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종로구 세종로 경복궁 내에 위치한 국립민속박물관은,

민족의 전통 생활문화를 느끼고 체험할 수 있는 "한국 생활문화의 집약체"로,

 

역사책이 다루지 않는 옛 사람들의 생활을 한눈에 그려볼 수 있는 곳으로,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 관람의 4번째 이야기로,

"제3 전시관"은 옛사람들의 일평생을 들여다 볼수 있는 "한국인(韓國人)의 일생(日生)"편 입니다.

 

 

 

한국인(韓國人)의 일생(日生)을 들여다 볼수있는 "제3 전시관"을 들어서면,

혼례에 사용하는 가마의 모습이 보이고,

 

 

 

신방의 모습으로 신혼부부가 베는 베개와 이불에는 한 쌍의 원앙새를 수놓은 원앙금침(鴛鴦衾枕)이 있어, 

원앙금침을 덮고 원앙새처럼 금슬 좋고 다복하게 살라는 바람을 담았다고 하며,

 

 

 

깃을 달지 아니한 갓난 아이의 저고리인 "배냇저고리"가 진열되어 있어,

아기의 탄생을 의미하는 배냇저고리는 아이가 태어난 뒤에 처음으로 입히는 옷이기 때문에 보온과 위생에 중점을 두고,

혈액순환도 잘되고 활동도 자유로이 할수있도록 하는 동시에 입히고 벗기기 쉽도록 넉넉하고 간편하게 되어 있으며,

 

 

 

돌잔치는 어린아이의 첫 번째 생일을 축하하는 의식으로,

백일과 더불어 유아의 앞날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한국의 풍습으로,

돌잔치의 "돌"은 열두 달을 한 바퀴 돌았다는 의미이며 옛날에는 돌을 넘기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많았기 때문에,

1년을 넘겼으면 앞으로도 무사히 살아남는다는 뜻으로 잔치를 치렀던 것이 현재까지 내려오고 있습니다.

 

 

 

"친영(親迎)"의 모습을 디오라마로 표현 해두어,

친영(親迎)이란 신랑이 신부집에서 신부를 맞아와 자신의 집에서 혼인을 진행하는 절차로,

신랑이 신부를 데려오는 모습이 표현되어 있고,

 

 

신부가 타는 가마인 "사인교(四人轎)"로,

사인교는 4명이 멜빵에 장대를 걸어서 어깨에 메게 되어 있으며 민간에서 혼례 때에 신부가 타고왔던 가마 입니다.

 

 

 

혼인을 지내는 전통혼례의 예식인 "초례(醮禮)"의 모습으로,

예식을 올리기 위해 대청 또는 마당에 초례청을 만들어 두고,

신랑과 신부가 혼례복으로 초례상을 마주하여 절을 하고 술잔을 서로 나누는 예식입니다.

 

 

 

전시실에는 모형뿐만 아니라,

성장하면서 혼례를 하고 학문을 익히는 등의 옛사람들의 생을 들여다 볼수있는 다양한 전시물이 있어,

 

 

 

용와(慵窩)의 현판으로 조선 후기의 문인·서화가·양명학자인 원교(圓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의 글씨로,

경북 구미  일선리에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인 전주류씨(全州柳氏) 집안의 "용와종택(慵窩宗宅)" 사랑채의 당호 편액(扁額)으로,

용와종택은 1710년(숙종 36)에 용와 류승현(柳升鉉, 1680~1746)이 지은 고택(古宅) 입니다.

 

 

 

"용와치제문 현판(慵窩致祭文 懸板)"으로,

1891년(고종 28) 4월 3일에 고종이 군위현감 김요협(金堯莢)을 보내어 류승현의 사당에 올린 제문으로,

이를 현판으로 만들어 사당에 걸어 두었는데 용와 류승현(柳升鉉, 1680~1746)과 양파 류관현(柳觀鉉, 1692~1764) 형제를 중심으로,

아버지에서 아들로 이어지는 가계 계승과 가족 간의 교육을 통해 집안 대대로 다져진 학문(家學)의 전승(傳承)이라는 의미로 전시하고 있으며,

 

 

 

