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거창군 가조면 장기리 778번지에 있는,

용천서원(龍泉書院)으로도 불리는 원천정(原泉亭)입니다.

 

원천정(原泉亭)은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51호로 지정 되었으며,

용천서원(龍泉書院)으로도 알려져 있는데,

 

 

 

 

솟을 삼문을 들어서면,

너른 마당과 함께 "一"자형의 건물이 한채가 있어,

 

 

 

 

원천정(原泉亭)은 원천(原泉) 전팔고(全八顧,1540~1612)가 후학 양성에 전념하기 위해 세운 건물로,

1587년에 지은 이 정자는 양쪽에 방을 1칸씩 만들고 가운데 마루를 2칸으로 한 4칸짜리 목조 기와집 이었는데,

1684년 수리 보수할 때 구조를 변경했다고 하며,

 

 

 

 

마당 한쪽의 담장옆에는 비석이 한기 보이고,

 

 

 

 

원천정(原泉亭)은 정면 4칸에 측면 1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며져 있으며,

왼쪽으로 마루 2칸과 오른쪽으로는 2칸의 방을 들였고 방 앞에 계자난간을 설치 하였습니다.

 

 

 

 

건물 바로 앞뜰에는 돌기둥 같은게 보여 불을 밝히는 용도의 석물로 여겨졌는데,

"사헌부 대사헌 원천전선생 신도비(司憲府 大司憲 原泉全先生 神道碑)" 라고 쓰여진 비석이며,

이휘령(李彙寧)이 비문(碑文)을 짓고 김진석이 글씨를 썼다고 합니다.

 

 

 

 

원천정(原泉亭)의 마루에 오르면,

 

 

 

 

마루 안쪽에 "원천정(原泉亭)"의 현판이 올려져 있고,

 

 

 

 

마루에서 방으로 향하는 문은 문짝 네개가 죽 잇달아 달린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어,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만든 넌출문으로 개방성을 더하였으며,

 

 

 

 

아쉽게도 방의 내부는 들여다 볼수 없습니다.

 

 

 

 

원천정(原泉亭)의 마루 위에는 정온 · 조경 · 오장 세 사람이 지은 시판(詩板)이 있고,

 

 

 

 

원서숙이 1636년에 지은 "원천정사기(原泉精舍記)"와,

1684년에 임동익이 지은 "원천정사중창상량문(原泉精舍重創上樑文)"의 기문(記文) 편액이 걸려 있습니다.

 

 

 

 

전팔고(全八顧,1540~1612)는 1540년 12월 15일 거창 가조면 원천에서 출생 했으며,

11세 때 논어와 중용을 독파하고 남명 조식 밑에서 학문을 익혔으며,

임진왜란을 당하여 전팔고는 거창, 합천, 고령, 성주, 현풍 등 각지에서,

의병장 김면(金沔), 박대암(朴大庵), 곽준(郭䞭) 등과 더불어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 조달을 위해 밀의한 후,

각지의 의병에게 연락을 취했으며 초유사 김학봉을 방문하여 정보를 교환하기도 했는데,

왜란 당시 이곳 원천정은 의병들의 비밀모의 장소로 이용 되었으며,

 

 

 

 

전팔고는 1593년 7월 명나라 장수 유정(劉綎)이 이끄는 군대가 거창군 가조에 주둔하고 있을 때,

그들의 군량미가 두절되자 쌀 수백 석을 그들에게 제공하기도 했으며,

그가 적극적으로 명나라 원군을 지원해 준 공을 인정하여 명나라 신종(神宗) 황제가 첨지중추부사 벼슬을 내렸고,

선조 임금이 대사헌의 벼슬을 내렸지만 사양하고 향리에서 학문을 연마하다가 1612년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원천정 뒤편에는 사당인 용천사(龍泉祠)가 있어,

1712년(숙종 38) 창건하여 1778(정조 2)년 용천서원(龍泉書院)으로 승격 하였으나,

1868년(고종 5) 훼철 되었다가 2001년에 중창하여,

형사보(邢士保), 류자방(柳子雱), 전팔고(全八顧), 전팔급(全八及), 서숙(徐䎘) 등 5현을 배향하고 있으며,

해마다 3월에 향례를 올린다고 합니다.

 

 

 

 

거창의 가조에서 찾은 문화재로,

국란을 맞아 의병을 규합하고 군량미를 제공했으며,

벼슬로 공을 치하 했으나 사양하고 향리에 묻혀 살았던,

원천(原泉) 전팔고(全八顧)를 되돌아 볼수있는 곳으로,

거창의 문화재, 원천정(原泉亭)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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