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남해군 남해읍 남변리 555번지에,

위치하고 있는 "남해 유배문학관"입니다.

 

남해유배문학관은 국내 최대 문학관으로,

유배문학을 연구하고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2010년 11월에 개관 되었으며,

 

 

 

 

박물관 앞에는 돛단배의 형상으로 화장실을 지어 두어 눈길이 가는데,

배의 이름도 조선 숙종 때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고전소설인 "구운몽(九雲夢)"에서 따온,

"구운몽호"로 되어 있습니다.

 

 

 

 

유배문학관의 마당에 야외 전시장에는,

초가삼간을 지어놓고 선비 한사람이 마루에 걸터 앉아 있어,

이제 막 이곳으로 도착한듯 보이기도 하며,

 

 

 

 

초옥 앞마당에는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가 서있어,

남해에 유배되었던 소재 이이명의 “매부(梅賦)”와 그를 기린 사당인 봉천사에 있었던 묘정비로,

군보호문화재 3호이며 비의 높이가 260cm이고 폭 83cm, 두께는 32.5cm의 규모이며,

 

 

 

 

봉천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 되었고,

봉천사묘정비는 남해공용터미널 맞은편 봉강산 자락에 옮겨져 있다가,

2011년에 이곳으로 이전 되었습니다.

 

 

 

 

우리민족의 기본 생활공간 이었던 부엌하나에 방두칸으로 하는 "초가삼간"이 있고,

 

 

 

 

마루에는 먼길을 걸어 유배지에 막 도착한듯,

벌써 한양쪽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모습을 그려둔듯 합니다.

 

 

 

 

유배문학관의 건물 앞에는,

연못 또는 개울처럼 조성해 두었는데,

 

 

 

 

임금의 부름을 기다리며 세월을 낚듯,

물가에 자리하여 시간을 낚는 유배자의 모습을 표현해 두었고,

 

 

 

 

이곳 남해로 유배온 인물이 많았기에,

그들의 문학작품 등을 시비로 조성해 두었는데,

 

조선후기에 함경도관찰사, 형조판서,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인 약천(藥泉) 남구만 南九萬,1629~1711)의 시비로,

농촌의 아침 정경을 여유있게 표현해 운치와 멋을 살린 대표적인 권농가(勸農歌) 중의 하나이며,

널리 알려져 있는 시조인 "동창이 밝았느냐 노고지리 우지진다 소치는 아이는 상기 아니 일었느냐

재너머 사래 긴 밭을 언제 갈려 하느니"의 지은이 이며,

당시 서인의 중심인물 이었으며 문장과 서화에도 뛰어 났던 인물입니다.

 

 

 

 

조선 중기의 문신 조선의 4대 명필중 한 사람 자암(自菴) 김구(金絿,1488~1534)의 시비로,

그가 지은 경기체가인 "화전별곡(花田別曲)"은 남해도(南海島)로 유배되어 갔을 때,

그곳의 뛰어난 경치와 향촌(鄕村)의 인물들과 어울려 풍류를 즐기던 정서와 감회를 노래 하였는데,

남해를 신선이 사는 섬으로 극찬한 "화전별곡(花田別曲) 제 1장"이 쓰여져 있습니다.

 

 

 

 

"구운몽"과 "사씨남정기" 등의 소설을 남긴 조선 후기의 문인인,

서포 김만중(西浦 金萬重, 1637~1692)의 약력과 시(詩)로,

남해의 유배지에서 어머니 생신일에 지은 "思親詩(사친시)"가 있어,

今朝欲寫思親語 (금조욕사사친어) 오늘 아침 어머니 그리는 말 쓰려하니

字未成時淚己滋 (자미성시누기자) 글자도 쓰기전에 눈물 이미 넘쳐나네

幾度濡毫還復擲 (기도유호환복척) 몇번이도 붓을 적셨다가 다시 던져 버렸으니

集中應缺海南詩 (집중응결해남시) 문집 가운데 해남시는 응당 빠지게 되네

 

 

 

 

김만중(金萬重,1637~1692)의 동상도 볼수있어,

본관은 광산, 자는 중숙, 호는 서포이며,

많은 시문과 잡록, 〈구운몽〉·〈사씨남정기〉등의 소설을 남겨 한국문학사의 주요 인물로 평가되는 인물로,

"모정국문(母情國文)"이라하여 어머니에 대한 정과 국문인 한글에 대한 사랑이 컷던 이로,

1665년(현종 6)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듬해 정언·부수찬이 되고 헌납·사서등을 거쳤고,

1679년(숙종 5)에 다시 등용되어 대제학·대사헌에 이르렀으나 당쟁의 여파로 남해의 절도에 유배되어 죽었습니다.