"용와 류승현 추증교지(慵窩 柳升鉉 追贈敎旨)"로,

통정대부 공조참의 류승현(柳升鉉)을 이인좌의 난에 공이 있다는 채제공(蔡濟恭)의 건의로,

그가 죽은 후 1788년(정조12년) 가선대부 이조참판으로 추증한 교지(敎旨)이며,

 

 

 

한주 이진상(李震相, 1818~1886)의 글씨인 "수정재(水晶齎)"의 현판으로 류정문(柳鼎文)의 사랑채 당호로,

아버지 류봉시의 가르침을 받은 류승현은 가계(家系)를 계승하면서 가족 간에 스승과 제자가 되어 가학을 형성하고 이를 후대에 전승 하였는데,

류승현의 아들 노애 류도원(柳道源, 1721~1791), 손자 호곡 류범휴(柳範休, 1744~1823), 증손자 수정재 류정문(柳鼎文, 1782~1839),

3대가 연이어 학문과 덕행으로 천거되었고, 연이어 용와집, 노애집, 호곡집, 수정재집 등 문집을 대(代)마다 간행 하였습니다.

 

 

 

"벽간정(碧澗亭)"의 현판과 "만자문 능화판(卍字紋菱花板)"과 인쇄를 위한 상변통고(常變通攷) 목판 등이 진열되어 있어,

벽간정(碧澗亭)은 호고와(好古窩) 류휘문(柳徽文)의 정자에 붙인 초서체 글씨의 현판이며,

류휘문은 삼산종가에서 분가하여 살면서 1800년 안동시 예안면 주진리에 벽간초당을 짓고 독서와 저술을 하였고,

만자문 능화판(卍字紋菱花板)은 출판인쇄도구 옛 책의 표지를 장식하는 능화판에 새겨진 전통문양으로,

능화판 문양은 만자문(卍)을 비롯해 꽃, 나비, 새, 용 등 다양한 길상 문양으로 이뤄져 있어,

교육을 통하여 집안 대대로 다져진 학문(家學)이 전승(傳承)되어 왔슴을 알수 있습니다.

 

 

 

"주자서절요(朱子書節要)"로 조선 중기의 학자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이,

주희의 책 주자전서에 수록된 편지 중 사상적으로 중요한 부분을 추려서 간행한 책으로,

조선 시대 주자학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으며 회암서절요(晦庵書節要)라고도 불리고 있습니다.

 

 

 

"만우정(晩愚亭)"의 현판으로 병조참판(兵曹參判)을 지낸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이,

만년에 후진을 양성하기 위해 강학지소(講學之所)로 고종 22년(1885)에 지은 정자로,

만우정(晩愚亭)의 현판은 조선 후기의 문신 이원조(李源祚)의 글씨 입니다.

 

 

 

탄와(坦窩) 김진화(金鎭華)의 글씨인 "정재(定齋)"의 현판으로,

정재(定齋)는 1735년(영조 11)에 창건한 정재(定齋) 류치명(柳致明, 1777~1861)의 종택인 정재종택(定齋宗宅)의 사랑채의 당호 입니다.

 

 

 

덮개가 없고 의자형으로 생긴 작은 가마인 "남여(藍輿)"의 모습으로,

죽여(竹輿)·죽교(竹轎)·담자(擔子)·두자(兜子) 등의 이름으로도 사용 되었으며,

초헌과 비슷한 의자의 양쪽으로 긴 나무가 붙어 있어 앞뒤에서 4명이 어깨에 메고 가도록 되어 있으며,

고위관리나 그 정실부인들이 타고 다녔던 가마 입니다.

 

 

 

조선조 관리의 한부분인 무관(武官)으로,

무반직(武班職:西班)을 가진 관리 군사업무를 전문으로 하는 관원을 이르며,

조선 후기의 무신(武臣)으로 1800년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역임했던 민광승(閔光昇) 초상화와 복장이 진열되어 있으며,

 

 

 

