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상남도 창녕군 성산면 냉천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자로,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는 "창녕 부용정(昌寧 芙容亭)'입니다.
부용정은 선조 15년(1582)에 한강(寒岡) 정구(鄭逑,1543∼1620)가 학문을 가르치기 위해 지은 정자로,
후에 부용당(芙蓉堂) 성안의(成安義,1561∼1629)에게 넘겨 주었는데,
정구(鄭逑)는 성안의(成安義)의 스승으로 일찍이 오건에게 『주역』 등을 배웠고,
이어서 이황과 조식에게서 성리학의 의미를 터득하여 사림의 일두가 되었는데,
그는 학식과 덕망이 뛰어난 그는 관직에 연연하지 않고,
학문에 전념하면서 후배양성에 힘을 써 성리학을 전파하는데 크게 이바지 하였습니다.
스승인 정구(鄭逑,1543~1620)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성리학자이며 철학자로 역사학자, 작가, 서예가, 의학자이자 임진왜란기의 의병장이며,
제자인 성안의(成安義,1561∼1629)는 1591년(선조 24)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하였고,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로서 고향인 창녕에서 의병을 모집 하였는데,
충의위(忠義衛) 성천희(成天禧), 유학(幼學) 곽찬(郭趲) 등과 함께 거병하여,
약 1,000여 명을 거느리고 곽재우(郭再祐) 휘하에서 활약 하였으며,
그후 인조반정으로 성균관사성(成均館司成)이 되고, 다시 상의원(尙衣院)·봉상시(奉常寺)의 정(正)에 옮겼다가,
이괄(李适)의 난 때 국왕을 공주로 호 행하였으며,
1624년(인조 2)에 제주목사를 제수받았고 1628년에 우부승지에 임명되었지만 병을 핑계로 사양 하였습니다.
사후 이조판서·양관대제학(兩館大提學)을 추증 받았고,
창녕의 연암서원(燕巖書院)과 물계서원(勿溪書院)에 제향 되었습니다.