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창녕군 대합면 대동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재사로,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262호인 "창녕 금호재(昌寧 琴湖齋)"입니다.

 

금호재(琴湖齋)는 조선 중종(재위 1506∼1544) 때 병조판서를 지낸,

금헌(琴軒) 이장곤(李長坤,1474~1519)의 제사를 지내는 곳으로,

이장곤(李長坤,1474~1519)은 조선 전기의 문신으로 죽은 뒤 창녕의 영암서원에서 제사를 모셨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영암서원도 사라지게 되었으며,


원래 금호재는 용흥사(龍興寺)의 부속건물 이었던 것을,

1966년 이곳으로 옮겨 지어 이장곤(李長坤)의 제사건물로 삼은 것으로 보이는데,

용흥사(龍興寺)가 1695년까지 있었던 것을 고려하면,

적어도 17세기 후반에 세운 건물로 보기도 합니다.

연화 무늬의 공포와 망와에는 "병오년(丙午年) 9월 11일"이라는 명문이 있다고 합니다.

 

이장곤(李長坤,1474~1519)은 연산군 8년(1502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로 있던 중,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로 유배 당 하였으며,

그곳에서 함흥으로 도주하여 지내다가 중종반정으로 조정에 들어오게 되었는대,

중종 14년(1519년)에 일어난 기묘사화 때 병조판서로서 영의정 정광필과 함께 추국에 참여하였으나,

조광조의 처벌을 반대하여 파직 되었는데,

그후에는 벼슬길에 나가지 않고 자연을 즐기다가 창녕에서 생을 마감 했습니다.


숙종 21년(1695년)에 이승언(李承彦)과 성안의(成安義)와 같이 창녕 연암서원(燕巖書院)에 배향되었으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서원이 없어져 금호재(琴湖齋)로 옯겼으며,

 

건물은 앞면 4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에서 보면 여덟 팔(八)자 모양의 팔작지붕으로,

대청과 온돌방시설이 갖추어져 있으며,

방의 출입문은 기능적인 면과 장식적인 면 모두를 갖추고 있어 실용성이 돋보이는 건물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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