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가옥인 "거창 동계종택(居昌 桐溪 宗宅)"입니다.

 

거창 동계종택(居昌 桐溪 宗宅)은 국가민속문화재 제205호로 지정 되었으며,

"정온선생고택"으로도 불리는데,

 

 

 

 

솟을대문의 대문간채를 들어서면 문위에 정려문(旌閭文)이 있어,

"문간공동계정온지문(文簡公桐溪鄭蘊之門)"이라 쓰여 있어,

10년이나 귀양살이를 하면서까지 영창대군의 처형을 반대한 충절과,

병자호란 때에는 끝내 화친을 반대하여 절의를 굽히지 않았던 동계(桐溪) 정온(鄭蘊)을 기려,

인조 임금이 내린 정문 입니다.

 

 

 

 

대문을 들어서면 "ㄱ"자형의 사랑채가 자리해 있고,

 

 

 

 

사랑채의 누마루 앞에는 수령 80년의 노거수 매화나무가 한그루 있어,

 

 

 

 

매화가 고풍스럽게 피어나 있습니다.

 

 

 

 

동계종택(桐溪 宗宅)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정온(鄭蘊,1569∼1641)이 태어난 집으로,

후손들이 순조 20년(1820)에 다시 짓고 정온의 신위를 사당에 모셔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사랑채는 꺾인 부분을 누마루로 꾸미고 눈썹지붕을 설치한 점이 특이한데,

안채와 사랑채는 북부지방 가옥의 특징인 겹집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기단은 낮고 툇마루를 높게 설치한 남부지방 고유의 특징도 함께 가지고 있으며,

 

 

 

 

사랑채의 누마루에는 개방성을 더하기 위해 들문인 사분합문(四分閤門)을 두었는데,

문의 장식이나 윗부분의 창문을 고려하면 조선후기의 양식을 볼수있고,

 

 

 

 

초석은 그리 다듬지 않은 덤벙주초에,

마루로 오르는 디딤돌도 자연석에 가까운 돌을 두었는데,

 

 

 

 

디딤돌 위에는 마치 바깥 주인이 있는듯 고무신 한켤레가 놓여 있습니다.

 

 

 

동계종택(桐溪 宗宅)의 주인인 정온(鄭蘊, 1569년 ~ 1641년)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본관은 초계(草溪)이고 자는 휘원(輝遠), 호는 동계(桐溪) 또는 고고자(鼓鼓子)이며,

1569년(선조 2) 경상도 안음현 역동리(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강천리)에서 출생 하였으며,

약관에 이르러 조월천과 정한강의 문하에서 두루 유학 하였는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킨 아버지를 도왔고,

1599년(선조 32) 가야산에 가서 정인홍의 제자가 되었으며,

 

 

 

 

1604년(선조 37)에는 도내의 많은 선비들과 함께,

오현의 문묘 종사를 청원하는 상소를 가지고 한양으로 올라 갔는데,

이때 선조가 상소문을 가지고 온 선비들을 대상으로 특별히 정시를 치렀는데 정온이 2등을 하였으며,

1606년(선조 39) 진사시(進士試)에 급제하였고 1607년에는 고을 사람들이 정온을 학행으로 천거 하였습니다.

 

 

 

 

1610년(광해군 2)에 별시 문과에 을과로 급제 하였고,

이후 영창대군이 강화부사 정항에 의해서 피살되자,

정항의 처벌과 당시 일어나고 있던 폐모론의 부당함을 주장하는 격렬한 상소를 올렸으며,

광해군이 분노하여 이원익과 심희수 등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온을 국문하고 제주도 대정현에 위리안치 하였고,

 

 

 

 

1627년(인조 5) 정묘호란이 일어나자 정온은 곧장 강화도의 행재소로 가서 인조를 호위 하였고,

후금의 군사가 물러간 후 한성부 우윤과 병조참판에 임명 되었으며,

이때 정온은 사직을 청하였으나 인조가 시국이 어지러우니 계속 머물러 직임을 보라며 거부 하였고,

1628년에 승정원 도승지와 예조참판을 1629년에 이조참판과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되었는데 모두 나가지 않았으며,

이후 고향에 머무르면서 여러 차례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직 하였으며,

상소문을 올려 공신 세력을 견제 하기도 했습니다.

 

 

 

 

1636년(인조 14) 사헌부 대사헌에 임명 되었는데,

이때 상소를 올려 청나라와의 관계에 대한 척화를 주장 하였고,

그해 12월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남한산성으로 들어가 적들과 맞섰으나,

1637년 전세가 불리해지자 최명길 등이 화평 교섭을 진행 하였는데,

정온은 이를 매국으로 보고 강력하게 척화를 주장 하였으나,

그러나 강화도가 함락되자 인조는 남한산성에서 내려가 항복하기로 결정 하였고,

이 소식을 들고 분개한 정온은 칼로 자결을 시도하였으나 뜻을 이루지는 못했으며,

끝내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항복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 왔습니다.

 

 

 

 

1638년(인조 16)에 고향으로 내려와 덕유산의 모리(지금의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농산리)에 은거 하였는데,

모리는 인적이 드문 골짜기로 정온은 이곳에 풀을 엮어 집을 만들고 흙을 쌓아 침상을 만든 뒤,

"모리구소(某里鳩巢)"라 이름을 붙였으며,

산밭을 개간하여 기장과 조를 심어 자급자족하다 1641년에 생을 마감 하였습니다.

 

 

 

 

중문간채 앞에 있는 아래채로,

외양간과 고방이 배치되어 있으며,

하인이 거처 할만한 1칸의 방이 중문 쪽에 나있고,

 

 

 

 

복원하여 새로 지은듯한 아래채의 외양간도 들여다 보구선,

 

 

 

 

사랑채 옆에는 안채로 들어가는 중문이 있지만,

중문에는 안채는 사생활 공간으로 관람하기 어려워 슬쩍 들여다 보기만 합니다.

 

 

 

 

안채도 사랑채와 같이 남향인데,

정면 8칸에 측면 3칸 반의 전·후퇴 있는 두 줄의 겹집으로 사랑채의 평면구성과 함께 저리해 있으며,

거창은 남쪽지방인데도 북쪽지방에서 많이 보이는 겹집의 형태를 갖추고 있어 주목되며,

안채나 사랑채는 기단이 낮은 반면 툇마루가 높게 설치되어 남쪽지방의 특색에서 벗어나지는 않았습니다.

 

 

 

 

동계(桐溪) 정온(鄭蘊,1569~1632)의 생가로,

그의 후손들이 그의 생가를 1820년에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종택으로,

동계(桐溪) 정온(鄭蘊)의 생을 되돌아 볼수 있고,

조선 후기 양반주택의 형태를 알아 볼수있는 곳으로,

경남 거창의 문화재인 "동계종택(桐溪 宗宅)"입니다.

 

다음검색

저작자 표시 컨텐츠변경 비영리

+ Recent pos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