문사를 담당한 관리인 "문관(文官)"으로 무관에 대응하는 말로 문신이라고도 하며,

"문존무비"의 풍조 때문에 무관보다 문관이 중시되었는대 문관이 영의정 이하 중요관직과 군사요직까지 독점하고,

외적침입이나 내란 등의 비상사태에서도 지휘부대의 총지휘관이 되었으며 품계에 따른 호칭도 문관은 4품 이상이면 대부라고 불렀는데,

무관은 2품 이상이 되어야 대부라고 불렀고 실제로 4품의 문관과 2품의 무관을 비슷하게 취급 했으며,

조선 중기의 문신 권협(權悏, 1553~1618)의 초상화로,

1592년 임진왜란 때는 장령으로 서울을 굳게 지킬 것을 주장 하였고,

1596년에 교리·시강관을 지냈으며 1597년 예문관응교로 있을 때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고급사가 되어 명나라로 가서 원병을 청하였으며,

귀국 후 호조참의를 거쳐 1604년 대사헌이 되었고 선무원종공신 3등으로 길창군에 봉해졌습니다.

 

 

 

1887년의 "만인산(萬人傘)"으로,

고종 24년 평안북도(자강도)에 있던 희천군(熙川郡) 사람들이 희천군수(熙川郡守)에게 바친 것으로,

고을 백성들이 비단을 일산(日傘) 모양으로 만들어서 가장자리에 여러 비단 조각을 늘어뜨려,

유지들의 이름을 기록하여 만든 물건으로 바르고 어진 정치를 베푼 수령의 덕을 기리는 뜻으로,

그 지역 수령에게 바쳐던 만인산(萬人傘) 입니다.

 

 

 

패옥(佩玉)과 후수(後綬)의 모습으로, 

패옥은 조선시대에 왕과 왕비의 법복이나 벼슬아치의 금관 조복(金冠朝服)의 좌우에 늘이어 차던 옥을 말하고,

후수(後綬)는 조복(朝服)·제복(祭服)시에 뒤로 늘어뜨리는 띠 장식으로 품계(品階)에 따라 수놓는 문양과 환(環)이 달라 진다고 합니다.

 

 

 

우리가 널리 알고 있는 장기(將棋)와 바둑으로,

우리나라를 비롯한 동남아 지역의 대부분의 나라들에서 남녀노소가 즐겨하는 놀이로,

장기는 흔히 볼 수 있는 놀이였지만 바둑은 농촌이나 서민 에게는 어려운 기구로,

바둑은 장기보다 수가 복잡하고 바둑판과 바둑알을 마련하는 것이 쉽지 않았기 때문이라 합니다.

 

 

 

한국 전통놀이의 하나인 "쌍륙(雙六)"으로,

2개의 주사위를 던져 나오는 사위대로 말을 써서 먼저 궁에 들여보내는 놀이로,

다듬은 나무 말을 쥐고 논다고 하여 악삭(握槊)이라고도 하며 중국에서 전래되어 백제시대에 널리 행해졌으며 정초나 명절에 즐겨 놀았던 놀이 입니다.

 

 

 

조선조 선비사회에서 널리 유행하였던 "풍류(風流)"로,

풍류도(風流道)라고도 하여 유(儒)·불(佛)·선(仙) 3교를 포함한 한국 고유의 정신을 나타내는 말로,

선비사회에서 풍류는 생활화 되어 있고 또 독특한 그들의 문화를 형성하고 있어,

이들은 관념적으로는 풍류를 통하여 자연과 합일하는 것을 최대한 따르고 있었으며,

실제적으로는 흥청거림·표출·발산에서 얻을 수 있는 즐거움도 매우 중시하고 있었습니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은 냇물이 흐르면 계정(溪亭)을 짓고, 냇물이 없는 동산에는 산정(山亭)을 지어 풍류(風流)를 즐겼는데,

"열운정(悅雲亭)"의 정자 편액(亭子 扁額)으로 편액은 정자의 건축물에 널빤지에 글씨를 써서 거는 액자로 흔히 현판(懸板)이라 하며,

일반적으로 건축물 정면의 문과 처마·천장 사이에 건축물의 명칭을 쓴 액자를 일컬었으나,

넓게는 건축물과 관련한 묵객(墨客)들의 서화(書畵)가 담긴 현판도 편액이라 부르며 편액은 전(篆)·예(隷)·해(楷)·행(行)·초(草)로 그 서체가 다양하며,

개성 있고 정신성이 돋보이는 글씨에 이르기까지 선현들의 필적을 두루 살필 수 있습니다.

