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북도 김천시 구성면 광명리 727-1번지에 위치하고있는,

성산 여씨가 소유하고 있는 목조 건축물로 "성산여씨하회댁(星山呂氏河回宅)"입니다.

 

성산여씨하회댁(星山呂氏河回宅)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388호로 지정 되었으며,

 

 

 

 

하회댁(河回宅)을 들어서면 일반 고택과는 많은 차이점을 볼수있는데,

대문채는 있으나 담장이 없으며 정침도 사랑채와 안채의 구분이 힘들정도로 "n"자 형으로 배치되어 있는데,

 

 

 

 

이 건물은 여명주(呂命周, 1681∼?)에 의해 18세기 초에 건축되었다고 전해지는 가옥(家屋)으로,

대문채는 정면 3칸 측면 1칸의 홑처마 팔작기와집인데,

현재는 대문의 기능을 상실한 채 헛간의 용도로 사용되고 있으며,

벽체는 모두 탈락되었으며 지붕은 일식(日式)기와를 얹었습니다.

 

 

 

 

하회댁(河回宅)은 건립당시 60칸 건물로 건축 되었지만,

조선후기인 1870년의 농민항쟁기와 1936년의 수해 등으로 소실 또는 붕괴되어,

정침과 사당, 대문채만 남아 있는 상태인데 지금 있는 건물은 그 후에 고쳐 세운 것으로 짐작되며,

 

 

 

 

대문채의 우측의 뒤편에 정침에 자리잡고 있는데,
최근에 보수를 하여 상태는 매우 양호한 편이며,

 

 

 

 

정침은 "ㄷ"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상방과 안방을 두었는데,  ,

 

 

 

 

상방의 전면으로는 작은방, 부엌, 고방, 사랑방,누마루가 연접되어,

좌익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가구는 5량가로 안채의 종도리 사이에는 우물반자를 설치 하였는데,

이러한 형태는 조선 후기적인 양식으로 보여지기는 하나 흔치 않는 특이한 수법이며,

 

 

 

 

성산여씨하회댁(星山呂氏河回宅)은 신간회(新幹會)를 이끌고 광명학숙(光明學塾)을 차려,

독립운동을 한 여환옥(呂煥玉,1896∼1963) 선생이 태어나고 자란 곳이라 하며,

 

 

 

 

안채의 마루 오른쪽에는 다락이 있는 작은 부엌이 있고,

 

 

 

 

작은 부엌과 마루사이에는 건너방(작은방)을 두었고,

 

 

 

정침의 왼쪽에는 안방과 큰 부엌이 배치되어 있어,

 

 

 

 

마루에서 안방으로 통하는 분은 특이하게,

마루나 방 앞에 설치하여 접어서 들어 열수있게 만든 들문인 분합문(分閤門)을 두었고,

 

 

 

 

안방은 밝고 깨끗하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이곳이 생가인 여환옥(呂煥玉)은 1920년대에 사재(私財)를 털어 광명강습소(光明講習所)인,

광명학숙(光明學塾)을 개설하여 3년 동안 인근 청소년들의 계몽과 관련된 교육활동을 전개 하였고,

1927년 2월 중앙에서 민중의 민족의식과 사회의식의 각성을 촉진하고 민족운동세력을 규합하여,

타협적인 자치운동을 배격하고 절대독립 쟁취를 궁극목적으로 한,

민족협동전선으로서의 신간회(新幹會)가 창립 되었는데,

1927년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신간회운동에,

김천지역 지회장(支會長)으로 선출되어 식민지 지배정책에 반대하는 등 독립운동에 헌신 하였습니다.

 

 

 

 

정침은 "ㄷ"자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는데,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6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상방과 안방을 두었는데,

상방의 전면으로는 작은방과 부엌그리고 고방, 사랑방과 누마루가 연접되어 좌익사를 형성하고 있습니다.

 

 

 

 

성산여씨하회댁(星山呂氏河回宅)의 한쪽에는 봄이 왔슴을 알려주듯,

붉은 동백이 만개하여 있습니다.

 

 

 

 

독립운동가였던 여환옥(呂煥玉)의 생가이며,

"ㄷ"자형의 가옥구조에 안채와 사랑방 그리고 좌익사까지 모두 함께 있는,

특이한 구조의 배치형대를 보여주는 고택으로,

근대기로 넘어 오면서 변화하는 주택의 모습을 볼수 있는곳으로,

경남 거창의 "성산여씨하회댁(星山呂氏河回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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