
정자의 마루방은 분합문(分閤門)을 두어 개방성을 더 하였고,
마루방의 뒤편은 판재에 판문을 설치하여 문을 열면 문틀과 함께 하나의 그림이 되게하는 효과를 두었으며,
청암정(靑巖亭)은 영화 "스캔들"과 사극 드라마 "바람의 화원", "동이"등에 배경이 되었는데,
사극 "정도전"의 배경이 된 청암정 에서는 정몽주와 정도전이 고려의 흥망성쇠와 조선의 개국을 놓고 설전을 벌이던 장소로 활용 되었습니다.
넌출문인 분합문(分閤門)은 들어 올려 두어야 정자의 멋이 더욱 살아 나는듯 하며,
정자의 마루에서 보이는 모습으로,
단아하고 간결한 충재(沖齋)의 모습이 들어 오고,
청암정(靑巖亭)이 자리하고 있는 거북바위에는 정자 뿐만 아니라,
다양한 조경수를 심어 가꾸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권벌(權橃) 사후에 청암정(靑巖亭)을 찾아,
큰아들 청암(靑巖) 권동보(權東輔)에게 써준 청암정제영시(靑巖亭題詠詩) 2수중 1수 입니다.
我公平昔抱深衷 依杖茫茫一電空 우리공이 깊은 뜻을 품었으나 좋고 나쁜 일들이 번 개처럼 지나가 버렸구나.
至今亭在奇巖上 依舊荷生古沼中 정자는 기암바위위에 서 있는데 못에서 피고 있는 연꽃은 옛모습 그대로일세.
滿目煙雲懷表樂 一庭蘭玉見遺風 아득하게 보이는 구름은 본래의 즐거움이요, 뜰에 자란 아름다운 난초는 바람에 향기로움을 더하네.
取生幾誤蒙知奬 白首吟詩意不窮 나같은 부족한 사람이 공의 은덕에 힘입어 흰머리 날리며 글을 읊으니 감사한 마음 끝이 없어라
청암정이 놓여 있는 너럭바위는 물속에 떠있는 거북으로 비유되어,
물속에 거북이가 자리하고 있고 그 위에 정자가 놓인 형상 이라는 것이며,
정자 한쪽에 마련된 방에는 마루가 깔려 있어 처음에는 온돌방으로 꾸며졌고 바위 둘레에 연못도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집을 짓고 난 후 온돌방에 불을 지폈는데 바위가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하여,
이러한 현상을 괴이하게 여기던 차에 한 스님이 이곳을 지나다가 이 바위를 가리켜 거북바위라고 말하고,
정자의 방에 불을 지피는 것은 거북이 등에다 불을 놓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하여 아궁이를 막은 다음 주변의 흙을 파내고 물을 담았다고 하여,
이렇게 물을 담아 줌으로써 청암정을 등에 지고 있는 거북이가 살기 좋은 지세를 만들 수 있었다고 합니다.
청암정(靑巖亭)은 "丁"자 형으로 되어 있으며,
마루공간으로 되어있는 팔작지붕과 방을 들이고 양쪽에 누마를를 둔 맞배지붕의 구성은,
절묘한 조화와 우리 건축불의 아름다움을 보여 주는듯 합니다.
청암정(靑巖亭)이 있는 닭실마을은 "금닭이 알을 품고 있다"는 금계포란지국(金鷄抱卵之局)의 명당으로 유명한데,
닭실마을은 오늘날 유곡리(酉谷里)에 해당하며 "유곡"이란 "닭실"을 한자로 그대로 옮긴 말로 "금계포란"의 풍수형국에서 유래한 마을 이름이며,
마을 이름이 닭실인 것은 동쪽의 옥적봉이 수탉을 닮고 서쪽의 백운령이 암탉을 닮았기 때문이라고 하며,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이 "택리지(擇里志)"에서 4대 길지 중 하나라고 칭송한 명당 이기도 합니다.
