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천을 여행하면서,

춘천시에 있는 누정,  소양정(昭陽亭)을 찾았습니다.

 

소양정(昭陽亭)으로 오르는 초입의 모습으로..

강원도 춘천시 고양로1가 산1-1번지에 위치해 있으며,

 

 

 

소양정(昭陽亭)으로 오르는 초입에는 즐비하게 서있는 비석들로 선정비군을 볼수있어,

 

 

 

산정비 비석군중 안쪽 뒤편에서는,

일제 강점기 강원도지사를 지내며 악행 저지른 친일파 "이범익"이,

그가 재임하던  1934년에 세워진 영세불망비 비석도 포함이 되어있어, 

비석 옆에는 강원도민의 뜻으로 광복68년을 맞아 "친일파 이범익 단죄문"을 세우고 안내를 하고 있어 눈길을 잡습니다.

 

 

 

소양정(昭陽亭)으로 오르는길은 돌계단을 조금 올라야 하나,

한번에 오르는것이 아니라 之형태로 돌아 올라 그리 힘들지 않습니다.

 

 

 

계단을 오르다 보면 소양강이 눈에 들어올 즈음에 춘천의 기생인 절기(絶妓) 전계심(全桂心)의 묘비를 만날수있는데,

전계심(全桂心)은 조선 22대 정조 임금 때 천한 집안 출신인 관노로,

비록 미천한 가정에서 태어났지만 용모가 아름답고 단정한 행동으로 칭송이 자자하여,

춘천 부사로 부임한 김처인의 소실로 가연을 맺은 후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다른 곳으로 발령이 난 부사는 곧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을 한 후 떠났으나 소식이 없자

그녀의 어머니는 속인 것이라며 그녀를 서울의 기방으로 팔아 버려 어쩔 수 없이 기방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계심은 이미 부사의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그가 반드시 찾아 올 것이라는 실낱같은 믿음의 희망으로 견디고 있었습니다.

 

그녀의 아름다운 용모와 고결한 성품이 소문이 나자 수많은 사내들의 유혹이 있었지만

그녀는 은장도를 가슴에 품고 정숙한 나날을 보내던중 어느 날 계심은 자신에게 욕망의 눈길을 보내던 한량의 폭력에 의해 정조를 유린당하고,

뱃속의 아이마저 낙태하고 말았고 낭군을 만날 면목이 없어 상심한 계심은 님에 대한 사랑을 지켜 나가고자,

부사에게 사랑의 사연이 담긴 유서를 남기고 간직하고 있던 은장도로 자결하고 말았습니다.

계심이 자결하던 날. 유혈이 낭자한 모습으로 그녀가 찾아와 애원하는 꿈을 꾼 부사는,

기이한 생각이 들어 계심을 찾아보니 그녀는 꿈속의 모습처럼 처절한 모습으로 죽어 있었습니다.

부사는 안타까움과 불쌍한 생각에 시신을 거두어 그녀의 고향인 춘천의 봉의산록에 장사지내 주었고,

이러한 소식을 들은 순찰사가 사대부가의 부인들도 하기힘든 것을 계심이 해냈다며 그 행적을 가상히 여겨 열녀정문(烈女旌門)을 세워주었으며,

1796년에 춘천의 선비들이 그녀의 절개를 높이 사 후대에 귀감이 되도록 묘비를 세워주었습니다.

묘비의 글은 박종정이 짖고, 글씨는 류상륜이 썼다고 하며,

계심의 애절하고 슬픈이야기는 나중에 "이인직"의 신소설 「귀의 성」의 소재가 되어 되살아 나기도 하였습니다.