 

 

 

 

조선 후기의 왕족 출신 문신·정치인·학자로 노론 4대신의 한사람인,

이이명(李頤命,1658~1722)은 숙종·경종대에 노론을 주도하며,

주자도통주의(朱子道通主義)에 기반한 정치이념을 적극 실현하고자 하였으며,

서양 학술사상을 국내에 소개하기도 하여 노론 실학파의 형성의 실마리를 제공 하였던 인물로,

초옥 앞마당에 있는 "봉천사 묘정비(鳳川祠 廟庭碑)"의주인 이기도 하며,

 

"매부(梅賦)"는 1692년 남해에 유배 당하였던 때 지은 작품으로,

장인의 적소에 있던 매화나무 두 그루가 주인을 잃고 시들어가고 있어,

자신의 적소로 옮겨와 심었고 장인을 칭송하며 "매부" 시를 남겼다고 합니다.

 

 

 

 

조선후기에 지평과 세손강서원유선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학자인,

박성원(朴聖源,1697~1767)은 대나무 시인으로 알려져 있는데,

1744년 지평(持平)으로 있을 때,

영조가 기로소(耆老所: 70세이상 문관 정2품 이상의 노인 우대소)에 들어감을 반대하다가,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 죄인의 배소에 가시울타리를 쳐 그 안에 가두어 둠) 되었다가 2년 뒤 석방 되었으며,

남해 보리암에 올라 아름다운 경치를 노래한 "지보리암 총론제승 성일률"입니다.

 

 

 

 

남해 유배문학관의 앞에있는 남해와 관련한 유배인들의 시비를 둘러보고,

 

 

 

 

앞에는 옛날에 유배지로 향하던 모습을 재현해 두었는데,

 

 

 

 

사람도 소도 코로나의 무서움은 피할수 없었는지,

마스크를 착용한 모습이며,

 

 

 

 

호송되는 죄인도 어김없이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습니다.

 

 

 

 

유배문학관의 야외전시장을 둘러보고,

안으로 들어가 보면,

 

 

 

 

남해 유배문학관의 입장료는 유로이며,

어른이면 2,000원으로 입장권을 발매 하여야 하며,

 

 

 

 

우리나라 최초로 건립된 남해유배문학관은,

세월 속에 잊혀져 가는 유배객들을 기리는 문학의 진한 향기가 피어나는 공간으로,

주요 시설로는 남해의 자연, 역사, 생활, 문화를 소개하는 향토역사실과,

전 세계 유배의 역사와 문학을 다루는 유배문학실이 있고,

유배지에서의 생활상을 통해 유배문학이 탄생한 과정을 알아볼 수 있는 유배체험실과,

김만중을 비롯한 6명의 유배객과 문학작품 및 유배문학이 국문학에 끼친 영향을 소개하는 남해유배문학실이 있습니다.

 

 

 

 

전시실에서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조선 후기에 김만중(金萬重)이 지은 고전소설인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의 필사본으로,

이 작품은 숙종이 인현왕후(仁顯王后)를 폐출하고 장희빈(張禧嬪)을 중전으로 책봉한 사건에 대하여,

숙종이 미혹됨을 깨닫고 모든 것을 원상으로 회복시키기 위한 목적을 담고 있는데,

\권선징악의 수법을 고도로 원용하여 쓴 폭로·풍간(諷諫) 소설이라 할 수 있으며,

17세기 중·반기 본격적인 소설시대를 열어주었다는 문학사적 의의를 가지는 작품입니다.

 

 

 

 

조선후기의 문신 김만중이 저술한,

시화·수필에 관한 평론집과 시화평론집인 "서포만필(西浦漫筆)"의 필사본으로,

비평의 객관성 추구를 기본과제로 삼으면서,

만필이기에 허용될 수 있는 자유를 최대한 이용해 관념의 허위를 비판하고 국문문학을 적극 옹호 했습니다.

 

 

 

 

유명한 소설인 "구운몽 (九雲夢)"으로,

김만중(金萬重)이 1687년 선천 유배 시절에,

어머니 윤씨 부인의 한가함과 근심을 덜어주기 위하여 지었다고 전해지는 한국 고소설의 대표 작품으로,

문체가 우아하고 묘사가 세밀하며 더욱이 사상적 깊이까지 더해,

유식한 독자층에서도 〈구운몽〉만큼은 소설이라고 낮잡아 보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향토 역사실로 들어오면,

남해에 관한 많은 자료와 물품들이 전시되어 있어,

 

 

 

 

남해 에서만 볼수있는 원시어업인 "죽방렴(竹防廉)"으로,

좁은 바다의 물목에 대나무로 만든 그물을 세워서 물고기를 잡는 재래식 어항으로,

"어살"로도 불리며 지족해협 등에서 현재 23개소의 죽방렴이 설치되어 있는데,

우리나라 전통적 어업경관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곳이기도 하며,

 

 

 

 

남해의 특산품들도 전시해 두어,

 

 

 

 

남해의 대표 농산물인 유자와 시금치 그리고 고사리 등이 전시 되어 있고,

 

 

 

 

무형문화재 제26호인 "남해선구줄끗기"의 모습으로,

남해군 남면 선구마을에서 정월 대보름날 행하는 줄다리기의 한 종류이며,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에 아랫마을을 남편으로,

윗마을을 북편으로 나누어 시작되는 줄끗기는 세시풍속 이기도 합니다.

