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산청을 여행 하자면,

지리산과 함께 동의보감촌, 남사 예담촌 등 가볼만한곳이 많습니다.

세운지 얼마되지 않았지만 산청에서 찾아 볼만한 곳으로,

성철스님 생가와 성철스님기념관이 있어 소개를 합니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 자리한 성철스님 기념관으로,

성철스님 생가와 로터리가 있는 길를 사이에 두고 맞은편에는 성철스님기념관이 있어,

2012년 3월 11일 성철 스님 탄생 100주년 때 스님의 혈육인 불필 스님과 원택 스님을 비롯한 여러 스님이 뜻을 모아,

2014년에 3층 높이의 기념관을 완공 하였다고 합니다.

 

 

 

성철스님기념관의 입구의 모습으로,

 

 

 

외부의 벽면에는 스님의 생전모습 사진들을 볼수 있고,

 

 

 


성철스님기념관은 많은 공을 들여 "한국형 수미산 석굴"로 조성 하였는데, 

125평 규모의 기념관 1층 내부에 들어서면 부처님을 새긴 벽돌이 빙 둘러 있고,

 

 

 

빙 두른 석불 사이로 석굴 같은 청자감실이 나오며,

성불문을 지나면 청자감실이 있어 좌우에 성철스님의 한글 법어가 새겨진 문을 지나면,

흰 대리석으로 된 성철 스님의 설법상이 보이고 설법상 뒤에는 과거세 연등불, 현재세 석가모니불, 미래세 미륵불이 모셔져 있습니다.

 

 

 

석실 중앙에 흰 대리석에 조각한 성철스님의 설법상으로,

해인사 대적광전에서 설법하던 모습을 재현했다고 합니다.

석실은 설법상 뒤로 부조형 연꽃만다라상 아래 과거세 연등불, 현재세 석가모니불, 미래세 미륵불 등으로 삼세를 현상화하고,

석실 입구의 위로 비로자나불을 모셔 실크로드의 석실 모형으로 꾸며 두었습니다.

 

 

 

성철스님기념관에서 길건너에 있는 성철스님 생가로 향합니다.

생가가 있는 겁외사(劫外寺)는 성철스님의 생가터에 세워진 절여서,

일반적으로 산 속이나 산 아래에 있는 사찰과 달리 도로변에 자리해 있어 일주문이 없으며 누각인 벽해루(碧海樓)가 대신 산문 역할을 하고 있는데,

18개 기둥의 벽해루(碧海樓) 누각의 이름은 성철 스님이 평소 즐겨 이야기하던,

"아침의 붉은 해가 푸른 바다를 뚫고 솟아 오른다" 라는 "홍하천벽해(紅霞穿碧海)"에서 지은 이름이라고 합니다

 

 

 

겁외사(劫外寺)라는 이름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절"이란 뜻으로 ,

생가 앞에 성철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운 사찰로 겁외사(劫外寺)로 들어가기전 배치도를 먼저 살펴봅니다.

 

 

 

겁외사(劫外寺)는 현대 불교를 대표하는 선승으로,

해인사 초대 방장과 조계종 6대, 7대 종정을 지낸 성철 스님 생가터에,

20여년간 성철 스님을 시봉했던 원택 스님에 의해 2001년 세운 사찰 입니다.

 

 

 

겁외사(劫外寺)로 들어서면,

마당 한쪽에 성철 스님의 법어를 새겨놓은 비석을 볼수있고,

 

 

 

대웅전과 성철스님의 동상 앞에는,

"단주 돌아가는 소리에 부처를 만나다" 라는 의미의 차대완 작의 "부처님 마음" 이라는 염주 형상의 조형물도 볼수 있으며, 

 

 

 

건너에는 목탁 조형물도 자리해 있습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화두로 널리 알려진 성철스님의 사리탑 동상으로,

성철 스님은 이 곳에서 25세까지 결혼하고 농사지으며 평범하게 살았으며 평소 서양철학서를 탐독하던 중,

한 탁발승이 푸짐한 시주에 대한 고마움의 뜻으로 건네준 '증도가(證道歌)' 란 책을 읽은 뒤,

"캄캄한 밤하늘에서 태양을 만난 듯한" 깨달음을 얻고 출가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성철스님 동상의 왼쪽에는 대웅전(大雄殿)이 있어,

 

 

 

대웅전 앞을 지키듯 거북형상의 커다란 바위가 보이고,

 

 

 

정면 3칸 측면 3칸으로 팔작지붕의 대웅전(大雄殿)으로 단청이 밝은 편이며 화려합니다.

 

 

 

대웅전(大雄殿)의 현판이며..

 

 

 

대웅전(大雄殿)의 내부 불단에는 석가모니부처님을 모셨으며,

한국 수목화의 대가인 김호석 화백이 배채법으로 그린 성철스님의 진영도 볼수 있습니다.

