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도 영월의 유적지를 돌아 보자면,

단종의 이야기를 빼놓고는 가볼만한곳이 얼마 남지 않을 정도로,

영월 여행의 큰자리를 차지 하고 있슴을 알수가 있습니다.

 

단종의 능인 "장릉"의 인근에 있는,

장릉의 원찰 보덕사와 금몽암을 돌아봅니다.

 

보덕사[報德寺]는,

영월군 영월읍(寧越邑) 발봉산(鉢峰山)에 있는 사찰로,

신라 때, 668(문무왕 8)년에 의상(義湘)이 창건하였다고 전하며,

조선시대에 와서 단종의 위패를 모셨다고 하며  단종 장릉의 원찰입니다.

 

 

 

 

사찰의 산문을 들어서면,

연으로 가득 채워진 연못과 전통찻집이 자리해 있어,

여유롭게 시간을 즐길수 있는 공간도 마련이 되어있습니다.

 

 

 

 

철이 지나버린 탓에,

연꽃의 향연은 볼수가 없지만

가을 햇살아래의 연의 향연도 운치가 있습니다.

 

 

 

 

400년을 넘기고 살아 왔다는..

아름드리 느티나무의 그늘을 지나면,

 

 

 

 

부처님 세계의 사방을 수호하는 사천왕문을 만나게 되고,

 

 

 

 

제각기 다른 네방향에서,

신물과 조화로서 악귀를 물리치는 사천왕상 입니다.

 

 

 

 

고운 자태의,

관음보살상이 찾아오는 중생들을 맞이 하는듯 산문을 향하여 서있고,

 

 

 

 

나즈막한 담장을 사이에 두고,

마치 불상의 형상을한 오래된듯한 돌이 나란이 서있습니다.

 

 

 

 

사천왕문에서 왼쪽에는,

보덕사에 오셨다면 반드시 들러야할곳이 있습니다.

바로 보덕사 해우소입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2층 형태를한 맞배지붕 건물로,

상량문(上樑文)에 따르면 1882년(고종 19년)에 지어졌다고 합니다.

내부는 앞뒤 2열로 분리하여 각각 6칸씩 볼일 보는 곳을 두었으며 남녀 사용을 구분해 두었습니다.

오래된 건물임에도 원형을 잘 유지하고 있어서 화장실의 기능을 변함없이 수행하고 있으며,

선암사(仙巖寺) 해우소와 더불어 문화재로 지정이 되었으며 흔치 않은 옛 해우소 입니다.

 

 

 

 

관리를 잘해서 인지,

120 여년을 자신의 역활을 충실히 하고있는 보기드문 해우소 입니다.

 

 

 

 

통풍을 위해서인지,

바깥벽면의 나무도 중간을 틔워놓은 모습도 보입니다.

 

 

 

 

칸은 나뉘어져 있으나,

별도로 문은 없어서 개방식 이며,

지붕도 완전히 노출이 되어있는 모습입니다.

 

 

 

 

해우소의 입구 이구요,

 

 

 

 

전통의 결구방식으로,

못을 사용하지 않고 목재를 짜맞춘 모습입니다.

 

 

 

 

경사진 면을 이용하여,

위에서는 단층의 모습이지만 바깥에서는 2층구조로 보여서,

마치 누각의 구조를 연상케하는 보덕사의 해우소 입니다.

 

 

 

 

이곳 보덕사는 평지에 사찰이 조성이 되어있어서,

마치 산아래의 작은공원에 들른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는곳 입니다.

 

 

 

 

단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사찰인 보덕사

보덕사는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봉되어 이곳 영월로 유배되어,

단종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보덕사 칠성각에는,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단종의 혼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단종의 영정을 모시고 있습니다.

 

 

 

 

조선 후기의 건축 양식을 보여주는 극락보전입니다.

극락보전 오른편에는 보덕사가 의상의 화엄도량으로 창건된 것임을 짐작케하는 부도1기가 있으며,

 

 

 

 

대웅전 격인 극락보전의 현판입니다.

 

 

 

 

아미타불(阿彌陀佛)을 중심으로,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을 협시불로한 목조아미타3존불이 모셔져 있으며,

불상의 뒤로는 색채가 고운 후불탱화가 병풍처럼 자리해 있습니다.

