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남 구례를 여행하면서,

금환낙지(金環落地)의 명당과 타인능해(他人能解)의 나무로 된 쌀독으로 이름난,

구례의 운조루(雲鳥樓) 고택(古宅)을 찾았습니다.

 

전라남도 구례군 토지면 오미리에 자리하고 있는 조선 후기의 주택 "운조루(雲鳥樓) 고택(古宅)"으로,

 

 

 

운조루(雲鳥樓) 고택(古宅)의 평면도를 먼저 살펴봅니다.

현재 이 집은 건평 426.45m²(129평)의 규모로,

"一 "자형 행랑채와 북동쪽의 사당채를 제외하고 "T"자 형의 사랑채와 트인 "□"자형의 안채로 구성되어 있으며,

사랑채와 안마당의 곡간채가 팔작지붕, 박공지붕, 모임지붕으로 연결되어 있는 일체형 구조를 보이고 있습니다.

 

 

 

고택(古宅) 앞에는 계족산의 화기를 막기 위해 만들었다는 연지가 있어,

장방형으로 가운데 둥근 섬을 두어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의 선비 사상을 반영한듯 합니다.

 

 

 

국가민속문화재 제8호로 지정된 운조루(雲鳥樓) 고택(古宅)으로,

 

 

 

행랑채의 솟을대문에는 호랑이 뼈가 걸려 있어 조상에 대한 자부심을 엿볼수 있는데,

운조루(雲鳥樓)를 지은 유이주(柳爾胄)는 채찍으로 호랑이를 잡을 정도로 힘이 장사인 무신 여서,

그가 잡은 호랑의 가죽은 영조임금에게 진상하고 호랑이뼈는 악귀를 물리치는 의미로 대문에 줄줄이 걸어 놓았는데,

호랑이 뼈가 워낙 귀하다 보니 누군가 하나둘 집어 가 사라지게 되어 이제는 말머리와 호랑이 뼈를 걸어 두었다고 합니다. 

 

 

 

운조루의 입장료는 1,000원이며,

입구에는 종부 이신듯 할머니가 계시고 저울과 가을의 결실들을 내어놓아 판매 하는듯 하며,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그리 높아 보이지 않는 사랑채와 아랫행랑채를 만나게 되며,

오른쪽의 아랫행랑채는 2칸이 앞쪽으로 튀어나와 누형식을 취하고 있으며 1칸은 방이고 다른 1칸은 다락으로 되어 있습니다.

 

 

 

행랑채의 서편 끝에는 "초빈(草殯)"이라는 특이한 곳이 자리해 있으며,

초빈 앞쪽에는 노랗게 물든 "위성류 나무"가 있어,

이 나무는 창건주 류이주(柳爾胄)가 당나라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가져온 나무로,

진시황이 수도로 삼았던 곳의 옛 이름이 위성이며 버드나무를 닮은 나무라 하여 위성류라 이름을 붙였다고 합니다.

 

 

 

조선시대 상류층 사회에서는 집안에 빈소(殯所)를 설치하여 99일장을 지내기도 했다는데,

운명 후 3일이 지나 입관 후 이곳 "가빈터"에서 석달동안 신신을 모신 후 묘지에 안장 하였다고 하며,

이곳 운조루에는 가빈터인 초빈(草殯)이 잘 보존되어 있습니다.

 

 

 

팔을 벌린듯 길게 이어져 있는 행랑채는,

운조루(雲鳥樓)가 한때 거대한 장원 였슴을 짐작하게 합니다.

 

 

 

운조루(雲鳥樓) 고택(古宅)은 1776년(영조 52) 삼수부사와 낙안군수를 지낸 류이주(柳爾胄)가 건립하였다고 하며,

그는 경상북도 출신이지만 구례에 인접한 낙안에 수령으로 왔다가 아예 운조루를 지어 이곳에 눌러 앉았으며,

창건시 99간 (현존73간)의 대규모 주택으로서 조선시대 선비의 품격을 상징하는 품자형(品字形)의 배치 형식을 보이고 있는 양반가로,

그는 처음 이사와 살았던 구만들(九萬坪)의 지명을 따 호를 귀만(歸晩)이라 했으며 이 집을 귀만와(歸晩窩)라고도 불렀습니다.

 

 

 

이 고택(古宅)이 운조루(雲鳥樓)로 불리게 된것도 사랑채의 누마루인 "운조루(雲鳥樓)"에서 가져 왔으며,

 

 

 

누마루 아래 에서는 여러가지 옛 물건들을 볼수 있어,

 

 

 

수레에 사용했던 바퀴로 보이는데,

구조와 모양이 요즘 보기힘든 물건들 입니다.

 

 

 

누마루 앞에는 그리 크지않은 석조 조형물이 있어,

절구로 보기엔 절구통이 작고 기둥중 활주를 밭치는 초석으로도 보여지며,

 

 

 

활주는 추녀가 처지지 않도록 댄 가느다란 기둥이며,

누마루 추녀를 받친 활주도 민가 에서는 쉽게 볼수 없습니다.