 

 

 

 

마치 성문과 같은 공간을 지나게 되면,

 

 

 

 

영상을 방영하는 시청각 공간인데,

마치 소가 이끄는 옥에 들어가 관람하듯 조성해 두어 눈길이 가며,

 

 

 

 

죄인을 취조하고 조사할때 쓰는 형구들이 보여,

 

 

 

 

직접 체험해 보고 기념사진을 남길수 있게 해 두었고,

 

 

 

 

좁은 공간의 밀실을 만들어 두어,

유배객의 감금체험을 할수 있도록 해 두었습니다.

 

 

 

 

중죄인에 대한 유배형 중의 하나인 "위리안치(圍籬安置)"의모습도 볼수있어,

위리안치(圍籬安置)는 죄인을 배소에서 달아나지 못하게 하기 위해,

귀양간 곳의 집 둘레에 가시가 많은 탱자나무를 돌리고 그 안에 사람을 가두었는데,

 

 

 

 

탱자나무는 전라남도에 많았기 때문에,

대개 죄인들은 전라도 지역의 섬에 유배 되었다고 합니다.

 

 

 

 

이어지는 전시실 에서는,

조선시대 죄목과 형벌에 관하여 모형으로 전시 해두었는데,

 

 

 

 

태형(笞刑)은 작은 형장(荊杖)으로 볼기를 치는 오형(五刑) 가운데 가장 가벼운 형벌로,

조선시대에는 5종의 형벌 중 가장 가벼운 형벌이었으며 면포에 돈을 바치고 면제받을 수도 있었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일제강점기까지 실시되다가 1920년에 폐지 되었으며,

 

 

 

 

 

장형(杖刑)은 큰 형장(荊杖)으로 볼기를 치는 오형(五刑)의 하나인 형벌로,

쓰는 형구는 큰 가시 형(荊)나무 가지로 만드는데 옹이나 눈은 반드시 깎아 버렸다고 하며,

태형에 비해 치는도구가 좀 더 커졌음을 알수 있습니다.

 

 

 

 

도형(徒刑)은 범죄자를 타 지역에 보내 강제노역에 종사시키는 것으로 강제노역이 있다는 점에서 유형과 다르며,

우리나라에서 강제노역은 제지(製紙)·제와(製瓦)·제탄목(製炭木) 관청잡역 등 각종 노역에 종사 시켰는데,

도역 장소가 멀 때는 유배의 한 형태라 할 수 있으나,

3년 이하의 기간이 정해져 있고 유형지보다는 가까운 곳에 배치 되었습니다.

 

 

 

 

유배(流配)라고도 하는 "유형(流刑)"으로,

중한 죄를 범했을 때 차마 사형에는 처하지 못하고 먼 곳으로 보내어,

죽을 때까지 고향에 돌아오지 못하게 하는 형벌이며,

의금부나 형조에서 유배형을 받으면 도사 또는 나장들이 지정된 유배지까지 압송 하였는데,

그곳에서 고을 수령에게 인계하고 수령은 죄인을 보수 주인(保授主人)에게 위탁 하였고,

보수 주인은 그 지방의 유력자로서 집 한 채를 거주할 곳으로 제공하고 유죄인을 감호하는 책임을 졌는데,

그곳을 "배소" 또는 "적소(謫所)"라고 하였습니다.

 

 

 

 

범인의 생명을 박탈하는 형벌인 "사형(死刑)"으로,

형벌의 성질상 가장 중한 것이기 때문에 "극형(極刑)"이라고도 하며,

조선시대의 사형집행방법에는 능지처사(凌遲處死)·효수(梟首)·기시(棄市) 외도 오살(五殺)외,

교수(絞首)·거열(車裂)·포살(砲殺) 등 다양 하였습니다.

 

 

 

 

남해는 고려시대부터 조선시대까지 180여 명에 이르는 유배객이 거쳐간 곳으로 알려져 있는 곳으로,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한 문장가 200여 명의 유배문학을 연구하고,

전국의 유배 역사와 문학에 관한 체계적인 연구와 문학 인프라 구축을 목적으로 설립된 유배 전문 문학관 입니다.

 

 

 

 

보물섬 남해를 여행 하면서 찾은곳으로,

남해에서 유배생활을 한 문장가 200여 명의 유배문학을,

연구, 계승, 발전시키기 위해 세워진 곳으로 "남해 유배문학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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