 

 

 

전계심(全桂心)의 묘비를 지나면 시원한 모습의 소양정(昭陽亭)이 보이고,

 

 

 

소양정(昭陽亭)으로 들어서기전 "춘본학교설립자비"의 모습을 볼수있어,

"춘본학교"는 1942년에 교육자이자 자선사업가였던 "윤용성" 씨가,

가난한 소년, 제때 배우지 못한 소년, 장애인들을 위해 춘천 소양로 2가에 세웠던 사립학교로,

광복 직후에 윤용성 씨는 중앙로에 있던 일본(미도리) 학교 터에 춘주(春州)학교를 새로 세우면서 춘본학교 학생들을 춘주학교에 편입시켰는데,

그에 따라 자연히 춘본학교는 문을 닫게 되었습니다.

그때 춘본학교의 학부형들이 설립자 윤용성 씨를 기념하여 1945년 10월 봉의산 기슭에 공덕비를 세웠다고 하며,

이후 "춘주학교"는 6.25전쟁 뒤에 춘천 중앙국민학교로 교명이 바뀌었으니, 오늘날의 "춘천 중앙초등학교"의 전신이라고 합니다.

 

 

 

비석 앞에는 6.25동란 초기 이곳에 배치되었던  6사단 공병대대 1중대가,

소양교를 건너 공격해 오는 적과 혈전을 전개했던 장소로 보병보다도 더 용감히 싸웠고,

"공격시에는 가장 앞에 나가고 방어시에는 가장 나중에 나온다"는 공병의 정신을 지킨 공병중대 장병들을 기리는 표지석을 볼수 있습니다.

 

 

 

강원도의 문화재자료 제1호로 지정된 소양정(昭陽亭)으로,

건물의 구조는 정면 4칸·측면 2칸 규모로 중층건물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으로 되어있습니다.

 

 

 

건물의 모습이나 초석으로 보아도 복원하여 지은지 오래지 않았슴을 알수있으며,

 

 

 

소양정(昭陽亭)의 현판으로,

현판은 박경원 복원할때의 강원도지사의 글씨입니다.

 

 

 

양쪽으로 나있는 나무계단 따라 마루로 올라 봅니다.

 

 

 

마루에 오르니 계단위 난간대가 보이질 않습니다.

어린아이를 대동하고 오는경우 계단이 양쪽으로 나있어 주의해야 할듯 합니다.

 

 

 

천정에는 수많은 시판과 편액들이 걸려 있어 살펴봅니다.

 

 

 

수많은 시판과 소양정기(昭陽亭記)의 편액도 보이며,

근자에 복원해서 인지 한글로된 시판도 볼수있습니다.

 

 

 

소양8경((昭陽八景)을 이르는 편액도 눈에 들어 옵니다.

鳳儀朝雲(봉의조운)         虎岩松風(호암송풍)

月谷朝霧(월곡조무)         牛野暮煙(우야모연)

孤山落潮(고산낙조)         梅江漁笛(매강어적)

華岳淸嵐(화악청람)         鷺州歸帆(로주귀범)

 

 

 

누각의 마루에서 소양강을 내려다 봅니다.

 

 

 

돌계단을 따라 올라왔던 입구와 강건너의 춘천의 일부도 들어 옵니다.

 

 

 

매월당시집(梅月堂詩集)의 매월당(梅月堂) 김시습(金時習)의 소양정에 올라(登昭陽亭)를 옮겨 봅니다.

拍拍水禽掠水過       물새 나란히 강을 스쳐 날아가고

山城東隅夕陽多       산성 동쪽 모퉁이에 석양 한가득.

風生嬭渡帆初飽       내도(嬭渡:모진)에 바람일어 돛이 부풀고

葉下蘆淵江自波       잎은 노연에 지며 강에는 파도이네.

楊口山來尖似戟       양구에서 달려온 산들은 창처럼 뾰족하며

牛頭渚合曲如叉       우두 물줄기 합쳐졌다 휘돌며 갈라지네. 

倚欄弔古空搔首       난간에 기대 옛일 생각하며 머리 긁적이니

一曲采菱何處歌      "채릉" 한 곡조 어느 곳에서 부르는가

 

 

 

소양정(昭陽亭)이 처음 창건된 시기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말 문인들의 시에 나오는 것으로 보아 이 때 이미 존재한 것으로 보이며

"운곡 원천석"의 시에 "소양정" 이라는 명칭이 보이나,

15세기경에는 "이요루(二樂樓)"라는 이름이 사용되기도 하였다고 하며.