 

 

 

풍류(風流)에 빠질수 없는것은 음악으로,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현악기로 현금이라고도 하는 "거문고"로 우리나라 악기 중 음넓이가 가장 넓으며,

고구려 때(552년경) 왕산악이 중국 진나라의 칠현금을 고쳐 만든 것이라고 하며,

"가야금(伽倻琴)"은 우리나라 고유의 현악기로 가야국 현악기에서 유래 했으며 "삼국사기"에는 가야국의 가실왕이 만들었다고 전하며,

오동나무로 만든 좁고 긴 직사각형의 공명통 위에 명주실로 꼰 12개의 줄을 걸고 각 줄마다 기러기발을 받쳐 놓았습니다.

 

 

 

"대금(大笒)"은 한국의 전통악기 중 죽부(竹部)에 속하는 공명악기로,

"저" 또는 "젓대"라고도 하며 한자로 적(笛)으로 표기하기도 하며,

악기를 가로로 비껴들고 한쪽 끝부분에 있는 취구에 입술을 대고 입김을 불어넣어 소리를 내는 가로로 부는 대표적인 악기이며,

대금은 "삼국사기"에 중금(中笒)·소금(小笒)과 함께 신라 삼죽이라 하여 그 어휘가 처음 보이며,

우리나라에 들어온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중앙아시아나 중국 대륙에서 사용되던 것이 고구려에 전해지고 다시 신라에 받아들여져 정착된 듯 합니다.

 

 

 

사람의 일생(日生)에서 피해갈수 없는 것들중 하나가 질병으로,

조선시대 한의원의 모습을 재현해 두어,

 

 

 

"침구도(鍼灸圖)"는 침구(鍼灸)의 침과 뜸을 아울러 이르는 말로,

1600년(선조 33) 유성룡(柳成龍)이 편찬한 침구에 관한 의서(醫書) 침구요결(鍼灸要訣) 가운데 도설(圖說) 부분을 본떠 만든 인형으로,

인형의 경락과 경혈은 침술을 익히는데 중요한 교본이 되었다고 합니다.

 

 

 

배(舟)모양으로 생긴 약재를 가루로 빻거나 즙을 내는 의료기구 "약연(藥碾)"으로,

단단한 나무나 돌, 사기, 쇠 등으로 만들며 가운데 홈이 팬 배같이 생긴 그릇에 약재를 넣고,

축을 끼운 주판알 모양의 연알을 앞뒤로 굴려서 빻아 약재를 만드는 도구이며,

 

 

 

약탕기에 끓인 약재를 올려놓고 눌러 짜던 나무로 만든 의료기구인 "약틀"의 모습으로,

위판과 밑받침판으로 구분되어 있어 위판은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여 누름판 역할을 하고,

아래의 받침판에는 3, 4개의 다리가 있으며 약을 담아 짤 수 있는 홈과 구멍이 있어,

이 홈에다가 끓인 약재를 베헝겊으로 만든 약보자기에 싸서 올려놓고 누르면 구멍으로 약이 흘러내리는데,

이 구멍 아래에 약사발을 놓고 약을 받아 한약을 구하였습니다.

 

 

 

한의원에는 침술로 환자를 고치는 의원의 모습을 모형으로 재현해 두었고,

 

 

 

한약을 구하기 위해 약재를 준비하는 모습도 볼수 있으며,

 

 

 

질병을 다스리는 또다른 방법으로 굿을 하는곳인 "굿청"이 있어,

특별한 치료법이 없었던 조선시대에 돌림병 등의 질병을 예방하거나 다스리기 위한 방법으로,

무당을 불러 별상굿이나 호구굿을 하였는데 홍역을 다스리기 위한 "호구굿" 장면을 재현해 두었습니다.

 

 

 

어느듯 나이가 들어 받게되는 회갑상(回甲床) 차림으로,

회갑은 환갑(還甲)·주갑(周甲)·갑년(甲年)이라고도 하며 나이 예순한 살을 가리키는 말로,

회갑을 맞이해 자식들이 그 은혜에 감사하며 회갑을 축하하고 헌수(獻壽 : 장수를 비는 뜻으로 술잔을 올림)를 드리기 위하여 차린 상 입니다.

