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유전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재사겸 학당으로,

충청북도 문화재자료 제29호로 지정된 "영동 세천재(永同 歲薦齋)"입니다.

 

세천재(歲薦齋)는 조선 제14대 왕인 선조(재위 1567∼1608) 제향시,

참석하는 사람들이 머물기도 하며,

후손들의 학문 증진을 위해 조선 숙종 16년(1691)에 세운 건물이며,

선조는 명종이 후사없이 죽자 즉위 하였는데,

훈구세력을 물리치고 사림세력을 등용했으며 당시 침체된 정국에 활기를 불러일으키고자 노력 하였으나,

시호는 소경(昭敬)이며 임란의 과정에서 그리 좋은 평가의 임금으로 평가 되지 않고 있습니다.

 

세천재(歲薦齋)는 앞면 4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로,

가운데에 2칸 대청마루를 두고 양 옆으로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을 한 팔작지붕으로 꾸몄는데,

 

독립운동을 했던 만취(晩翠) 성하식(成夏植,1881∼1958)이,

이곳에서 훈장을 지내면서 많은 인재를 배출하기도 하였던 곳 입니다.

 

성하식(成夏植,1881∼1958)은 충청북도 영동군 매곡면 유전리에서 태어나,

어렸을 때 상주군으로 이주 했으며 사숙에서 한학을 수학했고,

1908년 김천의 계산측량학교(稽山測量學校)를 졸업한 뒤 측량업에 종사 했으며,

이후 1911년 광신학숙(廣新學塾)에서 2년간 교육에 진력하다가 1913년에 만주 지린성으로 이주 했습니다.


1914년 몽강현에서 신창소학교(新昌小學校)를 세웠고,

1916년에는 화전현에서 길창소학교(吉昌小學校)를 세웠으며,

1919년 무송현에서 윤세복 등과 함께 흥업단(興業團)을 조직,

초대 재무부장으로서 독립군의 군자금 마련에 진력 했으며,

1921년 대종교에 입교했고 1924년 참교(參敎),

1931년 지교(知校), 1947년 정교(正敎)로 임명됨과 동시에 대형(大兄)의 호를 받았습니다.


또한 그는 1922년 부여현에 삼성시교당(三成施敎堂)과 삼흥학교(三興學校)를 세웠고,

1926년 빈현에 신흥소학교(新興小學校)를 세웠으며,

1929년 유수현에 유성시교당(裕成施敎堂)과 부속소학교를 각각 설립하여 직접 시무 활동을 전개 하였고,

그리고 총본사 전범(典範), 밀산구 순교원(巡敎員), 총본사 전강(典講), 경의원(經議院) 참의 등을 역임 했으며,

8.15 광복 후 국내로 돌아와 원로원 부원장, 총본사 전범 등을 역임했고,

1957년 상주지사 전무(典務)가 되어 대종교 포교 활동을 전개하다 1958년 6월 29일에 병사 하였습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77년에 대통령표창을 추서했고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 했으며,

1995년에 그의 유해를 국립대전현충원 독립유공자 묘역에 안장 하였습니다.

 

만취(晩翠) 성하식(成夏植)의 생을 돌아볼수 있는곳이며,

충주 박씨(忠州朴氏) 문중의 재사이며 강학 공간였던 곳으로,

충북 영동의 문화재인 "세천재(歲薦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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