봉안된 삼존불은 목조불로 알려져 상당한 문화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태백산 산신령이 되었다는 단종의 혼령을 추모하기 위하여,

단종의 영정을 모시고 있다는 산신각입니다.

 

 

 

 

 

산신각의 내부에는,

어느 사찰에서나 볼수있는 산신과 호랑이의 탱화가 있으며,

 

 

 

 

 

건물 내부 우측 벽에는, 백산신으로 추앙된 단종과, 그에게 산머루를 바치는 추익한(秋益漢)의 모습이 담긴 그림이 있습니다.

 

 

단종을 수식하는 충신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추익한(1383~1457)은, 1411년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한성부윤(漢城府尹)과 호조정랑(戶曹正郞) 등을 지낸 인물로,

 

1433년 퇴직하여 영월로 내려와 학문과 자연을 벗삼으며 시간을 보내던 중, 1456년 단종이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되어 영월로 유배를 왔다.
그는 단종을 자주 찾아가 문안을 올리며, 시문을 지어주었고,
산에서 따온 산머루와 다래를 진상하며 우울해하던 단종을 늘 다독거려주었다.

 

그러다가 1457년 10월 24일, 그날도 여전히 산에 올라가 단종에게 줄 산머루를 따고 있는데, 난데없이 곤룡포(袞龍袍)를 걸친 단종이 백마를 타고 그 앞에 나타났다. 추익한은 깜짝 놀랐지만 반가운 마음을 보이며 산머루를 올렸다. '전하! 여기 산머루가 맛이 좋습니다. 한번 들어보십시요'
그러자 단종이, '나는 태백산으로 가는 길입니다. 머루는 관풍헌(觀風軒)에 갖다두십시요~' 하고는 말을 몰아 급히 사라지는 것이다.

 

난데 없는 단종 출현에 마음이 불안하여 서둘러 읍내로 내려가니, 글쎄 단종은 이미 처단되어 그 시신이 동강(東江)에 버려진 것이 아닌가. 그가 산에서 본 단종은 태백산으로 가던 단종의 혼으로 추익한에게 마지막 인사를 했던 것이다. 산신각 우측의 이 그림은 바로 그 장면을 묘사한 것이다.


단종이 죽자 추익한은 크게 애통해하며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그를 따랐다.

이에 영월 사람들은 그를 추충신(秋忠臣)이라 부르며 사당을 지어 그의 뜨거운 충절의 얼을 기렸다.

(백과 사전에서 가져온 글입니다)

 

 

 

 

 

산신각의 뒤쪽으로는,

사찰에서는 보기힘든 전각인 사성전이 있습니다.

 

 

 

 

사성전의 내부에는,

석가모니를 주불로 양쪽으로는 16나한을 모셨습니다.

 

 

 

사성전의 원래의 탱화와 복장유물에 관한 내용입니다.

이 탱화는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보덕사의 사성전에 봉안되어 있던 것인데,

1998년 9월 2일 월정사 성보박물관으로 옮겨져 전시중에 있다.

화기(畵記)와 복장주머니에서 발견된 원문(願文)을 통해,

1868년(고종 5) 자우(慈雨)ㆍ창우(敞遇)ㆍ창택(敞澤) 등이 그린 것을 알 수 있다.



중앙에는 커다란 불좌상(佛坐像)이 있고 그 좌우에는 보살입상(菩薩立像)이 배치된 후불탱화(後佛幀畵)이다.

중앙의 본존(本尊)은 오른손은 어깨높이로 올려 엄지와 검지를 맞대고 있고,

왼손은 발목 위에서 손바닥을 위로 하여 엄지와 중지를 맞대고 있는 설법인(說法印)을 짓고 있다.

본존은 사각형에 가까운 얼굴에 이목구비가 오밀조밀하고, 나발(螺髮)의 머리 위에는 육계가 높고 뾰족하게 솟아 있으며,

커다란 정상계주와 반달형의 중심계주가 뚜렷하다.



본존 앞에는 오른쪽에 코끼리를 타고 있는 보현동자(普賢童子)가,

왼쪽에는 사자를 타고 있는 문수동자(文殊童子)가 있다.

본존의 좌우에는 화려한 보관(寶冠)을 쓴 보살입상이 꽃가지를 들고 서있고,

그 뒤로는 10대제자가 좌우에 각 5구(軀)씩 배치되어 있다.