 

 

 

누마루와 마루방으로 연결된 모습을 들여다 보고,

누마루에 오르기 위해 앞쪽으로 나가 봅니다.

 

 

 

운조루(雲鳥樓)라는 택호(宅號)는 "구름속의 새"처럼 "숨어사는 집"이란 뜻과 함께,

"구름위를 나르는 새가 사는 빼어난 집"이란 의미도 지니고 있으나,

 

 

 

이 고택(古宅)의 이름은 중국의 도연명(陶淵明)이 지은 귀거래혜사(歸去來兮辭)에서 가져온 글로,

"雲無心而出岫 (운무심이출수)    구름은 무심히 산골짜기에 피어 오르고

鳥倦飛而知還(조권비이지환)    새들은 날기에 지쳐 둥우리로 돌아 오네"의 문구에서 첫머리 두 글자를 취해 이름을 지었다고 전해지며,

운조루(雲鳥樓)는 원래 누각의 이름 이었는데 지금은 고택(古宅)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사랑채는 4칸의 몸채에 뒤쪽으로 꺾여 이어진 2칸의 날개가 달려 있으며,

몸채 왼쪽 끝의 1칸은 내루형(內樓形)으로 기둥 밖으로 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난간의 조각도 섬세 합니다.

 

 

 

사랑채의 누마루에서 바라본 안산의 조망으로 앞쪽에 보이는 산이 오봉산 이며,

자연을 끌어들여 정원으로 삼은 운조루(雲鳥樓)의 풍취를 즐길수 있습니다.

 

 

 

사랑채의 구성은 완전한 누마루 형식을 취하고 여기에 일반 대청이 연립하여 있으며, 

일반적으로 사랑채에는 부엌이 없는 법인데 안채 통로까지 겸한 큰 부엌이 마련되어 있으며, 

또한 사랑채와 직교한 누마루가 또 있어 전체 살림을 한눈에 관찰하도록 되어 있어 특이합니다.

 

 

 

사랑채의 사랑방을 들여다 보면,

장검과 관복 등을 볼수있어 옛날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해둔 느낌 입니다.

 

 

 

운조루(雲鳥樓) 집터는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노고단의 옥녀가 형제봉에서 놀다가 금가락지를 떨어뜨린 금환낙지(金環落地)라 하여 예로부터 명당자리로 불려 왔다는 양택지로,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와 함께 내수구인 앞 도랑과, 외수구에 해당하는 섬진강이 제대로 되어 있는 명당터에 자리잡고 있으며,

 

 

 

집 앞의 오봉산은 신하들이 엎드려 절하는 형국이라고 하고,

고택(古宅)앞의 연당은 남쪽의 산세가 불의 형세를 하고 있어 화재를 예방하기 위하여 조성한 것이라고 하며,

풍수지리설에 의하면 이 일대는 금귀몰니(金龜沒泥), 금환락지(金環落地), 오보교취(五寶交聚), 혹은 오봉귀소(五鳳歸巢)의 명당이 있는 곳이라고 하며,

남한의 3대 길지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학자 이중환(李重煥, 1690~1752)은 조선 후기 실학사상이 반영된 인문 지리지인 "택리지(擇里志)"에서,

이 지역을 우리나라에서 몇 안 되는 살기 좋은 곳으로 꼽았으며,

운조루(雲鳥樓)의 집터를 "금가락지가 떨어진 모양"으로 보는 것은 이런 연유 이기도 합니다.

 

 

 

사랑채 누마루 난간의 연꽃, 쪽마루의 결구의 모습 등에서 고택(古宅)의 품위를 더욱 진하게 느낄수 있고,

독창적인 공간 구조를 가진 운조루(雲鳥樓)는 전통 한옥만으로도 명성을 얻을 만하여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 되었고,

지역적으로 영호남의 경계에 위치하여 영호남 건축의 장점이 모두 살아 있고 집안 곳곳에 고택(古宅)을 지은 장인의 재능도 실필수 있습니다.

 

 

 

안채로 들어가기 위해 사랑채의 부엌으로 들어서면,

 

 

 

커다란 통나무의 속을 파내어 만든 "목독"이 보이며,

 

 

 

나무로 만든 쌀독의 아랫부분에 있는 마개에 "타인능해(他人能解)" 라는 글귀를 써두어,

"누구나 열 수 있다" 라는 의미로 가난한 이웃 사람이 쌀을 꺼내 끼니를 이어나갈 수 있도록 베려 함으로써,

음덕을 베풀고 적선을 하는 것이 가진 자의 도리임을 보여 주었던 류씨 문중의 상징물 이기도 하며,

옛날에는 이 목독을 행랑채 쪽에 두어서 가난한 사람이면 누구나 쌀을 퍼 갈 수 있도록 했다고 합니다.

