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승 제34호 이며,

"보길도 윤선도의 원림(甫吉島 尹善道 園林)" 가운데 "낙서재(樂書齋)"를 찾았습니다.

낙서재(樂書齋)는 사적 368호로 지정된 보길도의 윤선도유적 중 하나로,

1637년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가 보길도에 입도하여,

주산인 격자봉의 혈맥을 좇아 집터를 잡고 3칸 초가 로 된 집을 지었는데,

유흥공간인 '세연정"과 달리 "낙서재"는 강학하고 독서하는 공간 이었습니다.

 

낙서재(樂書齋)는 공자의 가르침을 즐거움으로 표현한 "발분망식(發憤忘食) 낙이망우(樂而忘憂)"에서 따와,

글을 즐거움으로 대하는 집이라는 의미이며,

 

낙서재는 보길도 안에서 가장 좋은 양택지라고 하며,

윤선도는 낙서재 터 뒤편에 있는 커다란 바위를,

"소은병"(주자가 경영하던 무이산 대은병의 건너편 봉우리)이라 부르면서,

주자의 행적을 따르고자 하였으며,

세월의 흐름으로 모두 사라지고 격자봉 아래에 터만 남아 있으나 돌담과 석축 일부는 확인 되었고,

주변에 무민당과 곡수당 등의 건물이 있었으나 지금은 모두 없어 졌으나,

2016년에 낙서재(樂書齋) 주변의 모든 건물이 복원 되었습니다.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는 고산(孤山)이라는 호에 어울리게,

10여 년을 보길도에 머물면서 세연정, 낙서재 등의 건물 25동을 짓고 섬 살이를 만끽 하였는데,

 

낙서재 앞에는 거북바위가 있는데 저녁이면 윤선도가 거기에 앉아 달을 즐겼다고 하며,

67세에는 거북바위 남쪽에 무민당을 짓고 못을 판 후 연꽃을 심었으며,

낙서재와 무민당 사이에 각각 한칸 크기의 동와와 소와를 지었고,

82세 때에는 낙서재 동쪽 개천가에 곡수당을 짓고 연못을 만들었는데,


곡수당 옆으로 흐르는 시내에서 옥구르는 소리가 들린다고 하여 "낭음계"라 하였는데,

이로 인해 낙수재와 무민당, 곡수당 등이 있는 주변을 통틀어 "낭음계정"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1637년 보길도에 들어와,

1671년낙서재에서 85세로 사망할때 까지 자신만의 세계를 즐겼으며,

세 번째 유배에서 풀려난 이후 칩거한 장소인,

고산(孤山) 윤선도(尹善道)의 보길도 유적지인 "낙서재(樂書齋)"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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