본래 현재 위치보다 아래쪽인 소양강 남쪽 강변에 있었습니다.

1605년(선조 38) 홍수로 유실된 것을 1610년(광해군 2) 부사 유희담(柳希聃)이 다시 지었고,

1647년(인조 25)에는 춘천부사 엄황(嚴滉)이 크게 수리하면서 정자 동쪽에 선몽당(仙夢堂)이라는 부속 건물을 세웠으며 이때 다시 소양정(昭陽亭) 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1777년(정조 1) 홍수로 또 유실되었으며, 1780년(정조 4) 부사 이동형(李東馨)이 다시 지었으나,

6·25전쟁 때 소실되어, 1966년 옛터보다 위쪽이 되는 봉의산 기슭의 현 위치에 중층 누각으로 다시 지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소양정(昭陽亭)의 복원의 문제점이 대두 되기도 하는데,

누정건물은 그 지역에서 산수(山水)가 가장 아름다운 곳에다 세우고,

이곳에서 연회, 학문토론, 시정(詩情)나누던 옛날의 선비들의 문화공간으로,

정(亭)과 루(樓)를 살펴보면 정과 루는 비슷하지만 다릅니다.

정은 머무르는 장소를 말하고, 루는 다락이나 망루, 겹침이란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소양정이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는 삼국시대까지 올라는데 분명 삼국시대부터 있었을 가능성이 높으며 적어도 고려시대부터는 있었을 것입니다.

 고려의 춘천 치소에 대해서는 학자마다 다르지만 지금의 캠프페이지 일대였을 가능성이 높으며,

따라서 소양정도 당시부터 존재했을 가능성이 높지만 조선이 건국되면서 수많은 고려시대 문헌이 사라져 이전의 문헌에서는 찾기 어렵운 실정입니다.

소양정의 모습과 관련해서 남아 있는 그림이나 사진을 보면 지금과 다름을 알수 있는데,

 

 

조선 후기 문인화가로 이름을 떨친 김윤겸(金允謙 1711-1775년)이 활동할 당시의 그림을 보면,

소양정은 지금처럼 루(樓)의 형태가 아니라 정(亭)의 형태 입니다.

 1915년 일제가 시정 5주년 기념으로 발행한 엽서의 소양정 사진도 1700년대 그림과 일치하며 1935년의 사진도 마찬가지 입니다.

지금 복원된 소양정은 옛 그림이나 사진과는 다른 모습여서 왜 이런 모습이 되었는지 알수 없습니다.

1966년 현 위치에 복원될 당시 이런 모습이 되었음을 볼수있습니다.

어떠한 자료로 복원되었는지 모르나 소양정은 역사를 사실 그대로 따른 것으로 보이지 않습니다.

소양정의 옛 이름이 이요루였다는 기록 때문에 그렇게 복원했다는 반론도 있을 것이나,

 그러나 적어도 1700년대 이후 근대까지의 소양정은 단층 정자였다는 것을 자료가 보여줍니다.

웅장하게 보이기 위해 누각의 형태로 복원했다면 역사를 마음대로 해석하여 복원한것이 되어 이또한 역사왜곡이 아닐수 없습니다.

(참고 자료로 발췌하여 가져왔습니다)

 

 

 

소양정(昭陽亭)을 나와 내려가는길을 잡습니다.

 

 

정자의 현판을 걸고 누각의 형태로 서있는 "소양정(昭陽亭)"

지금의 누각의 모습이 옛모습을 그대로 복원한것이라면 건물의 형태에 맞게 "이요루"또는 "소양루"로 고쳐서 부름이 어떨까 합니다.

짧은 역사관으로 아쉬움이 남는 춘천의 누각 소양정(昭陽亭) 방문기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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