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거창군 남하면 무릉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서원으로,

거창 영빈서원(居昌 瀯濱書院)입니다.

 

거창 영빈서원(居昌 瀯濱書院)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5호로 지정 되었으며,

 

 

 

 

서원으로 들어가는 외삼문에는 "광제문(光霽門)"의 현판이 있고,

 

 

 

 

영빈서원(瀯濱書院)은 1744년(영조 20)에 영천사(瀯川祠)라는 사우로 창건하여,

정구(鄭矩, 1350∼1418), 정종(鄭種, 1417∼1476), 정표(鄭彪, 1515∼1578), 정응두(鄭應斗), 정시수(鄭時修, 1601∼1647),

정영진(鄭榮振, 1672∼1728) 등 동래정씨 6현을 제향 하였는데,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사림과 후손들이 1919년에 중건하여 사우와 강당을 새로 짓고 영빈서원(瀯濱書院)으로 개칭 하였으며,

매년 음력 2월과 8월 중정일에 향사를 봉행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서원의 한쪽에는 1951년에 세운 "영빈서원육현묘정비(瀯濱書院六賢廟庭碑)"가 자리해 있고,

 

 

 

 

영빈서원은 정면 5칸, 측면 1칸반 규모의 팔작와가로,

왼편에 방 2칸, 가운데 2칸은 대청마루, 오른편에 방1칸을 둔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으로,

정면으로 계자난간을 설치하여 건물의 품위를 돋보이게 하였으며,

 

 

 

건물의 중앙에는 영빈서원(瀯濱書院)의 편액이 걸려 있는 강당 건물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05호로 지정 되었습니다.

 

 

 

 

영빈서원에서 배향하고 있는 인물로,

정구(鄭矩)는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이며 1377년(우왕 3)에 문과에 급제 하였으며,

조선이 개국되자 한성부우윤과 예문관학사 등을 지냈으며 시호는 정절(靖節)이며,


정종(鄭種)은 조선 전기의 무신으로 1442년(세종 24) 무과에 급제하여,

충청도절제사, 경상좌도도절제사, 경주부윤 등을 역임 하였으며,

이시애의 난을 평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 3등에 책록 되었고 시호는 양평(襄平)입니다.

 

 

 

 

정표(鄭彪)는 조선 중기의 학자로 호는 각금정(覺今亭)이며,

오가재를 건립해서 후진 강학에 힘쓰다 1576년(선조 9) 문과에 급제하여 옥과현감 등을 역임 하였고,


정응두(鄭應斗)는 자가 추경(樞卿)이며,

임진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창원진에서 싸우다 전사하여 판결사(정3품)에 증직 되었습니다.

 

 

 

 

정시수(鄭時修)는 1633년(인조 11) 진사시에 입격 하였고,

1636년에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적과 싸웠으나,

강화가 이루어지자 시국을 개탄하고 은둔생활을 하면서 시부로써 세월을 보내다가 죽었으며,

저서로 "금천집(琴川集)"이 있으며,

 

평암(平巖) 정영진(鄭榮振)은 부친상 이후 과거를 단념하고,

평암이라는 바위에 집을 지어 학문연구와 후진양성에 전념 하였고 사후 장악원정에 추증 되었으며,

편서로 『심학전결(心學傳訣)』·『심경속록(心經續錄)』 등이 있으며, 문집으로 『평암집(平巖集)』 5권이 전하고 있습니다.

 

 

 

 

강당의 기둥은 퇴칸 전면에만 원기둥을 쓰고 나머지는 모두 각기둥을 사용하였는데,

기둥에는 흘림을 두었으며,

일반적인 서원과는 달리 강학공간에는 동재와 서재는 없이 강당만 있으며,

 

 

 

 

강당 뒤편에는 제향공간인 위패를 모신 사당 구인사(求仁祠)로,

봄과 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습니다.

 

 

 

 

영천사(瀯川祠)라는 별칭이 있는 서원으로,

동래정씨 6현을 제향하고 있으며 1919년에 중건하여 서원으로 개칭한 곳으로,

"거창 무릉리 정씨고가"와 낙영재 (樂英齋)가 있어,

함께 찾아볼만한 곳으로 거창의 문화재인 영빈서원(瀯濱書院)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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