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거창군 웅양면 노현리에 있는 사우(祠宇)로,

경상남도의 문화재자료 제57호로 지정된 "거창 포충사(居昌 褒忠祠)"입니다.

 

포충사(褒忠祠)는 조선 영조 4년(1728)의 무신란 때 순절한 좌수(座首) 이술원(李述原) 장군을 모신 사당으로,

영조 13년(1737)에 세웠는데,

이술원(李述原) 장군은 조선 후기 무신이며 거창 출신으로 영조 4년(1728)에 거창 좌수로 있었는데,

1728년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안의(安義)에서 반란을 일으킨 정희량(鄭希亮)이 난을 일으키자,

나아가 대적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생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 그 충절을 기려 대사헌에 추증하고 충신정문을 세웠는데,

1737년 거창유생들의 발의로 사우가 건립되자 1768년 포충사로 사액 되었으며,

이후 영남우도(嶺南右道)에 있어서 노론계 사원(祠院)의 중심적인 구실을 하였으며,

1871년(고종 8) 대원군에 의한 서원훼철 때에도 특별히 존속 되었으며 이술원만을 독향(獨享) 하였습니다.

 

문이 닫혀있어 안으로 들어가 볼수 없는 포충사(褒忠祠)는,

이술원(李述原,1679∼1728)을 모신곳으로,

그의 본관은 연안(延安, 황해도 연백)이고 자는 선숙(善叔), 호는 화촌(和村)으로,

거창 출신 할아버지는 김해도호부사 중길(重吉)이며,

1728년(영조 4) 이인좌(李麟佐)가 난을 일으켜 청주를 점령하고 서울로 북상할 때,

안의의 정희량(鄭希亮)도 이에 호응하여 안의의 남리에서 난을 일으키니,

현감 오수욱(吳遂郁)은 현을 버리고 도망가 버렸는데,

이 때 그는 거창의 좌수(座首)로서 현감 신정모(申正模)에게 군사를 내어 정희량을 쳐야 한다고 하고,

곧 현병(縣兵)을 동원 하였으나 모두 도망갔고 오히려 정희량의 반군에 가담하는 자가 많았습니다.


정희량의 격서가 오자 신정모는 도망쳤으며 그만이 나아가 대적 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생포되어 모진 고문에도 굴하지 않다가 죽음을 당하였고,

그의 아들 우방(遇芳)은 우영장(右營將)을 따라 거창에서 정희량을 공격 하였는데,

장사 여해달(呂海達)이 정희량을 사로잡아 군중(軍中)에 보내 오니,

그 자리에서 희량의 목을 베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았습니다.


그의 사절(死節)이 조정에 알려지자 양무원종공신(揚武原從功臣)에 봉하고 사헌부집의를 증직 하였으며,

뒤에 영조는 어사 이종성(李宗城)을 보내어 치제하게 하였고,

가선대부에 대사헌을 증직하는 동시에 관찰사를 시켜 거창의 포충사(褒忠祠)에 제향하게 하였으며,

시호는 충강(忠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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