 

 

 

운조루(雲鳥樓) 고택(古宅)이 200년이 지나도록 망하지 아니하고,

갖은 병란과 근대기의 전쟁의 참화 속에서도 소실되지 않았으며 오늘날까지 가문이 번창한 것은,

오로지 분수를 지키며 생활하고 이웃을 돌보았던 타인능해(他人能解)의 교훈이 전승되어 내려왔기 때문이라고 여겨 집니다.

 

 

 

통나무로 만든 쌀독 옆에는 마마의 모습도 볼수 있고,

창건주인 류이주(柳爾胄)의 5세손인 류제양(柳濟陽)은 일만여편의 시(詩)를 쓰고,

손자 류형업(柳瀅業)에 이르기까지 80년간 세대를 거처 하루도 빠지지않고 생활일기와 농가일기를 썼다고 하며,

 이러한 선조들의 유업으로 이어져온 기록문화 등으로 집안의 전통과 내력을 알려주는듯 합니다.

 

 

 

오른쪽으로 돌아서면 안채가 있어,

장독들 너머로 중층 구조의 작은 부엌과 고방의 모습이 일부 들어오고,

 

 

 

안채는 평면이 트인 "□"자 형으로,

중행랑채를"┍ "자 형으로 만들어서 전체 윤곽이 몸채 뒤쪽의 날개부분까지 합쳐 "□"자 형이 되어 아주 독특한 평면이며,

 

 

 

마당 한쪽에는 돌을 파서 만든 물확과 멧돌이 있어,

가운데가 움푹 팬 물확은 돌절구 또는  물을 담아 손,발을 씻는등의 용도로 생활에 쓰이기도 했습니다.

 

 

 

안채의 중심부분은 대청으로 주간(柱間)이 개방되어 있으며,

대청 좌우로는 안주인의 거처인 안방과 건넌방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안채에는 사람이 기거하고 있다고 하니 방을 들여다 보지는 못하고,

 

 

 

안채의 부엌에도 풍수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오고 있어,

유이주(柳爾胄)가 집을 짓기 위해서 집터를 잡고 주춧돌을 세우기 위해 땅을 파는 도중,

부엌자리에서 어린아이의 머리크기만한 돌거북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운조루의 터가 풍수지리에서 말하는 "금귀몰니(金龜沒泥)"의 명당을 입증하는 것으로,

돌거북은 운조루의 가보로 전해 내려 오다가 1980년대 후반에 도난 당했다고 합니다.

 

 

 

수명을 뜻하는 거북이 나온 자리에 부엌을 들인 것도 매우 의미 심장하며,

부엌은 사람 생명을 건사하는 중심으로 집의 어느 곳과도 끊어지지 않아야 하는 곳으로,

실제로 큰 부엌은 다른 공간으로의 접근성이 뛰어나 여러 개의 마당과 연결되어,

사랑채는 물론이고 작은 부엌을 통해 사당으로도 연결 되고 있습니다.

 

 

 

부엌 뒤편에는 작은 행랑채 방향으로 다락이 있어 사다리로 오르면 들여다 볼수도 있으며,

 

 

 

안채 부엌의 뒷문으로 나오면 "T"자 모양으로 아담하게 담장을 두어 외부에 대한 여인을 노출을 막아 두었으며,

길고 작은 화단이 있고 사랑채로 통하게 되어 있어,

 

 

 

사랑채의 온돌방과 누마루 사이의 마루로도 통할수 있습니다.

 

 

 

큰 부엌 건너편엔 작은 부엌이 있어,

 

 

 

작은 부엌은 비교적 작은편이며 이곳을 통하여 사당 으로도 갈수 있습니다.

 

 

 

작은 부엌을 나서면 잘꾸려진 화단을 만나게 되고,

 

 

 

오른쪽에는 사당과 바깥의 화장실로 통하는 통로가 있어,

 

 

 

일각문과 낮은 담장 너머로 사당이 보이며,

 

 

 

고택(古宅)의 동북편에 자리하고 있는 사당으로,

담장을 둘렀으며 맞배지붕의 작은 규모의 사당 입니다.

 

 

 

사당 앞길 쪽에는 또하나의 협문이 있어,

협문 바깥에도 화장실이 있으며,

안채에서 밖으로 나갈수 있는 후문으로 보여 집니다.

 

 

 

조선시대 양반집의 전형적인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는 건물로 호남지방에서는 보기드문 예 이며,

넓은 대지에 충분한 공간을 확보하여 개방적으로 짓는 전라도 한옥과 높이를 강조한 경상도 한옥이 잘 조화를 이룬 건축물로,

명당에 자리한 고택(古宅)으로,

한국에서 손에 꼽히는 길지와 격조높은 한옥에서 하루를 보낼 수 있는 고택체험을 할수도 있는곳으로,

전남 구례의 명품고택(古宅) 운조루(雲鳥樓)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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