 

 

 

안쪽에 화려한 모습의 상여(喪輿)가 보여,

이제 고인을 보낼 장례(葬禮) 준비를 하여야 하나 봅니다.

 

 

 

먼저 수의(壽衣)가 진열되어 있어,

수의는 사람이 죽어 염습(殮襲)할 때 시신에게 입히는 옷으로,

우리 나라의 염습제도는 3∼4세기에 도입된 중국의 유교사상에 의하여 "예기"의 영향을 받기 시작하였지만,

고려말 주자학의 도입이후 14세기부터 주희의 "가례"가 본격적인 조선시대의 예의 기준이 되었고,

 

 

 

"수의척수발기(壽衣尺數發記)"로 상례 절차에 사용되는 수의(壽衣)의 명칭과 치수 등을 기록한 문서이며,

 

 

 

경북 예천의 초간정(草澗亭)으로 널리 알려진 조선 전기의 문신 권문해(權文海, 1534년~1591년)의,

"제망실숙인곽씨문(祭亡室淑人郭氏文)"으로 망자를 보내는 심정을 알수 있습니다.

 

 

 

죽은 사람의 묏자리를 선택하는 음택풍수(陰宅風水)로,

풍수지리학은 집과 건물의 터를 잡는 양택풍수와 묘 자리를 잡는 음택풍수로 나누는데,

양택(陽宅)은 산 사람의 거주지이며 음택(陰宅)은 죽은 사람의 안장지(安葬地)로 풍수사상은 우리나라에 깊숙히 뿌리내린 풍습이기도 합니다.

 

 

 

상례 때 시신(屍身)을 운반하는 기구 "상여(喪輿)"의 모습으로,

상례 때 쓰이는 운반기구는 시신을 운반하는 상여와 혼백을 운반하는 영여(靈輿)로 나누지만,

이 둘을 통칭하여 상여라고도 하지만 일반적으로는 앞의 것만을 이르며,

상여라는 말은 19세기 중엽 간행된 이재의 "사례편람"에 처음 나오는데 상여는 마을마다 공동기금으로 마련해,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상여집에 보관 했으며 상여를 메는 사람은 상여꾼·상두꾼·향도꾼이라 하여 마을 품앗이로 이루어 졌습니다.

 

 

 

유교식 상례인 "삼년상(三年喪)"으로 부모의 상을 당한 후 3년 동안 거상하는 의식으로,

3년상을 지키기 위해서는 묘역 근처에 초막을 짓고,

3년간 거주하면서 부모를 모셨는데 험하고 궂은 일을 피하고 화려한 의복은 물론 음식도 먹지 않으며,

부모에 대한 효도의 자세를 보여야 했으며 삼년상의 유래는 자신이 태어나기 전 부모의 품 안에 3년 동안 있는 데에서 유래 하였다고 합니다.

 

 

 

일반적으로 사대부의 종가(宗家)에서는 사당을 두어 제사를 지냈는데,

 

 

 

안동권씨(安東 權氏) 충재(冲齋) 권벌종가(權橃宗家)의 제사상 차림으로,

종가(宗家)의 불천위(不遷位) 제사상을 재현한 것으로,

불천위(不遷位)란 국가공신 혹은 덕망이 높은 자를 나라에서 정하여 제사를 지낼수 있도록 허락한 것으로서,

 

 

 

불천위(不遷位)는 조선초기 개국공신부터 후기까지의 덕망높은 자들이 선정 되었으며,

위대한 선조를 가졌다는 영예가 주어지기 때문에 문중에서는 명조(名祖)를 두었다는 점을 두고 자랑과 긍지로 여겼습니다.

 

 

 

국립민속박물관(國立民俗博物館)의 4번째 이야기로,

민속박물관의 제3 전시관인 "한국인(韓國人)의 일생(日生)" 편으로,

한국인의 일생이라는 주제를 갖고 한 생명이 태어나 삶을 마칠 때까지의 거치게 되는 다양한 의례를 소개하고 있어,

조선시대 양반가 사람들의 주요 의례 생활을 알 수 있었으며,

사대 중심의 양반가의 일생을 위주로 전시해 두어 서민등의 일생과 생활을 알기에는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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