이 불화는 조성기를 통하여 정확한 제작연도와 작가를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보존상태도 지극히 양호한 작품이다.

또한 필선이나 구도, 본존 및 보살상의 얼굴모습, 그리고 산처럼 높이 솟아 있는 육계나 계주(계珠)의 표현,

아울러 전체의 색조가 붉은 색과 파란색이 주조를 이루고 있는 점 등은 19세기 중엽 이후 불화의 전형적인 특징이다.



복장유물로 원문(願文)은 1868년(同治 7년, 고종 5년) 탱화를 조성하면서 발원하는 내용을 기록하였으며,

기타 복장유물로는 다라니 2매와 후령통 1점 등이 있다.

 

 


 

16나한은 개개의 인격체가 아니라 집단으로 숭앙받으며,

넓은 의미로는 이승에 거하며 부처의 정법을 지키는 석가모니의 제자를 상징 합니다.

 

 

 

 

사성전 곁에는 세월의 흐름을 알려 주듯,

아름드리 향나무가 늠름하게 함께하고 있습니다.

 

 

 

 

사성전 옆에는 칠성각이 자리하고 있고,

 

 

 

 

칠성각은,

우리나라 사찰에서만 볼 수 있는 특유의 전각 중의 하나로,

원래 중국의 도교신앙과 깊은 관련을 맺고 형성된 다음 우리나라에 유입된 신으로,

수명신의 구실과 함께 가람수호신의 기능의 수호신으로 불교 속에 수용되었다고 하며,

보통 칠성각에는 소재회상도(消災會上圖)인 칠성탱화(七星幀畫)만을 봉안합니다.

 

 

 

 

다른 사찰과는 달리,

분향의 의미인지는 알수 없으나,

향나무 고목들이 전각들과 함께한 모습입니다.

 

 

 

 

보덕사의 오층석탑입니다.

건립 연도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있지만,

조선시대에 조성이 된것으로 추정하고있습니다.

 

 

 

 

보덕사를 나와,

산을 향하여 얼마가지 않으면 금몽암에 이릅니다.

금정암의 입구에는 서로 다른 형식의 돌탑 2기가 산문을 대신하듯 자리해 있습니다.

 

 

 

 

단종의 꿈속에 나타났다고 전하는,

작은 산중암자 금몽암(禁夢庵) 입니다.

 

 

 

 

이곳 금몽암에도,

보덕사와 유사한 해우소를 볼수가 있지만,

규모도 작지만 보덕사의 해우소만큼의 나이가 들어 보이지는 않습니다.

 

 

 

 

금몽암 입구의 왼쪽의 산아래에는,

보관을 쓴 미륵불과 비석이 자리해 있습니다.

 

 

 

 

금몽암은 보덕사의 부속 암자로,

통일신라 문무왕 20년(680)에 의상조사가 ‘지덕암’이라 이름지어 세운 것이며,

그 뒤 이곳 암자를 단종이 꿈에서 보았다 하여 금몽암이라 고쳐 불렀으며,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을 새로 세웠다고 전합니다.

 

숙종 24년(1698) 단종이 복위되고 보덕사가 원찰이 되자,

이 암자는 자연히 폐쇄되었고,

영조 21년(1745) 단종의 무덤인 장릉을 관리하던 "나삼"이,

다시 옛터에 암자를 지어 ‘금몽암’이라 한 것이 오늘에 이릅니다.

 

 

 

 

 

 

금몽암의 누각인 우화루입니다.

 

 

 

 

조선시대 양반가의 사랑채 누마루같은 느낌이 드는 금몽암의 누각의,

 

 

 

 

 

처마에는, 헌집과 새집으로보이는 벌집이 두개나 있습니다.

 

 

 

 

금몽암의 편액은 해강 김규진(1868~1933)의 필체이며,

 

 

 

 

고풍스러워 보이지는 않지만,

정성을 다하여 지어 올린듯한 겹처마의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누각의 초석은 대부분,

자연석을 다듬어 이용 하였슴을 보여줍니다.

 

 

 

 

살며시 들여다본 금몽암의 내부의 구조 또한,

사찰이라기 보다는 영주의 무섬마을에서 보았던 양반가의 가옥 구조를 연상하게 하였습니다.

 

 

 

 

사찰이라기 보다는,

조용한 한옥의 별서와 같은 느낌을 주는,

그래서인지 더욱 친근감이 드는 금몽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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