 

 

 

대웅전(大雄殿)의 외벽에는,

스님의 출가, 수행, 설법등의 일생을 그린 모습을 그림으로 볼수 있는데 그중 다비식의 모습입니다.

 

 

 

대웅전을 나와 안쪽에 있는 생가로 향합니다.

 

 

 

생가 앞에는 줄기가 회백색이라서 멀리서 보면 거의 하얗게 보인다는 귀한 백송(白松)을 볼수있어,

백송은 중국 북서부가 원산지로 어릴 때 자라는 속도가 아주 느리고,

옮겨심기가 힘들며 씨로도 잘 번식이 되지 않아 널리 심지 못하는 나무로 껍질이 벗겨지면서 백색을 나타내기 때문에 백송이란 이름이 붙여 졌는데,

백송이 중국에서 우리나라에 들어온것은 약 600년전 으로 보이며 백송은 만나기도 어렵고,

흰 나무껍질 때문에 백의민족이라는 민족의 정서에도 맞아 예부터 귀한 나무의 대표로 여겼는데,

우리나라에는 현재 남한에 다섯 그루, 북한은 개성에 한 그루의 백송이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2000년 10월에 복원한 성철스님의 생가로,

성철스님이 대원사로 출가하기 전에 25년 동안 살았던 곳으로 모든 건물은 새로 건립되었다고 합니다.

 

 

 

생가로 들어가는 솟을삼문이 보이고,

 

 

 

삼문에는 혜근문(惠根門)의 현판이 있으며,

 

 

 

생가는 1912년 태어난 스님이 1936년 동산(東山) 스님을 은사로 출가하기 전까지 살던 곳으로,

성철스님의 아버지 이름은 이상언(李尙彦), 자(字)는 사문(士文), 아호는 율은(栗隱), 관향(貫鄕)은 합천(陜川)이며,

조선말 국운이 기울어가던 1881년 경남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 대대로 살던 집에서 태어나 평생을 그 곳에서 살았으며,

진양(晋陽) 강(姜)씨 부인을 아내로 맞아 슬하게 4남3녀를 두었는데, 성철스님은 장남입니다.

부친인 이상언(李尙彦)은 성리학자과 한의학에 밝았으며 대지주로 평생 남에게 굽히는 일이 없을 정도로 성정이 당당하고 직설적였다고 하며,

큰아들이 출가하자 저택을 부수고 인근 대나무 숲에 집을 다시 지었으며,

스님은 출가 후 한번도 고향 땅을 밟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습니다.

 

 


 

 

생가를 들어서면 왼쪽에는,

기념물 전시실이 있는 기념물 전시실이 있는 "생가 전시관"으로,

 

 

 

전시관은 포영당(泡影堂)의 현판을 볼수있으며,

 

 

 

큰규모의 전시관은 아니지만,

유물전시관에는 백련암에 보관중이던 누더기 가사와 장삼, 지팡이, 덧버선, 검정 고무신 및 ‘마삼근(馬三斤)’이란 친필 화두 등,

30여점의 유품이 전시되어 있어 스님의 발자취와 소탈했던 일상을 엿볼수 있습니다.

 

 

 

성철스님이 수행하면서 스스로에게 다짐한 12가지 항목으로서 철저한 수행정신을 엿볼 수 있는,

"열 두 가지 다짐"이라는  十二銘(십이명) 입니다. 

目不注 簪裳之儀(목부주 잠상지의)    아녀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으리라.

耳不傾 塵俗之談(이불경 진속지담)    속세의 헛된 이야기에는 귀도 기울이지 않으리라.

手不捉 錢幣之寶(수불착 전폐지보)    돈이나 재물에는 손도 대지 않으리라.

肌不接 絹帛之?(기부접 견백지유)     좋은 옷에는 닿지도 않으리라.

身不近 檀家之施(신불근 단가지시)    신도의 시주물에는 몸도 가까이 않으리라.

影不過 尼寺之垣(영불과 니사지원)    비구니 절에는 그림자도 지나가지 않으리라.

鼻不嗅 辛?之菜(비불후 신훈지채)     냄새 독한 채소는 냄새도 맡지 않으리라.

齒不齧 生靈之肉(치불설 생령지육)    고기는 이빨로 씹지도 않으리라. 

心不繫 是非之端(심불계 시비지단)    시시비비에는 마음도 사로잡히지 않으리라.

意不轉 逆順之機(의부전 역순지기)    좋고 나쁜 기회에 따라 마음을 바꾸지 않으리라.

禮不揀 童女之足(예불간 동녀지족)   절을 하는 데는 여자 아이라도 가리지 않으리라

舌不弄 他人之咎(설불롱 타인지구)    다른 이의 허물은 농담도 않으리라.

