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175-1에 위치하고 있는,

"입암서원(立巖書院)" 입니다.

 

포항 입암서원(立巖書院)은 경상북도 시도기념물 제70호로 지정 되었으며,

1657년(효종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문강공(文康公)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신 서원으로,

 

 

 

 

서원으로 들어가는 문은 닫혀있어,

담장을 따라 돌면서 발 뒤꿈치를 들구서 들여다 보아야 하며,

 

 

 

 

서원 옆에는 세운지 오래지 않아 보이는 비석이 있어,

입암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는 동봉(東峰) 권극립(權克立)을 위한 비석으로 여겨지며,

 

 

 

 

한쪽에는 수령 320년을 넘긴,

노거수 은행나무가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으며,

 

 

 

 

1657년에 세운 입암서원(立巖書院)은,

1713년(숙종 29)에 정사진(鄭四震)을 추가배양하고 그 뒤 권극립(權克立)과 정사상(鄭四象),

손우남(孫宇男)을 배향하고 있으며,

이곳은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大院君)의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으로 훼손 되었고,

1907년 일인(日人)에 의해 묘우(廟宇)가 소실(燒失) 되었던 것을,

1909년 도내 유림(道內 儒林)들이 강당을 재건하였으며 묘우(廟宇)는 1972년에 재건 되었습니다.

 

 

 

 

강당은 정면 5칸에 측면 2칸으로 박공 형식의 측면 내림지붕으로,

일면 부섭지붕 이라고도 하는데 영천지역을 중심으로,

조선후기의 사우나 정자에서 간혹 볼수있는 지붕이며,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의 구조이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고,

 

 

 

 

입암서원(立巖書院)의 현판은,

1810년 영천 군수 오수엽이 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장현광(張顯光,1554∼1637)은 조선 중기 학자로 자는 덕회(德晦) 호는 여헌(旅軒) 본관은 구미 인동(仁同)으로,

1576년(선조 9년)에 학행으로 조정에 천거돼 예빈시참봉 등에 임명됐으나 나아가지 않았고,

이듬해 보은현감(報恩縣監)으로 부임했다가 사직을 청한 뒤,

관찰사의 허가없이 귀향해 직무유기로 의금부에 체포 되었으며,

1602년(선조 35년)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가했으며,

이후 사헌부지평·장령·집의·공조참의·대사헌·공조참판·지중추부사 등 20여 차례 관직에 임명됐으나,

모두 사퇴하고 오로지 학문연구에 전념 했으며,

1624년(인조 년2) 이괄(李适)의 난 뒤 부름을 받아 왕에게 정치에 대한 건의하고,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각 주·군에 격문을 보내 근왕군을 일으켰으나,

다음 해 삼전도(三田渡)의 항복 소식을 듣고 동해안 입암산에 들어간 지 반년 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입암서원의 묘우(廟宇)는 정면 3칸에 측면 단칸(單間)의 박공지붕이며,

묘우에는 장현광을 주벽(主壁)으로 좌우에 권극립·정사상·손우남·정사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서원 앞에는 조선 중기의 문인으로,

정철과 윤선도와 더불어 조선 3대 시가인으로 불렸던,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1561~1642)의 시비가 있어,

 

무정(無情)히 서난 바회 유정(有情)하야 보이난다

최령(最靈)한 오인(吾人)도 직립부의(直立不倚) 어렵거늘

최고(萬古)애 곳게 선 저 얼구리 고친 적이 업나다

 

 

 

 

노거수 은행나무 곁에는 함께 늠름하게 서있는 은행나무가 있어,

두 그루의 나무는 한쌍인양 어울리게 서 있고,

 

 

 

 

노계(蘆溪) 박인로(朴仁老)는 이기설(理氣設)에서는 독창적인 "이기경위설’(理氣經緯說)"을 제창 했는데,

이와 기를 경(經·날실)· 위(緯·씨실) 등 베 짜는 실에 비유해,

날실과 씨실이 별개가 아닌 상호 작용으로 베를 짜듯 도가 생성된다고 주장하여,

그의 철학은 남인 계열의 학자들 가운데 매우 이색적이고 독자적인 경향을 보였으며,

시호는 문강(文康)이며 저서로는 여헌집, 속집, 성리설(性理說), 역학도설(易學圖說), 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으며,

사후 영의정에 추증 되었습니다.

 

 

 

 

입암서원에서 일제당으로 가는 길에는,

1609년에 설립된 만활당(萬活堂)이 있어,

 

 

 

 

만활당(萬活堂) 역시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는 들어갈수 없으며,

 

 

 

 

만활당(萬活堂)은 막돌을 3단으로 쌓아 올려 그 위에다 세운 정자로,

정면3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으로 중앙 마루를 중심으로 좌우에 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구조이며,

둥근 기둥을 세운 3량의 홑처마 굴도리 집으로,

 

 

 

 

오른쪽에는 일제당과 왼쪽에는 입암 서원 등이 반경 안에 잡히고,

가사천를 둘러 보이고 주변의 산세와 함께 어우러지는 곳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지명은 경북 포항 이라고 하지만,

내륙 깊숙한 곳에 자리하고 있는 서원과 정자로,

먼길을 마다않고 찾은이들에게 문이 닫혀있어 아쉬움을 남게 한 곳으로,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의 유허가 있는 곳으로,

포항의 입암서원(立巖書院)과 만활당(萬活堂)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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