청암정(靑巖亭) 정원은 사대부가의 별당 정원으로 고택 한쪽에 담을 둘러 별도 공간을 조성 했으며,
원래 있던 커다랗고 넓적한 거북 모양의 바위 위에 정(丁) 자 모양의 정자를 짓고 그 주위로 연못을 조성한 정원으로,
정원은 척촉천(擲燭川)이라 불리는 연못을 사이에 두고 충재(沖齋)와 청암정(靑巖亭)두 건물이 마주하고 있어,
이중환(李重煥)은 택리지(擇里志)에서,
"청암정은 못 가운데 섬 같은 큰 돌 위에 있고, 사방으로 냇물이 고리처럼 감고 흘러 자못 경치가 그윽하다"고 표현 하였습니다.
청암정 곁에는 아름다운 정자와 짝을 이뤄 하나의 연결된 건축이 되는 특별한 집으로 충재(冲齋)가 있어,
독서당인 충재(沖齋)는 권벌(權橃)의 호(號)지만 이곳에서는 당호로 쓰이며,
권벌(權橃)은 평소 충재(沖齋)에 거처했는데 평생 "근사록(近思錄)"을 즐겨 보아서 충재에 "근사재"라는 현판을 걸었다고 하며,
독서당 3칸집 충재는 선비의 공간인 만큼 단아하고 간결하여 충재와 청암정은 아주 대조적 입니다.
우선 건물 규모부터 달라서 충재가 방 2칸에 마루 1칸의 소박한 건물이라면 청암정은 방 2칸에 마루 6칸에 별도의 누마루까지 갖춘 호화로운 건물이고,
충재가 온돌 중심의 내향적인 서재로 낮은 곳에 있다면 청암정은 마루 중심의 외향적인 정자로 높은 곳에 있으며,
충재가 맞배지붕의 단아함으로 깊이 은둔한 형상이라면 청암정은 팔작지붕의 화려함으로 선계로 비상하는 형상이고,
충재가 주인이 학문을 연구하고 자신을 수양하는 서재였다면 청암정은 손님을 맞이하고 풍류를 즐기는 누정 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충재(沖齋)는 집 중에서 가장 작은 집인 3칸집으로 흔이 말하는 초가삼간의 삼칸으로,
한옥 중에서 가장 작은 집으로 왼쪽부터 마루 한칸과 방 한칸 그리고 약간 덧붙인 부엌이 있으며,
지붕인 맞배지붕은 가장 단순한 형태여서 집은 최소한의 규모이고 가장 간결한 양식여서,
모든 것을 최소화 하고 모든 것을 절제하려 한 집으로 선비의 이상을 엿볼수 있으며,
마루를 보면 일부러 한 쪽에 벽을 만들어 벽을 낸 쪽은 청암정을 바라보는 쪽여서 마루에서 홀로 공부하고 책을 읽다가 정자가 보고 싶어지면,
판벽에 있는 판재의 창문을 열면 창문이 액자가 되고 그 안에 청암정(靑巖亭)이 바라 보이는 절묘함이 있습니다.
충재(沖齋)으 마루앞에는 석천정사(石泉精舍)에서 보았던 형태의 석물이 있어,
돌의 상부에 소나무잎을 뭉친 솔갑을 놓고 태우면 밤에 불을 밝히는 용도로 보여 집니다.
낮은 언덕의 암반위에 지은 단순한 정자로 남을수도 있었지만,
주변의 연못을 파고 물을 들여 거북바위에 생명을 불어 넣어 더욱 아름답고 빼어난 정자로 명승의 반열에 오른 곳으로,
금계포란(金鷄抱卵)의 길지에 자리하였고 충재(沖齋) 권벌(權橃)의 생을 돌아 볼수 있는 곳으로,
경북 봉화의 빼어난 정자, 청암정(靑巖亭) 방문기 입니다.
석천계곡에 있는 석천정사(石泉精舍)의 내용은 아래에 따로 올려 둡니다.
봉화의 명승, 석천정사_1812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