瞿曇後末 性徹(구담후말 성철)        구담족의 후손 성철

 

 

 

성철(性徹,1912~1993)스님의 속명(俗名)은 이영주(李英柱)이고 아호는 퇴옹(退翁)이며,

1912년 경상남도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서 태어나,

1936년 해인사(海印寺)에서 동산(東山) 대종사(大宗師)에게 사미계(沙彌戒)를 받고 승려가 되었으며,

1938년 운봉(雲峰)을 계사(戒師)로 보살계(菩薩戒) · 비구계(比丘戒)를 받았고,

봉암사(鳳巖寺)에서 청담(靑潭)과 함께 수행하면서 불타(佛陀)답게 살자고 결사(結社)하는 등 새로운 선풍(禪風)을 고양(高揚)시켰으며,

1967년 해인총림(海印叢林) 초대 방장(方丈)이 되었고 1981년 대한불교조계종 제7대 종정(宗正)에 취임 하였습니다.

해인사 백련암(白蓮庵)에 머무르며 세속에 거의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으며,

1993년 11월 4일 세수 82세에 열반에 든 대한민국의 선종을 대표하는 큰스님 입니다.

 

 

 

생가의 안쪽 가운데에 안채인 율은고거(栗隱古居)가 있어,

 

 

 

율은고거(栗隱古居)의 현판으로,

율은(栗隱)은 성철스님의 부친인 이상언(李尙彦)옹의 아호에서 취했다고 합니다.

 

 

 

안채인 율은고거(栗隱古居)에는,

스님이 30여년간 머물던 해인사 백련암 염화실을 재현해 두었고,

 

 

 

안채에는 모친인 강상봉 여사가 사용하던 방도 재현 해두어 살펴 보고,

 

 

 

생가의 사랑채인 율은재(栗隱齋)로,

부친인 이상언(李尙彦)옹의 거처를 재현해 두었습니다.

 

 

 

율은재(栗隱齋) 또한 부친의 아호에서 가져와 이름지은것으로 보이며,


성철스님의 호는 퇴옹(退翁)으로 8년 동안 장자불와(長坐不臥)를 행하는 등 평생 철저한 수행을 하셨고,

돈오사상(頓悟思想)과 중도사상(中度思想)을  설파하였는데 교리를 대상으로 한 성철의 견해는 저서인 1981의 "선문정로"에 잘 노정되어 있으며,

대한민국 선불교의 수행 전통으로 여겨온 지눌의 돈오점수(頓悟漸修)에 반대하여 돈오돈수(頓悟頓修)를 주창했습니다.

 “내가 삼십 년 전 참선하기 전에는 산은 산으로, 물은 물로 보았다가

나중에 선지식(善知識)을 친견(親見)하여 깨우침에 들어서서는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게 보았다.

지금 휴식처를 얻고 나니 옛날과 마찬가지로 산은 *다만 산이요, 물은 다만 물로 보인다.

그대들이여, 이 세 가지 견해가 같으냐? 다르냐? 이것을 가려내는 사람이 있으면 나와 같은 경지에 있다고 인정하겠노라.”

중에서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라는 고측(古則)을 성철이 원용(援用)하여 인상(印象)을 남기면서 일반인에게도 널리 알려 졌는데,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라는 화두(話頭)는 최초에 미망(迷妄)하는 단계는 수도(修道)하기 이전 평범한 일상계(日常界)이나,

수도를 이용해 득도(得道)하면 체험하는 평범한 일상을 완벽히 초월한 세계는 일상에서 하는 착각(錯覺)이 적멸(寂滅)한 상태이나,

진정하게 득도하려면 거기서 진일보(進一步)해 평범한 세계로 회귀하여야 한다는 의미로,

빛을 감추고 티끌 속에 섞여 있다는 뜻의 "화광동진(和光同塵)"을 이용해 다시 돌아온 그 세계는,

외양상으로는 최초처럼 속(俗)되고 평범한 단계와 같으나 내면상으로는 처음과는 차원이 판이(判異)합니다.

이는 수도자(修道者)가 작고 대수롭지 않게 득도(得道)했을 때는 물이 산으로, 산은 물인 듯 혼란(混亂)스럽지만,

 득도하는 규모가 확대되면 물은 물로, 산은 산으로 보게 되어,

외부 세계나 자연을 주관의 작용과는 독립하여 존재한다고 관망(觀望)하는 태도를 획득한다는 뜻입니다.

 

 

 

성철스님이 남긴 5가지 명언 으로 성철스님 생가 방문기를 마무리 합니다.

1. 사람들은 소중하지 않은 것들에 미쳐 칼날 위에서 춤을 추듯 산다 

2. 마음의 눈을 바로 뜨고 그 실상을 바로 보면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다

3. 실행 없는 말은 천번 만번 해도 소용없다 참으로 아는 사람은 말이 없는 법이다

4. 용맹 가운데 가장 큰 용맹은 옳고도 지는 것이고, 공부 가운데 가장 큰 공부는 남의 허물을 뒤집어 쓰는 것이다

5. 베풀어 주겠다는 마음으로 고르면 아무하고도 상관없다. 덕 보겠다는 마음으로 고르면 제일 엉뚱한 사람을 고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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